#4
“이 천박한 것!”
주방에서의 난리가 공작부인의 귀에 안 들어갈 리가 없었다. 특히 그녀의 수족과도 같은 공작가의 주방장이 뺨을 맞았으니 말이다. 아마도 당사자가 직접 가서 이야기했을 수도 있었다. 어쨌든 샐리의 입장에서는 메리의 뺨을 얼음으로 찜질해준 뒤 방에서 내보낸 뒤였다. 그렇기에 혼자 공작부인의 패악을 감당하면 된다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을 바라보는 독기가 가득한 눈. 저 뱀과도 같은 형형한 눈빛에서 느껴지듯이 분명히 자신에게 폭력을 행사하려 들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오셨네요.”
“하, 절 키워준 분이 돌아가셨는데 감히 허락도 안 받고 저택 밖을 나돌아다녀? 오히려 이게 기회다 싶었니?”
이 부분에 대해서는 말을 아끼는 것이 좋았다.
크리스토퍼 경을 만나고 왔다는 이야기를 경솔하게 했다가는 괜히 공작부인이 이상한 낌새를 눈치챌 것이 뻔했다. 샐리는 죄책감을 느낀다는 듯이 고개를 살짝 숙여 최대한 자신을 노려보는 공작부인과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했다.
“그래서 밖에 왜 나간 건지나 말해.”
공작부인의 물음에 샐리는 입을 꾹 닫은 채 대답하지 않았다. 이윽고 언성이 높아진 채로 똑같은 질문이 한 번 더 들어왔지만, 샐리는 이번에도 대답하지 않고 그냥 넘겼다.
“뻔뻔하기가 제 어미를 닮았구나. 너도 제 어미처럼 밖에서 남자라도 만난 거니?”
이 부분에 대해서 샐리는 참을 수가 없었다. 평소에도 공작부인에게 좋은 소리를 들은 적이 없었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자신의 엄마를 모욕하는 말은 그냥 듣고 넘기기가 힘들었다. 애초에 공작의 문란한 행실에 대해 누구보다도 잘 아는 인간이 이런 식으로 피해의식을 갖는 것이 짜증이 났다.
“그게 아니란 거 알고 계시잖아요.”
“너 지금 말대꾸하는 거니?”
딱 한 번 샐리는 어릴 때 공작부인에게 반항한 적이 있었다. 대놓고 자신의 엄마를 모욕하는 공작부인에게 대들었는데, 그 결과 다리에 피멍이 들도록 맞았었다. 그 뒤로 메리의 조언에 따라 되도록 공작부인과 마주치는 일이 없게 조심했고, 혹시나 마주쳐서 본인을 건들더라도 샐리는 언제나 참아왔다.
“저희 엄마가 아니라 공작님이 문제란 거 아시면서 왜 그렇게 말씀하시는 거예요. 애초에 공작부인께서 신경을 쓰셨다면 제가 지금 이 자리에 없었겠죠.”
남편이 아랫도리 함부로 놀리는 거 정말 몰라서 그러냐며 타박하는 속뜻이 담겨있음을 공작부인이 모를 리 없었다.
이번에도 공작부인의 화가 풀릴 때까지 그녀의 욕지거리를 들으며 꾹 참고 넘어갔으면 됐다. 하지만 애써 괜찮다는 얼굴로 자신을 달래던 메리를 떠올리니 가슴이 뜨거워졌다.
“하녀장!”
공작부인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문을 뚫고 밖으로 전달되었고, 바로 문이 열리며 하녀장이 들어왔다.
“그걸 가져와.”
공작부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하녀장이 방을 나갔다. 이윽고 들어온 그녀의 손에 굵직한 나무 몽둥이가 들려있었다.
“그이가 왜 널 그냥 나뒀는지는 몰라도 난 그럴 생각 전혀 없다.”
하녀장 뒤에 서 있던 몇몇 하녀들이 신호가 떨어지기 무섭게 샐리의 양팔을 붙잡고 치맛단을 걷어 올리며 종아리를 드러냈다.
“다신 밖에 나돌아다닐 생각 따위 못하게 해주마.”
그날 저녁 샐리의 방에서 공작부인의 매타작이 벌어졌다. 그러나 단 한 번도 고통스러운 신음이나 비명 따위는 들리지 않았다. 보는 사람도 참고 견디기 힘들 정도로 가혹한 매타작은 제법 긴 시간 동안 이루어졌다. 샐리는 어떻게든 참아내기 위해 입술을 꽉 깨물어서인지 공작부인의 화가 어느 정도 풀리고 난 뒤에 종아리만큼이나 입술 상태도 좋지 않았다.
“독한 년.”
조금의 신음조차 내지 않는 샐리를 본 공작부인은 그렇게 말하며 혀를 한 번 찬 뒤 방을 나섰다. 그리고 공작부인이 나간 지 몇 분이 지난 뒤 어떻게 얻어온 것인지 얼음을 가져온 메리가 샐리를 침대까지 부축한 뒤 종아리에 얼음을 갖다 대었다.
“이대로 그냥 두면 흉 질 것 같으니까 제가 몰래 약 좀 가져올게요.”
“관둬. 아마 공작부인도 그럴 걸 생각하고 빌미를 잡을 생각을 하고 있을 거야.”
방을 나가는 공작부인은 처음보다 화가 많이 누그러진 모습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안심할 수 있는 인물이 아니었다. 한 번 그렇게 터지면 몇 날 며칠을 어떻게든 꼬리를 잡기 위해 혈안이 되었으니 말이다. 예전에 종아리를 맞았을 때 몰래 약을 가지러 갔던 메리가 걸려 함께 매타작을 맞았던 기억이 있었다.
“좀 참으시지 그러셨어요.”
메리는 불어 터진 샐리의 종아리를 보며 왜 괜히 대들었냐며 샐리를 타박했다. 그러나 샐리를 타박하는 그녀의 목소리에 좀처럼 힘이 없었다. 확실히 지금 당장 공작부인을 자극할 필요는 없었다. 그동안 감정을 잘 숨기던 샐리가 오랜만에 감정적인 대응을 했고, 그 결과가 종아리에 처참히 남게 되었다.
“이제 괜찮으니까 메리 너도 좀 쉬도록 해.”
전혀 괜찮지 않았다. 샐리는 여전히 쓰라리고 얼얼한 통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아마도 오늘 밤에 쉽게 잠들기 힘들 정도의 통증이었지만, 괜찮은 척하는 것이었다.
“전혀 안 괜찮아 보이는 데 제가 어떻게 쉬어요. 오늘 밤새 아가씨 곁에 있을 거니까 그렇게 아세요.”
지금, 이 순간만큼 어떤 말을 해도 물러날 생각이 없다는 메리의 태도에 샐리의 입가에 안심했다는 듯 미소가 번졌다. 여전히 종아리는 아팠지만, 이렇게 든든한 내 편이 있다는 생각에 자기도 모르게 안도감이 생긴 것이었다.
“어휴, 지금 그렇게 웃음이 나오세요?”
“메리가 너무 듬직해서 그래. 그것보다 나 노래 불러주면 안 돼? 메리의 노래를 들으면 종아리 아픈 게 많이 나아질 것 같기도 한데.”
예전부터 잠이 잘 오지 않는 날 메리는 항상 샐리의 곁을 지켰고, 그럴 때마다 자장가를 불러주곤 했다. 샐리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사람들이 즐겨보는 공연에 나오는 가수들보다도 감정이 담겨있는 감미로운 목소리의 메리의 노래가 최고라는 생각을 항상 했다.
“아깐 괜찮다더니.”
혼잣말로 투덜대던 것도 잠시 메리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노래를 시작했고, 귓가를 조용히 뒤덮는 감미로운 노랫소리에 샐리는 종아리의 통증도 망각하고 금세 잠이 들었다.
***
“콕콕콕.”
무언가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곤히 잘 자던 샐리는 이내 잠에서 깨어나 부스스한 눈을 창문 쪽으로 향하였다. 그리고 그녀의 눈길이 닿은 창문에는 새하얀 깃털을 덮고 있는 새가 창틀에 앉아 부리로 유리창을 두드리고 있었다.
처음에는 무슨 바람이 불어서 새가 저런 기행을 펼치나 했지만, 이내 샐리의 눈에 새의 다리에 묶여있는 종이가 들어왔다.
‘그 사람이구나.’
이런 식으로 본인에게 연락할 인물은 단 한 명밖에 없었다.
헨리 크리스토퍼 경.
하루의 유예기간을 칼같이 지키며 이른 아침이 되자마자 샐리에게 제안에 대한 결정을 답신으로 보내온 것이었다. 샐리는 이토록 이른 아침에 연락을 해 온 것이 부지런한 기사인 그답다는 생각을 하며 창문을 열었다.
그러자 새는 샐리가 차 마시는 시간이나 식사를 할 때 사용하는 테이블로 날아가 단춧구멍 같은 까만 눈동자로 샐리를 바라보며 지저귀었다.
“지금 줄 것이 없어 미안하구나.”
자신의 종아리에 감긴 붕대를 보아하니 메리가 밤새 자신의 곁을 지키다 새벽에 몰래 약을 가져와 발라준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지금쯤이면 자신의 아침식사를 가져오기 위해 주방에서 고군분투 중일 터이니 지금 당장 이 새에게 줄 먹이나 물이 없었다.
“짹, 짹짹.”
마치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 듯 새는 샐리의 말이 끝나자마자 지저귀며 자신을 쓰다듬는 샐리의 손길을 피하지 않았다. 확실히 사람 손을 탄 새인지 겁도 없고 얌전한 것이 참 귀여웠다.
“오늘?”
답신에는 제안에 대한 결정이 아닌 오늘 직접 저택에 방문하여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는 내용이 적혀있었다.
‘그냥 답신으로 끝낼 줄 알았는데.’
시간 낭비를 싫어한다고 바로 앞에서 못 박은 이가 굳이 직접 방문한다니 샐리의 입장에서는 놀라웠다. 하지만 그의 성격상 단순한 계약을 넘어서 결혼까지 해야 하는 중대한 문제가 겹겹이 겹쳐있으니 직접 방문하여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이해는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