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8 메리지 블루 (28/28)
  • 28 메리지 블루

    처음 한 그 일의 맛은,

    어쩐지 발끝부터 시작되어 온몸이 감전되는 듯 짜릿짜릿하기도 하고 불이 붙는 것 같기도 하고 녹아버리는 것 같기도 하고 아프기도 하고 좋기도 하고 이게 뭔지 잘 모르겠어서 더 해보고 싶기도 하고 아무튼 도무지 알 수 없던, 그런 맛.

    그리고 정말 나중엔 너무너무 좋아져서, 내가 이제껏 이 맛을 왜 몰랐나, 어쩌면 이렇게 좋을 수가 있나, 세상에 이것보다 좋은 게 있나, 오빠도 이만큼 좋은 게 맞나, 싶었던 그런 맛.

    “포도야.”

    그 맛의 끝에 오빠가 말했습니다.

    “이번 추석 즈음에 고향에 같이 인사드리러 가자.”

    우리 결혼하자고.

    “나 데릴사위 들인다고 생각해.”

    그러니까 그건 그런 뜻이었습니다.

    “내가 너한테도 너희 집한테도 잘할게.”

    몇 번이나 이런 말을 흘린 적은 있었지만. 추석날 새벽에 오빠가 우리 집 앞에 와서 두 손으로 내 한 손을 쓰다듬으며 한 말에 나는 정말 놀랐습니다. 오빠의 얼굴은 정말로 새빨개져 있었어요.

    “누나 결혼하면 내년에 결혼해서 나랑 살자.”

    그때가 우리 사귄 지 8개월.

    그런데 나는 말은 안 했어도 좀 당황스러웠습니다.

    우리가 오랫동안 알기는 했지만 사귄 지는 일 년도 안 되었잖아요.

    ‘인륜지대사인데 이렇게 번갯불에 콩 볶아 먹듯 해도 되나?’

    이 사람이 내 남편 될 사람이라고? 나는 갑자기 두려움에 휩싸였습니다.

    그런데 그 두려움이 사랑의 부족함에서 기인한 건 아니었어요. 나는 정말로 오빠를 사랑했으니까요.

    ‘오빠가 좋아.’

    정말로요. 아니 정말 좋아요. 나는 점점 더 오빠를 좋아해서 이젠 무서울 지경이었습니다. 진심으로 나도 오빠와 결혼하고 싶었어요. 평생 같이 살자고 약속하고 싶었어요. 그런데……

    이걸 메리지 블루라고 해야 할까. 아니 그냥 내 오랜 불안감이라고 해야 할까. 나는 결혼 직전에 사람들이 자주 느낀다는 그 이상한 우울감을 느꼈습니다.

    ‘그런데 오빠가 정말로 나만큼 나를 좋아하는 걸까? 내가 오빠를 사랑하는 것만큼?’

    내가 그때 느꼈던 건 그런 종류의 불안감이었습니다.

    * * *

    나는 매번 사랑에게서 고배를 마셨습니다. 이번엔 맞겠지? 하고 마셔봤지만 늘 꽝이었고 쓴잔이었어요. 게다가 오빠는 정말 좋은 사람이고 나를 좋아하기는 했지만…… 그 과정이라는 게 결과적으로는 이랬습니다.

    ‘생각해보면 고백도 내가 했고.’

    심지어……

    ‘그거 하자고도 내가 했어. 내가.’

    그랬던 것입니다.

    결혼이란 건, 정말 나를 나보다 더 좋아하는 사람이랑 해야 한다는데. 이게 맞는 결정인 걸까요?

    오빠도 오래전부터 나를 좋아했다고는 하지만, 정말인 걸까요? 혹시 나 듣기 좋으라고 한 입바른 말은 아닌 걸까요?

    ‘난 왜 이렇게 사랑을 할수록 의심이 많아지는 걸까?’

    나는 사랑이 이루어졌는데도 어쩐지 짝사랑을 하는 것 같았습니다.

    ‘오빠는 나한테 잘해주는데 왜 이렇게 불안해지는 걸까?’

    그냥 진짜 뭐랄까 내 마음이 나도 모르게 휘청거리고 그랬어요. 오빠는 안 불안해 보이는데…… 사랑을 하나 하지 않나 늘 똑같아 보였는데 말이에요.

    ‘오빠는 그래 보이지 않는데.’

    물론 오빠는 늘 내게 사랑한다 말해주고 행동으로도 많이 표현해 주었지만 그것으로 내 뻥 뚫린 마음이 채워지는 건 아니었어요. 그건 그냥 내 근본적인 불안감이었으니까요.

    ‘역시 내가 더 좋아하나봐.’

    나만 이 사랑에 안달복달하는 걸까?

    ‘그런가봐. 난 벌써 이렇게 좋아하는데 오빠의 마음이 식으면 어떻게 하지?’

    일어나지도 않은 일인데 나는 이 행복함 앞에서 불안해져 버린 것입니다. 상상해보니 지금껏 경험했던 모든 상처보다 더 아플 것 같았습니다. 상상한 것만으로도 마음이 아리고 막 눈물이 났어요.

    예전에 오빠가 아무한테나 오지랖 넓고 상냥해서 같이 사는 사람은 많이 불안하겠다고, 그런 생각을 했잖아. 정말로 그러면 어쩌지? 오빠는 잘생기고 대단한 사람이니까, 오빠의 상냥함에 넘어간 예쁜 여자가 오빠를 차지하려고 덤벼들면, 그리고 오빠가 거기에 넘어가 버리면, 나는…… 나는 어쩌면 좋지? 내가 그때 뭘 어떻게 할 수 있을까?

    그러는 새 시간이 흐르고 흘러 결혼식이 가까워져 왔습니다. 아, 제 결혼식이냐고요? 아니요.

    “저희 결혼식 부케를 받아주었으면 좋겠는데요.”

    “그래, 친구들은 다 시집갔고 우리 직원들 중에서도 결혼할 사람이 없어서 말이지. 너 결혼하잖니?”

    도라 언니네 결혼식 말입니다. 어느 날 식사를 하자며 불려나간 자리에서 도라 언니네 커플은 내게 짜잔 하고 청첩장을 꺼내 내밀었습니다.

    나는 그게 내 청첩장도 아닌데 어쩐지 덜컹, 했습니다.

    덜컹.

    가슴이 그냥 내려앉는 것만 같았어요. 아니! 절대로! 지금은 동원 씨에게 전혀 마음이 없는데 말이에요! 아! 이게 현실이구나! 이렇게 어어 하고 있다간 나도 이렇게 청첩장을 찍고 부케를 받아 달라 누군가에게 부탁하겠구나 하고 말이에요!

    * * *

    “그런데 네가 우리 도하와 결혼해 줄 준 몰랐지. 지금 와 생각해보니까 도하가 어릴 때부터 널 좀 귀찮게 했니? 아무튼 우리 동생 받아줘서 고맙다. 네가 사람 하나 살렸어. 포도야. 이건 내 명함인데 도하가 속 썩이면 언니한테 여기로 전화해라. 그 새끼가 너 괴롭히면 내가 아주 뼈를…….”

    부케를 받아주기로 하자 언니는 가슴을 쓸어내리듯이 하며 말했습니다. 나는 그런 언니에게 묻고 싶었어요. 아니 둘 다에게 묻고 싶었습니다.

    ‘언니, 언니는 막 이 결혼에 확신이 들고 그래요? 평생 서로를 사랑해줄 수 있을 것 같고 사랑받을 수 있을 것 같고 그래요?’

    그런데 이제 곧 제 시누이가 될 도라 언니에게 이런 걸 물어볼 수는 없었습니다. 오빠 친구인 동원 씨에게도 마찬가지였어요. 그때였습니다. 언니의 휴대전화에서 진동음이 울렸습니다. 언니는 전화를 받고 업무상 이야기인 듯한 말을 몇 마디 나누더니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미안. 먼저 자리에서 일어날게. 동원 씨 저기 우리 포도랑 밥 좀 같이 먹어줘? 알겠지?”

    그리고 덜렁 우리 둘만 이 레스토랑에 남아 버렸습니다.

    단둘.

    이 어색함.

    “…….”

    “…….”

    동원 씨는 예전에 잠깐 내가 동원 씨를 좋아했다는 걸 모르겠지만 나는 이 자리가 숨 막히도록 어색해서 정신이 몽롱할 지경이었습니다. 땀이 삐질삐질 흘렀어요. 그러거나 말거나 동원 씨는 자신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으로 웃더니 휴대전화로 누군가에게 문자를 보냈습니다.

    “포도 씨, 있잖아요?”

    “예? 예?!”

    그리곤 갑자기 내게 말을 거는 것이었습니다.

    “이걸 어떻게 말해야 할까…… 저 일이 이렇게 되었고 하니 말하는 거긴 한데, 오해하지 말고 들어주었으면 좋겠어요.”

    “예?”

    아니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일까, 순간 찔릴 것이 아주 많은 나는 아주 심장이 졸아붙었습니다.

    “우리 회사 사람들 작년 몇 달 정말 모두 조마조마했습니다.”

    동원 씨가 말했습니다.

    “네?”

    “포도 씨가 우리 대표님 찰까 봐서요.”

    “네?”

    내가 말했습니다.

    “네?”

    나는 순간 머릿속에 흘러든 말의 의미를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내가 지금 뭔가 잘못 들었나? 그런가?’

    * * *

    “솔직히 말해서, 감기와 가난과 짝사랑은 숨길 수가 없다 하잖아요?”

    동원 씨는 재미 교포마냥 오랜 유학생활을 했다는데 왜 이렇게 예문을 꺼내드는 어휘력이 원어민보다 매끄러운지 나는 잘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광고 프레젠테이션 때문인 걸까요?

    “게다가 포도 씨는 몰랐겠지만, 우리 대표가 짝사랑하는 걸 좀 티를 냈어야 말이죠.”

    동원 씨는 거기까지 말을 꺼내고는 쿡쿡 웃어버렸습니다.

    “아니 사실 포도 씨도 알았죠?”

    음? 뭐를요?

    * * *

    “그걸 모를 수가 없죠. 갑자기 알바생이라고 들어와서 우리 직원들 모두가 처음엔 일 바빠서 뽑았나 했는데.”

    “…….”

    “대표가 되어 가지고 알바생을 야근할 때마다 늦게까지 기다렸다 차로 데려다줘. 저녁 사줘. 외근 갔다가도 음식 사들고 다시 회사로 복귀해. 마음이 없으면 누가 그래요? 게다가 내가 아는데 강 대표 정은 많아도 여자한테는 소문 안 나게 칼같이 상대하는 놈이에요.”

    “…….”

    “또 몇 달 안 되어서는 백화점에서 같이 쇼핑하고 있는 모습이 발견돼. 아, 이건 제가 본 게 아니고 재무1팀 이 대리가 봤대요. 아. 감사합니다. 봉골레 파스타는 여기.”

    탁.

    동원 씨가 말을 하는 새 음식들이 나왔습니다.

    “또 회사 근처 공원에서 도시락 먹으며 데이트해. 이건 영업팀 강 주임이 봤고.”

    “…….”

    “포도 씨 그만둔 달부터는 전 재산 잃은 것처럼 다니더니 병가까지 내고 아예 앓아누워. 아, 맞다. 포도 씨 퇴사하고 나서 강도하 앓아누운 거 알았어요?”

    그 말에 나는 얼굴이 다 빨개졌습니다.

    “언제부턴가는 창업 멤버인 저한테까지 속을 끓이고 질투하더라니까요? 어이가 없어서 참.”

    네가 날 좋아하지 않았던 저 먼 옛날부터 널 좋아했다고, 네가 날 봐줄 때만 기다리고 있었다고 오빠가 말은 했었지만, 남의 입으로 들으니 너무도 구체적이고 생생하게 그 일련의 사건들이 내게 다가왔습니다.

    ‘나는 그게 다 그냥 오지랖이 넓어서인 줄로만…… 왜냐하면 나 고등학생 때도 그랬으니까…… 아, 그렇다면 나 고등학생 때도 그……’

    나는 순간 얼굴이 다 빨개졌습니다. 갑자기 다른 의미가 되어 쏟아져 들어오는 기억들.

    ―나 너 짝사랑한 게 이제 거의 십 년이다. 십 년.

    그게 입바른 말이 아니라 진짜였구나.

    “그래서 워크숍 때 포도 씨 간다 그랬을 때 강 대표 힘내라고 직원들이 얼마나 간을 졸였는지. 무슨 드라마 보는 것 같았대요. 진짜.”

    “…….”

    “아, 먹어요. 먹어.”

    나는 귀까지 다 익어서 부끄러움에 고개를 들 수 없었습니다.

    * * *

    밥이 입에 들어가는지 코에 들어가는지, 식사를 다 마치고 나왔는데 어디선가 오빠가 툭 하고 튀어나왔습니다.

    “포도야!”

    “악!”

    깜짝이야! 여기 있으면 안 될 사람이 있는 광경에 나는 놀라서 외쳤습니다.

    “여긴 무슨 일이야, 오빠.”

    “어, 동원이가 문자해서. 지금 너랑 같이 있다고. 헉. 허억. 헉. 허……. 허어.”

    백 미터 달리기를 한 듯 오빠가 양 무릎에 두 손을 짚고 숨을 뿜어냈습니다. 그러더니 나와 동원 씨를 번갈아 바라보며 말했습니다.

    “너네 무슨 일로 같이 밥을 먹었어!”

    “아. 응. 도라 언니 부케 내가 받기로 해가지고. 언니가 시간 괜찮으면 밥 먹자고 오늘 아침에 나한테 전화했었어.”

    “아. 어? 누나도 같이 만났어?”

    “응응. 근데 바빠서 식사는 다 못하시고 가셨는데. 오빠는 여기 왜 왔어?”

    “…….”

    오빠는 아무 말이 없더니, 갑자기 분노한 얼굴로 동원 씨를 노려보았습니다.

    “너 이 새끼…….”

    잡아 죽일 것 같은 얼굴이었어요.

    “뭐? 내가 거짓말했어?”

    동원 씨는 적반하장이 유분수네라는 표정으로 오빠를 바라보다 나를 바라보곤 생긋 웃었습니다.

    “그럼 부케 잘 부탁해요?”

    그게, 그냥 웃음이었는데 이상하게 내 생각으로는,

    힘내라는 뜻 같았습니다.

    * * *

    오빠가 기왕 이렇게 된 거 집까지 태워준다고 했습니다. 조수석에 탄 나는 안전벨트를 매다 말고 툭 하고 던지듯이 오빠에게 말했습니다.

    “오빠, 나 진짜 좋아하나봐.”

    “그걸 이제 알았어?”

    오빠가 뭐 그런 말을 하냐는 듯 말했습니다.

    “아니, 나 말고 오빠가 나를 진짜 좋아한다고.”

    “응? 그러니까 그걸 이제야 알았느냐고.”

    오빠가 기어를 넣으며 왜 그리 당연한 말을 하냐는 듯 되물었어요. 나는 그런 오빠의 옆얼굴을 바라보았습니다.

    “나.”

    ‘나 오빠 되게 좋아하는구나.’

    그 얼굴이 새삼 너무 멋있어 보였습니다.

    ‘같이 살고 싶을 정도로 사랑하는구나.’

    평생 사랑할 수 있을 만큼요.

    나는 사실 바로 그날 그 순간 결심했습니다. 이 사람이랑 정말, 결혼하기로요.

    메리지 블루.

    결혼에 대한 내 푸른 불안감은 오빠의 피식거리는 웃음에 햇볕을 쬔 눈처럼 녹아내려갔습니다.

    “오빠.”

    “응?”

    “나 오빠랑 빨리 결혼하고 싶다.”

    “어?”

    순식간에 사라져 갔어요.

    * * *

    그 다음 달.

    야외에서 이루어진 결혼식은 심플하고도 아주 아름다웠어요. 풍성한 흰 꽃부케를 든 언니는 정말 아름다웠어요. 나도 얼른 웨딩드레스를 입고 결혼식을 올렸으면 좋겠다, 그런 생각을 할 만큼요.

    사랑에 빠진 선남선녀가 얼굴을 붉히고 화촉을 올렸고, 나는 그 날 첫 번째 시도만에 성공적으로 부케를 받아들었습니다.

    * * *

    그리고 우린 그 다음 해에 결혼했어요.

    “오빠 우리 애기가 청포도가 먹고 싶다 하는데.”

    “사오겠습니다! 마님!”

    그리고 결혼한 지 오 년이 된 오늘 생각해보니 그 날의 결심은 참, 지금 생각해도 좋은 결정이었다 싶습니다. 짠!

    <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