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7 그것의 맛 (27/28)
  • 27 그것의 맛

    첫 키스는 구렁이 담 넘어가듯 사귄 첫날 끝내긴 했지만 도하는 포도와 마치 처음 만난 사람처럼 천천히 관계를 쌓아나갔다. 한 블록, 한 블록, 탑을 쌓아나가는 것처럼. 포도의 남자 친구 신분으로 천천히 다시 데이트부터 했다.

    ‘우리 포도는 어쩜 이리 예쁠까.’

    도하는 반짝반짝한 눈으로 포도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내 여자 친구라서 그런지 점점 더 귀여워지네. 정말 작게 만들어서 호주머니에 넣어 다니고 싶다니까. 그리고…….’

    흠칫!

    ‘헉!’

    난데없이 순간 든 음심(淫心)에 도하는 움찔했다. 순간 머릿속에 스쳐지나간 상상은 차마 생각으로도 구체화시키지 못할 상상이었다. 도하는 전류가 통한 것처럼 포도의 손에서 자신의 손을 떼었다. 포도가 도하를 올려다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왜?”

    “아.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도하는 얼굴을 붉히며 그녀의 시선을 피했다.

    하기야 이런 식으로 사 개월째였다. 심지어 짝사랑 기간까지 포함하면 7년 플러스 알파.

    ‘포도야.’

    다른 커플이라면 진도를 쭉쭉 빼고 있을 이 시기, 도하는 어쩐지 그간의 경험과 나이가 무색하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포도야. 너 내가 남자로서 좋은 거 맞니?’

    도하는 문득 포도에게 묻고 싶었다.

    ‘맞지? 그렇지?’

    물론 가끔은 입도 맞췄다. 홈시어터가 있는 자신의 집에서 영화를 볼 때 은근슬쩍 포도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깊숙이. 도하는 그때마다 포도를 찌부러뜨릴 듯이 꽉 끌어안고도 싶고 포도의 크진 않지만 모양 예쁘고 봉긋한 가슴에 손을 올리고도 싶고…… 사실 가슴도 어떻게 이렇게 저렇게 하고 싶고…… 이래저래 정말로 죽을 지경이었다. 그런데 마음과는 달리 몸은 브레이크가 걸린 듯 그 다음으로 진도를 나가지는 못했다.

    도하는 정말로 포도에게 밉보이고 싶지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그 다음을 하면…… 혹시나 날개옷도 빼앗지 않은 선녀 같은 이 애가 도망갈 것 같아서…….

    ―이 짐승! 어디에 손을 대는 거야! 오빠가 그런 사람일 줄 몰랐어!

    그럴 것만 같아서…….

    ―내가 생각하던 오빠가 아닌 것 같아!

    도하는 포도가 아직도 자신을 떠날까봐 무서웠던 것이다.

    그러나 끓어가는 사내의 이 마음! 도하는 점점 괴로워졌다.

    ‘아오!’

    애인이 있는데, 서로 그런? 나이에 애인이 있는데 나는 왜 그러질? 못하고……!

    도하는 음심이 들 때마다 밤에 샤워를 하며 애꿎은 타일 벽을 주먹으로 탕탕 쳤다.

    ‘아오오오오오오오!’

    도하 안의 짐승이 거칠게 울부짖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일이었다. 여느 날처럼 포도의 아파트 앞 주차장에서 포도를 기다리는데 저 밖에 포도가 나타났다.

    ‘음?’

    자신의 체형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은 새빨간 이브닝드레스를 입고 말이다. 치마는 무릎 두 뼘 위, 심지어 드레스는 중앙이 깊게 파여 가슴이 훤히 드러나기까지 했다.

    “오빠!”

    “크흡!”

    포도가 의기양양하게 탑승한 순간 도하는 웃음이 빵 터졌다.

    아니 예쁘고 귀엽긴 했다. 포도가 넝마를 입었던들 도하의 눈에 그녀가 안 예쁘고 안 귀엽겠는가. 그런데 그 드레스란 것은 도무지 날씨에 맞지 않게 어깨며 등이며 다리까지 훤히 드러나 보이는데다 포도와는 너무도 어울리지 않아 보여서 도하는 포도의 새로운 도전이 웃기기도 하고 또 추워 보이기도 하고 정말로 솔직히 말해서는…… 이게 조금 더 길기만 한 속옷인가 아닌가 싶었다.

    왜 이렇게 입었는지 영문을 알 수 없다. 진짜.

    ‘이게 무슨 벗은 거야? 입은 거야? 이게.’

    분명 어젯밤 통화로 오늘 바닷가에 가 조개구이를 먹기로 약속했는데 포도가 입은 옷은 마치 연예인들이 입는 시상식 드레스 같았던 것이다.

    ‘너 이거 입고 도대체 어디 갈 거니?’

    나중에 생각하면 그러면 안 됐는데 포도가 무안하게 마구 웃은 도하는 운전석에서 꾸물거려 무릎까지 오는 자신의 패딩을 벗어 포도에게 덮어주었다. 포도의 입술은 이미 자기 이름처럼 포도빛이었다.

    ‘얘가 이 겨울에 얼어 죽겠네. 정말.’

    포도가 눈치를 보듯 도하를 바라보았다.

    “왜……? 별로야?”

    “아니 예뻐. 예쁘지.”

    포도가 불신의 눈으로 도하를 바라보았다. 도하가 고개를 젓고는 말했다.

    “그런데 포도야. 그래도 이 옷은 아니야.”

    “나 집에 갈래.”

    “왜? 그런데 너 이 옷 도대체 어디서 샀니?”

    “집에 간다니까?”

    “아니 왜에?”

    실실 웃으며 도하는 말했다. 옷을 갈아입고 온다기에 도하는 손을 잡아 우선 막았다. 자기 겉옷 입고 다니면 되지 싶었다. 그렇지만…….

    “그런데 정말 이 옷 어디서 산 거야?”

    “…….”

    “누구한테 받은 거야?”

    포도를 놀리기는 했다. 울상이 된 포도의 모습이 귀엽기도 하고 웃기기도 하고 너무 재미있었다. 그리고 포도가 옷을 벗을라치면.

    “어허, 감기 걸려. 진짜.”

    필사적으로 막았다.

    아니 포도의 옷차림과 취향을 존중하지만…… 정말로 그건 아니었던 것이다.

    아마 포도라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남자친구가 이 한겨울에 런닝과 팬티만 입고 나왔다면 자신과 같은 반응이었을 것이다.

    “…….”

    하지만 실은 그렇게 놀리면 안 됐다는 걸 도하는 데이트 다음 날 알게 되었다.

    ‘음?’

    포도가 아침 모닝콜을 받지 않았다.

    뚜―

    ‘으음?’

    도하의 휴대전화에 울리는 것은 이제 수화음 소리뿐이었다.

    ‘얘가 어제 피곤해서 그런가?’

    [포도야 잘 잤어?]

    도하는 점심에 문자를 보냈다.

    [오빠 미워]

    곧장 답장이 왔다.

    “하, 너는 애가 왜 그렇게 여자 마음을 몰라?”

    그날 점심, 도하의 고민을 들은 동원이 피식하고 웃었다.

    “어딜 감히, 진짜 남자는 레이디 옷차림을 지적하는 게 아니야.”

    그 말을 들은 도하는 곧바로 휴대전화로 무엇인가를 검색해 동원의 코앞에 내밀었다.

    “넌 강도라가 이러고 겨울 강남 거리를 활보하고 다닌다고 생각해봐.”

    어제 포도가 입었던 것과 얼추 비슷한 것이었다. 순간 동원의 눈이 완전 마뜩찮다는 듯 가늘어진 것을 도하는 놓치지 않았다.

    “아주 좋겠네. 그치?”

    동원은 말없이 고개를 돌리고 물을 마셨다.

    “그렇지이?”

    “…….”

    동원은 고개를 숙이고 묵비권을 행사했다.

    * * *

    아무리 그래도 그 옷은 심했다.

    ‘포도야. 네가 정말 그 옷이 좋다면야 나도 좋지만, 연예인들도 사석에서는 그렇게 안 입어. 포도야. 네가 입었던 건 어디 연예인들이 상 받으러 갈 때나 입고 다닐 복장이잖아. 네가 김혜수니? 김혜수야?’

    그런데 그 마음을 솔직하게 말할 수가 없으니까 안 어울린다고 놀린 것이다. 그래도 어제는 내가 좀 심했나 하는 마음에 도하는 그날 저녁 그녀의 아파트 앞에 서 초인종을 눌렀다.

    [오늘 내가 만나기 싫다고 했잖아!]

    인터폰을 든 포도가 외쳤다.

    “아니 포도야, 내가 왜 미운데, 응? 어제 그렇게 놀렸다고? 너 그 옷이 그렇게 좋아?”

    쾅!

    그 말에 문이 열렸다.

    “○○○가 그렇게 좋냐?!”

    열이 받은 표정으로 포도가 외쳤다.

    “어?! 걔가 그렇게 좋아?!”

    ‘누구?’

    순간 도하는 생각했다.

    ‘누구?’

    내가 누구를 좋아한다고?

    “야! 넌 내가 여자로 안 보이지!”

    포도의 이름에서 나오는 게 연예인 이름인지도 몰랐다. 도하가 이해할 틈을 주지 않고 포도는 외쳤다.

    “넌 아직도 내가 그냥 동네 동생으로만 보이는 거지!”

    “그게 무슨 소리야?”

    도하는 어이가 없었다.

    ‘남자 나이 서른에 여자로 안 보이는 여자를 왜 만나, 내가? 바보야?’

    요즘은 생각만 해도 제2의 뇌가 벌떡벌떡 일어나고 몸이 달아 죽겠는데 그게 무슨 소리란 말인가? 도하는 어이가 없어 외치려 했다.

    ‘야! 김포도!’

    그런데 그 다음이었다. 도하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김포도가 비죽비죽 입술을 떨기 시작했다. 포도가 외쳤다.

    “연애한 지 4개월이야. 4개월, 너한테는 내가 동생으로밖에…… 으흑!”

    “울어? 김포도 너 울어?”

    강도하는 충격을 받았다. 도하의 말 그대로였다.

    “흐어어어엉……!”

    “포도야. 포도야. 왜 울고 그래? 응?”

    포도는 두 손에 얼굴을 묻고 엉엉 울기 시작했다.

    “내가 잘못했어. 어? 다 잘못했으니까.”

    도하는 놀라서 한 팔로 포도를 와락 끌어안고 포도의 집 안으로 들어갔다.

    “포도야. 내가 왜 널 여자로 안 봐. 이 세상에서 네가 제일 예뻐. 어제는 그거 그냥 그게, 너한테 안 어울려서…… 악!”

    그 와중에도 도하는 그리 말했다 포도에게 있는 힘껏 주먹으로 명치를 맞았다.

    “어억…….”

    “내 옷차림 지적하지 마!”

    “미, 미안해. 잘못했어. 미안해. 미안해.”

    “내가, 크흡, 그렇게 오빠한테 매력이 없어?!”

    “아, 아니 네가 왜 매력이 없어? 어? 내가 널 얼마나 좋아하는데.”

    도하는 왜 화가 났는지 모르는 포도를 설득하기 위해 또 자신의 지난한 짝사랑 이야기를 다 꺼내야 했다.

    “왜 그런 말을 해? 사람 슬프게. 내가 진짜 말을 안 해서 그렇지. 너를 얼마나 좋아하는데…….”

    * * *

    분명히 4개월 전에 했던 이야기다. 했던 이야기인데 도하는 포도를 소파에 앉히고 자신은 바닥에 앉아 눈높이를 맞춘 후 또 하고 또 했다. 내가 정말로 너를 아주 많이 사랑했노라고, 그리고 지금은 더 사랑하노라고. 점점 더 사랑을 해서 내가 지금은 아주 죽을 지경이노라고.

    쿨쩍쿨쩍.

    포도는 새빨간 눈을 카디건 소매로 슥슥 닦으며 도하의 세레나데를 들었다.

    “진짜 날 그렇게 좋아해?”

    “그래, 좋아한다니까. 이렇게 좋아하는데 왜 내 마음을 몰라?”

    “그런데…… 왜 안 해?”

    “뭘?”

    그 말에 포도가 젖은 눈으로 도하를 바라보았다. 포도의 얼굴이 점점 새빨개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게…… 이게 뭐야. 다 똑같잖아. 이대로라면 오빠랑 노는 거랑 연애랑 다를 게 뭐야. 나 여성적 매력이…… 없어?”

    “…….”

    ‘아.’

    그제야 도하는 포도의 말뜻을 알아차렸다. 순간 훅― 하고 저 배꼽 아래서부터 열기가 순식간에 머리끝까지 타고 올라왔다. 뜻을 알아차린 것만으로도 도하는 눈이 뜨거워질 정도로 온몸에 열이 올랐다.

    “아…… 어. 아. 아.”

    도하는 애끓는 신음을 몇 번 뱉다 한 손으로 자신의 입을 가리고 침묵했다.

    ‘이게 그래서 아…….’

    자신만 그런 생각을 하는 줄 알았다. 그런 줄 알았었는데…… 도하의 마음속에서 불쑥불쑥 무엇인가 치고 올라왔다. 도하는 포도를 바라보았다. 포도가 시선을 피했다.

    “야. 나, 나 콘돔 사올게.”

    마음을 증명하기 위해 도대체 이것 말고 무엇이 필요하겠는가? 도하가 말했다.

    “포도야, 우리 오늘 하자. 나 지금 콘돔 사오면 안 돼?”

    그 말에 포도가 움찔 몸을 떨었다. 포도의 말뜻이 이건가, 하고 생각했지만 도하는 막상 움찔하는 포도의 반응에 흠칫 놀랐다. 포도가 그렇게 말했음에도 어쩐지 그 눈을 보니 자신이 주책없는 짐승같이 느껴졌다. 그렇다. 혼자 좋아한 게 장장 칠팔 년이다 보니……. 머리 회전이 잘 되질 않았다.

    “아. 미안해. 내가 너무 급했지? 무드도 없고…….”

    그런데 순간 포도가 도하의 손을 쥐었다.

    “아, 아니……. 아니. 그런데 오빠, 내가 처음이라서…… 그게 괜찮을지.”

    그리고 화르륵 얼굴을 붉혔다.

    “괜찮고 말고 할 게 내가 뭐가 있어.”

    도하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니가 나를 허락해 준다는데.”

    “…….”

    “나야 너무 좋지.”

    도하는 바로 편의점에서 가서 콘돔을 사 왔다.

    “여기 있는 거 이거 다 주세요. 저기 창고에 이거 더 없나요? 박스로는…….”

    그동안 독야청청한 지 어언……. 사실 돌이켜 생각해보니 이때부터 이성은 이미 마비되어 있었다.

    * * *

    그리고……. 편의점 재고를 다 털고 나서 돌아왔는데 포도는 샤워까지 다 마치고 있었다. 풍기는 샴푸향. 도하는 정말이지 정신이 아찔아찔했다.

    ‘야, 이걸 이렇게 할 줄은 몰랐는데 오늘이구나. 나 오늘을 위해 33년을 살았구나. 진짜.’

    어떻게 하면 이성을 놓지 않을 수 있을까. 어른스러움을 유지할 수 있을까. 포도가 안 무섭게 잘 리드할 수 있을까. 도하는 순간 짐승처럼 달려들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고 포도를 침실로 데려갔다.

    불은 켜지 않았다.

    “포도야.”

    “응.”

    도하의 팔에 안긴 포도는 떨고 있었다.

    “포도야. 내가 너 많이 사랑해. 진짜로.”

    도하의 목소리도 떨렸다.

    “동네 동생이 아니라 여자로. 야. 여자로 보이니까 내가 이렇게……. 안달복달…….”

    “…….”

    “그런 고민 하게 해서 미안해. 응? 나는 네가 많이 소중해서. 아니 그게 그런 뜻이 아니라.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내가. 내가 이런 말 먼저 했어야 했는데 고민하게 해서 미안해.”

    “…….”

    “내가 너 얼마나 좋아하는지, 진짜 심장이라도 꺼내서 보여주고 싶다. 포도야.”

    도하는 포도를 침대에 눕혔다.

    “포도야. 포도야.”

    그리고……

    아 정말 그건

    이렇게……

    이렇게 좋을 수가 있나. 마치 이건 정말 처음 처음 하는 것처럼…….

    “아, 아으. 오빠아…….”

    “아파?”

    “아, 아프기는 한데…… 좋은 것 같아.”

    뚝!

    캄캄한 포도의 방, 포도가 신음하며 도하의 목에 자신의 두 팔을 둘렀을 때 도하의 이성은 그렇게 끊어지고 또 무너졌다.

    와르르르르!

    * * *

    “포도야…….”

    “그만해, 이 짐승아!”

    도하는 그날 밤 내내 너무 집요하게 군 바람에 다음 날 아침에 포도에게 뺨을 한 대 맞았다.

    “짐승 새끼야! 아파! 아프단 말이야!”

    “미안. 그렇게 아파?”

    “…….”

    “아팠어?”

    도하의 부드러운 말에 포도는 이불을 푹 뒤집어쓰고 삐죽삐죽했다.

    “나는 네가 너무 예뻐서 그러지. 그러니까…… 응?”

    “앗.”

    도하는 그 이불 속으로 머리부터 파고들어가 한 번 더 꾸물거렸다.

    “아앗…….”

    알몸으로 말이다.

    “포도야. 우리.”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그날 점심 도하는 이불 속에서 포도를 꼭 끌어안고는 말했다.

    “이번 추석 즈음에 고향에 같이 인사드리러 가자.”

    “응?”

    몸도 마음도 확인한 차에 포도를 마구마구 밀어붙였다.

    “우리 부모님과 너희 부모님한테, 허락받으러 가자.”

    * * *

    “뭐어?”

    그러나 몇 개월 후 그것조차 도하의 계획대로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동원과 도라네가 먼저 추석에 상견례를 한답시고 선수를 쳤기 때문이었다.

    “너네 추석에 인사드린다고?”

    “그래, 찬물도 위아래가 있지 너랑 나, 중엔 당연히 내가 먼저 아니니?”

    추석을 한 달여 앞둔 어느 날 난데없이 전화를 걸어온 도라가 당당하게 말했다.

    “그러니까 양보해.”

    “야, 강도라. 부모님께 인사드리는 일에 양보고 말고 할 게 뭐가 있어? 와……. 그런데 너 진짜 걔랑 결혼하게?”

    “걔에~?! 너 지금 우리 동원 씨한테 걔라고 한 거니?”

    “그럼 내가 걔한테 뭐라고 그래? 어? 형님이라고 그래?”

    “죽을래? 진짜로 죽고 싶어서 그러니?”

    도하의 말에 도라가 날카로운 소리로 으르렁거렸다. 중매 노릇은 잘되면 술이 석 잔이라고 했는데 도하는 협박을 당했다.

    “너네 시간 많잖아! 왜 명절에 그런대? 나중에 해! 나중에!”

    전화를 끊은 도하는 열이 받아서 관자놀이를 누르며 포도에게 말했다.

    “일이 그렇게 됐어. 우린…… 추석, 추석은 넘기고 하자.”

    “응응.”

    스피커폰이었다.

    “전 많이 부쳤어?”

    “아니이. 뭐 그냥.”

    “우리 집은 제사 안 지내. 우리 부모님 기독교인 거 알지? 우리 집 그냥 외식하거나 서로 여행가고 그게 끝이야. 너 내년에 우리 집에 시집오면 내가 명절 때도 두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히게 해줄게.”

    “…….”

    “나랑 결혼만 해주면 너네 집 전도 내가 다 부쳐줄게. 응?”

    도하와 포도는 함께 고향으로 내려갔지마는 그해 추석을 상견례 자리를 만들어버린 둘에게 밀려 그냥 가끔 동네 어르신들 보지 않는 새벽이나 저녁에 만나 손이나 몰래 붙잡아야 했다.

    “그러니까 우리 결혼하자. 포도야.”

    그 즈음엔 이미 확정이었지마는 도하는 거기에서 포도에게 청혼을 했다.

    “같이 살자. 우리.”

    그래서 도하네가 부모님께 서로를 소개시킨 것은 다음해 신년의 일이었다.

    신년, 그때 도라 커플은 번갯불에 콩 볶아 먹듯 이미 결혼식까지 올린 후 다시 뉴욕으로 날아가 있었다. 거기서 가정을 꾸릴 거라나 어쨌다나. 도하는 곰곰이 이 일에 대해 생각하다 가슴을 쓸어내렸다. 생각해보니 포도는 이동원을 짝사랑한 전적도 있고…… 두 커플 모두 한국에 있다가는 자칫 잘못 <사랑과 전쟁> 프로그램에 등장할 법한 일이 전개될 수도 있는 것이다.

    ‘잘 가! 우리 넷이서는 함께 보지 말자!’

    결과적으로 도하는 둘이 자신들 결혼 전에 저 멀리 날아가 줘 다행인 마음이었다.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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