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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의 꽃-3화 (3/111)
  • #3

    충격의 연속이었다. 공작이 하도 애지중지한다는 소문과 함께 공식 석상에 모습을 보이지 않는 공녀. 그 이유가 혹시 몸이 안 좋아서는 아닐까 혼자 유추해 본 적은 있었다. 그런데 다른 것도 아닌 샐리 본인을 마치 물건처럼 취급하는 듯한 말에 헨리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

    물론 샐리 스스로 본인을 물건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닌 그녀의 처지나 공작이 가지고 있던 생각이었지만, 오히려 덤덤하게 그런 처지를 말했던 것이 더 효과가 있어 보였다.

    동정심 같은 걸 끌어다 쓰려는 계획은 아니었지만, 갑자기 숙연해진 분위기에 샐리는 좀 더 불을 붙여볼 심상으로 스테판 공작가에 대한 이야기를 아주 약간 풀었다.

    “그러니까 저랑 결혼해요.”

    돌고 돌아 결국 결혼이었다. 애초에 이 거래의 성사 조건이자 초석이니 당연했지만, 이전까지 덤덤했던 태도와는 달리 상체를 앞으로 살짝 숙이며 생기가 돋은 그녀의 눈을 마주하자 헨리는 일순간 쿵쾅대는 심장에 호흡을 가다듬었다.

    “결혼은 사랑하는 사람과 하는 겁니다.”

    “그렇지 않다는 거 잘 아시잖아요.”

    누구보다 헨리가 잘 알았다. 자신의 어머니도 집안의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팔린 신세였으니까. 그러나 백작의 방탕한 생활로 가문이 풍비박산 났고, 방계 혈통의 황실의 피는 있느니만 못했다.

    “생각보다 낭만이 있으시네요. 하지만 낭만이 밥 먹여주지 않잖아요.”

    “공작가의 영애의 입에서 나올 말은 아닙니다만”

    “그냥 그런 말이 있다는 거죠.”

    처음 결혼하자는 말을 꺼냈을 때부터 헨리는 샐리를 보며 귀족가의 영애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샐리는 항상 조심스럽고 가면을 쓰기 바쁜 일반적인 영애들과 분명히 달랐다. 뭔가 자신의 처지를 객관화 하면서도 주눅이 들기보다는 어떻게든 더 나은 상황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헨리는 언제나 그런 부류의 사람에게 호감을 느꼈다.

    “자세한 내막은 지금 당장 묻지 않겠습니다. 저는 정치적 힘이 필요하고 영애께서는 작위가 필요하다는 이해관계가 일치하니까요. 근데 아직 궁금한 점이 하나 있는데.”

    “뭔데요?”

    “왜 하필 나입니까.”

    “그야 크리스토퍼 경이니까요.”

    그에 대한 이야기라면 이미 알고 있었다. 굳이 알아보려 하지 않아도 샐리는 이곳에 오기 전 메리로부터 헨리에 대한 이야기를 계속 들어야 했다. 간단히 말해 헨리 크리스토퍼는 고결한 존재라는 것이었다.

    제국을 위하는 최고의 기사이자 사람들의 선망 대상이었다. 평소 가난하고 어려운 이들에 대한 선행도 꾸준히 해왔으며, 평소 행실에 대한 평판도 참으로 좋았다. 샐리 역시도 그에 대한 거라면 따로 알아보기는 했지만, 메리가 누군가의 칭찬을 그렇게 늘어놓는 것은 처음 봤다.

    “평판도 좋고, 제국 최고의 기사이시면서 오늘 직접 뵈니 외모도 훌륭하시네요.”

    “크흠.”

    이토록 감정이 드러난 모습은 처음이었다. 당황하니 까무잡잡한 피부의 그의 귀가 붉게 타올랐다.

    “무엇보다 이런 식으로 이해관계가 일치하잖아요. 어때요?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세요?”

    이보다 더 좋은 조건을 가진 신붓감이 어디 있겠냐는 말투였다. 헨리 역시도 동의하는 바였다. 사랑이 없는 결혼에서 이보다 더 좋은 조건은 있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의 신중한 성격상 하루 정도의 유예를 갖고 샐리에 대해 알아볼 수 있는 건 어떻게든 알아보며 생각을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하루 정도만 시간을 줄 수 있겠습니까.”

    “좋아요. 저도 시간을 준다면 하루 정도로만 생각하고 있었으니까요. 크리스토퍼 경처럼 시간이 낭비되는 걸 좋아하지 않거든요.”

    “내일 편지를 보내도록 하죠.”

    그렇게 말한 헨리는 먼저 자리에서 일어선 뒤 샐리를 향해 가볍게 묵례를 하고 가게를 나갔다.

    ***

    “메리, 왜 나와 있어.”

    “저, 그게….”

    저택 앞에서 안절부절못한 채 자신을 바라보는 메리의 불안한 눈빛에 샐리는 그 이유를 단번에 알아챘다.

    아담 스테판.

    현 스테판 공작가의 공작부인으로 남편의 사고 소식이 들려오자마자 부리나케 집을 나섰다가 늦은 오후인 지금 집에 들어온 것이었다. 그리고 메리가 이토록 불안해하는 이유는 굳이 저택 안을 확인하지 않더라도 뻔했다.

    “조금 이따 들어가세요.”

    공작부인은 예전부터 종종 샐리에게 이런저런 일로 화풀이하곤 했다. 어차피 저택 밖을 외출할 일도 없고, 저택 안이야 본인의 세상이니 어떤 짓을 저질러도 모든 것이 묵인됐다. 특히나 오늘처럼 사건 사고가 터진 날에는 특히 예민해져 폭력도 서슴지 않고 휘둘렀다.

    그리고 그 증거가 벌겋게 부어올라 있는 메리의 뺨에 남아있었다.

    “메리….”

    샐리는 위로의 말보다 부어오른 메리의 뺨을 조심스럽게 어루만졌다. 멍까지 든 것을 보아하니 보통 한두 대 때린 것이 아니었다.

    “아프지 않아?”

    “전 괜찮아요. 그보다 아직 가라앉지 않으셔서 지금은 마주치시지 않는 게 좋아요.”

    “이럴 때도 너는 내 걱정이 우선이구나.”

    샐리 스테판은 눈물이 많은 사람이 아니었다. 평생에 울 것을 어릴 때 다 울었기 때문에 메마른 지 오래였다. 그러나 오늘 메마른 그녀의 눈가가 오랜만에 촉촉해졌다.

    “지금은 나보다 네가 우선이야.”

    그렇게 말한 샐리는 메리의 손을 잡고 주방 건물로 향했다.

    ***

    “아가씨? 아니, 주방에는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샐리를 공녀로서 인정하는 사용인은 저택에서 단 한 명도 없었다. 더군다나 혹시라도 샐리에게 아가씨라는 호칭을 사용하면 공작부인의 불호령이 떨어졌기에 모두가 조심하는 추세였다. 더군다나 오늘처럼 공작부인의 신경이 날카로운 날에는 특히 더 조심해야 했다.

    “얼음을 가져오도록 해, 주방장.”

    “얼음이요? 얼음은 갑자기 왜 필요하십니까?”

    “잔말 말고 얼른 가져와.”

    “이유를 알아야 가져다드릴 수 있습니다.”

    샐리의 날카로운 어조에 조금 움찔하기는 했지만, 이내 주방장은 콧방귀를 뀌며 구체적인 이유를 제시하라 요구했다. 애초에 주방장이 공녀에게 할 수 있는 행동이 아니었지만, 지금은 그런 사사로운 이유로 말싸움을 하는 것보다 빨리 메리의 뺨에 얼음찜질이 필요했다.

    “메리에게 얼음찜질이 필요해서 그래. 이유를 말했으니까 빨리 가져와.”

    “안 됩니다.”

    “뭐?”

    명령이 아닌 부탁에 가까웠다. 굉장히 무례한 행동이었지만, 샐리는 자존심을 굽히고 참고 넘어가려 했다.

    “그깟 하녀 따위를 위해서 귀한 얼음을 사용한다니요. 절대 안 됩니다.”

    뚜둑.

    이성의 끈이 끊기는 소리와 함께 샐리는 있는 힘껏 자신의 손바닥으로 통통하게 올라 있는 주방장의 뺨을 세차게 후려갈겼다.

    “크악!”

    찰진 소리가 주방에 울려 퍼지면서 안에 있던 모든 이의 시선이 주방장과 샐리에게로 향했다. 처음부터 두 사람의 실랑이를 지켜보던 이들뿐만 아니라 애써 무시하고 본인의 일에 치중하던 이들까지도 찰진 소리와 함께 중심을 잃은 채 쓰러질 뻔한 주방장의 모습을 목격했다.

    몸의 힘 전부를 이용하여 이를 악물고 쳐서인지 주방장은 아직도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채 테이블을 더듬으며 겨우 중심을 잡았다.

    “너.”

    “네, 네!”

    처음부터 두 사람의 실랑이를 지켜보던 말단이 샐리의 지목을 받자마자 군기가 바짝 서 있는 상태로 대답했다.

    “당장 얼음 가져와.”

    “네, 아가씨.”

    방금 봤던 샐리의 맹렬한 기세에 말단 요리사는 황급히 냉장고로 향했다. 기술이 발달한 제국인 만큼 공작가 정도 되는 부유한 집안이라면 성능 좋은 냉장고가 있는 게 당연했다. 요리사는 황급히 냉장고에서 얼음을 꺼내 타월에 싸서 샐리에게 건넸다.

    그리고 얼음을 건네받은 샐리는 그대로 메리와 함께 주방을 나섰고, 뺨을 맞은 주방장은 얼얼한 자기 뺨을 부여잡은 채 멍하게 사라지는 샐리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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