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 사람의 꽃-2화 (2/111)
  • #2

    “그 일 때문인 건가.”

    “하녀 말로는 스테판 공녀의 편지를 전하려고 왔다는데.”

    “편지?”

    이윽고 들어온 하녀에게서 편지를 전해 받은 뒤 곧바로 편지를 본 헨리는 헛웃음을 쳤다.

    “뭔데 그렇게 웃어.”

    “생각지도 못한 내용이라.”

    편지를 뜯어보기 전 대충 자신의 아버지인 스테판 공작의 죽음과 관련한 내용이라 예상했다. 하지만 헨리의 예상은 절반만 맞춘 모양이었다. 처음 시작은 공작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였지만, 그 뒤의 내용은 무뚝뚝하기로 소문난 헨리에게서 웃음을 훔쳤다.

    “스테판 공녀에 대해 아는 게 있나.”

    “음, 공작이 애지중지한다는 이야기를 듣기는 했는데, 난 잘 모르겠어.”

    “잘 모르겠다?”

    평소 이런 보고사항에 있어서 사적인 감정을 넣지 않는 야닉이었다. 그런데 그런 그가 개인적인 견해를 넣었으니 헨리는 의문이 들었다.

    “어디에서 의문을 느낀 거지, 야닉.”

    “그, 왜 있잖아. 귀족 아가씨들이 하는 파티.”

    “데뷔탕트?”

    “맞아, 그거. 부하들 이야기로는 스테판 공녀는 그런 공식적인 행사에 참여한 적이 없다고 했어.”

    “네가 그런 이야기에 흥미를 갖고 있을 줄 몰랐는데.”

    “참, 단장도 사람은 외모가 전부가 아니야.”

    우락부락한 몸집으로 자신의 세심한 성격에 대해 토로하는 야닉을 뒤로하고 헨리는 스테판 공녀에 대한 생각에 잠겼다.

    ‘애지중지하던 딸이라더니.’

    그렇게 소중한 딸이면 데뷔탕트를 그 어떤 귀족가의 여식보다도 화려하게 해줄 터였다. 그런데 데뷔탕트는 커녕 공식적인 행사에 얼굴을 비춘 적이 없다니. 오히려 그 딸을 애지중지한다기보다는 홀대한다고 보는 시선이 맞는 것 같았다.

    “오후 훈련은 야닉 네가 맡아서 하도록 해.”

    “단장은?”

    “방금 약속이 생겨서 말이야.”

    흥미롭다는 듯이 웃음기를 머금고 있는 헨리를 보는 야닉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무래도 오늘의 단장은 어딘가 이상했다. 마치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았다.

    ***

    “오셨군요.”

    단정하게 차려입은 샐리는 먼저 자리 잡은 채 헨리를 맞이했다. 무슨 사정인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신경을 써야 했으므로 편지를 전달하고 돌아온 메리에게서 화장부터 옷까지 꼼꼼하게 체크를 받고 나왔다.

    푸른 자수정과도 같은 그녀의 눈동자와 어울리는 보랏빛의 단아한 드레스였다. 레이스와 같은 장식은 거추장스러워 싫어하는 샐리였기에 화려함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러나 옷이야 어쨌든 샐리의 외모로부터 발산되는 후광이 모든 것을 해결해주었다. 실내의 조명을 받아 더 화사해진 낯빛과 더불어 청순하게 뻗어있는 갈색 생머리도, 케이크 위에 얹어져 있는 딸기가 연상되는 붉은 입술도 단아한 드레스 코드와는 반대로 화려한 느낌을 주었다.

    “공녀께서 내가 필요한 이유가 뭡니까.”

    앉기도 전에 본론부터 꺼내는 것이 꽤 급한 성격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어쩌면 기사인 그에게 있어 꼭 알맞은 태도 같기도 했다.

    앉는 동작부터 시작해서 어깨와 허리가 곧게 펴져 있는 것이 눈앞에 사람이 앉아있는 것인지 석상이 놓여 있는 것인지 헷갈릴 정도로 정돈된 자세였다.

    “성격이 급하시네요.”

    “쓸데없는 시간 낭비를 하고 싶지 않을 뿐입니다.”

    정돈된 자세답게 깔끔한 말투였다. 듣기에 무뚝뚝해 보일 수 있지만, 샐리는 오히려 에둘러 말하는 화법보다 이런 직설적인 화법을 더 선호했다.

    “왜 그렇게 웃습니까.”

    귀족 화법에 익숙하지는 않지만, 기사답게 헨리는 감이 좋았다. 눈앞에 있는 여자의 미소는 가짜가 아니었다. 오히려 마음에 든다는 듯 자신을 훑고 지나가는 시선에 헨리 본인이 오히려 움찔했다.

    “서로 잘 맞을 것 같아서요.”

    “우리가 잘 맞는 건 대화에 중요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중요해요.”

    “그래서 거래 내용이 뭔지나 말하시죠.”

    헨리는 쓸데없는 시간 낭비가 싫다고 말했던 만큼 사족을 바로 잘라냈다. 무엇보다 자신과 기사단의 처지를 바꿀 방법이 있다는 편지 내용과 그것을 토대로 거래를 하자는 이야기까지 스테판 가의 공녀가 할 이야기는 아니었다.

    어째서 제국에서 상당한 권력을 지닌 스테판 가의 공녀가 별다른 힘이 없는 기사단장인 본인에게 거래를 요청한 것일까.

    이에 대한 호기심과 더불어 혹시나 이상한 제안을 할 시 그에 대한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할 계획이었다.

    현재 제국이 대륙 최강의 국가로 자리를 잡고 있지만, 절대 주변국에 우호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지 않았다. 오히려 현 황제는 전 대륙을 통일하고자 하는 야망을 드러내며 주변국에 적대적인 정책을 펼치려 들었고, 그 황제를 지지하는 세력의 중심축 중 하나가 바로 스테판 가였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희생을 강요당하는 것이 헨리 본인과 본인이 이끄는 기사단이었다. 멸망한 왕국의 잔존세력과 야만족의 토벌을 명목으로 항상 크고 작은 전투에 있어서 선두에 서야 했는데, 전투를 치르는데 있어서 불가피한 희생에 비교하면 돌아오는 것이 너무도 적었다.

    실제로 현재 기사단의 많은 이들이 현 황제와 함께 1 황자에게 적개심을 품고 있었다.

    실제로 지금 헨리에게 있어서 이 상황을 해결할 정치적인 힘이 없었고, 그에 대한 무력감으로 어떻게든 해결책을 찾아보려 했지만, 여전히 답은 보이지 않는 상황이었다.

    “저와 결혼해주세요.”

    “뭐?”

    지금도 자신이 아끼는 부하들 생각에 복잡한 심경으로 이 자리에 나온 것이었다. 편지 내용이 터무니없이 느껴졌지만, 지금까지 베일에 싸여있던 스테판 공녀의 등장이었으니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그녀의 장단에 한 번 맞춰줄 생각이었다.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겁니까, 공녀.”

    샐리는 순식간에 일그러지는 헨리의 얼굴을 보고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런 반응을 예상했다는 듯 찬찬히 입을 열었다.

    “지금 크리스토퍼 경께 스테판 가의 공녀인 제가 프러포즈하는 겁니다.”

    이제는 기분 나쁘다는 듯 구겨졌던 인상에 분노가 더해졌다. 특히나 순식간에 타오르기 시작한 황금빛 눈동자가 당장이라도 샐리를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기 시작했다.

    “장난치는 겁니까.”

    “최근 제국에 새로운 법이 생겼어요. 여자도 작위를 받을 수 있는 법이요.”

    그 말에 헨리의 맹렬하던 기세가 한풀 꺾였다. 원로 귀족들의 반대에도 최근 황제가 자신이 아끼는 정부를 위해 만든 법으로 신진 귀족 세력의 지지에 힘입어 끝내 제정된 법이었다.

    “그 법에 따르면 여성이 작위를 받기 위해서 결혼을 해야 한다고 나와 있죠.”

    말 그대로 작위를 받은 여성 대신에 가주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남편이 있어야 한다는 특이한 조건의 법이었다. 즉, 부부 동반으로 가주의 권한과 작위를 받게 되는 것으로 부부가 될 사이인 두 사람 모두가 동의해야 했다.

    “그러니까 저랑 결혼해요. 제가 경의 정치적인 힘이 되어드릴게요.”

    헨리에게 있어서 절실히 필요한 것이었다. 더는 자신과 부하들만 변방에서 고생하는 일이 없었으면 하는 바람. 눈앞의 여자는 자신이 원하는 바를 이루어줄 수 있다며 거래를 제시하는 것이었다.

    “그걸 통해 공녀께서 얻는 것은 뭡니까.”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이었다.

    굳이 공녀에게 작위가 필요한 이유가 무엇일까.

    곰곰이 생각하던 헨리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 것은 야닉이 말했던 공녀의 소문에 대해 느꼈다던 위화감이었다.

    “홀로 설 힘이 필요해요.”

    “홀로 설 힘?”

    “왜냐하면 전 첩의 자식이거든요.”

    이윽고 나온 덤덤한 말투의 문장에 헨리는 깜짝 놀라 샐리를 쳐다봤다.

    “그런 이야기를 함부로 해도 되는 겁니까.”

    베일 쌓여있던 공녀의 정체가 사실은 첩의 자식이었다니. 이 사실을 처음 알게 된 헨리는 상당히 큰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또한 그녀의 소문에서 느낄 수 있었던 위화감의 정체에 대해 알게 되어 한편으론 시원스럽기도 했다.

    “그래서 공식 석상에 얼굴을 한 번도 비춘 적이 없는 겁니까.”

    “혹시라도 때가 묻으면 나중에 요긴하게 쓸 수가 없잖아요.”

    “요긴하게 쓰다니.”

    “괜찮은 혼처가 있으면 바로 보내버리는 거요.”

    “그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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