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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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런 꼴까지 보였는데 더 이상 물러설 수 없어.’

    잘디잔 빗줄기가 차창에 낙서를 하는 동안 내가 생각한 것은 이렇게 또 비겁하게 굴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솔직하지 못하게 살아오는 삶에는 이제 지쳤어요. 마음속에 있는 모든 걸 토하고 어린아이처럼 엉엉 울었던 어제가 차라리 나았습니다.

    차라리 그때의 내가 솔직하고, 또 대견했습니다.

    그러니까 나는 서울에 올라가는 즉시 오빠에게 고백할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어젯밤 오빠의 말은 환청이었을까. 나는 꿈에서라도 한 번쯤은 그런 말을 듣고 싶었던 것일까.

    차 안에서 내가 가방을 끌어안고 걱정했던 것은 오빠가 나의 진심을 웃어넘기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이었습니다. 그거 다 착각이야, 네가 뭘 안다고. 어제 그 일 때문에 그러는 거야? 괜찮아. 괜찮아. 오빠가 그런 식의 농담으로 얼버무릴까봐. 지금까지 앓았던 마음을 그냥 어린애 투정으로 받아넘길까봐 무서웠습니다.

    ‘그건 싫어. 미안해하는 것도 싫지만 그래도 그건 정말 싫은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 안에 남은 것을 마저 토하고 싶었습니다. 솔직히 다 토하고 속 편해지고 싶었습니다.

    ‘나 오빠 좋아해. 사실은 정말 예전부터 좋아했었고…… 아, 이렇게 말하면 안 되겠지. 그럼 동원 씨 좋아했던 건 뭐가 돼. 도대체 오빠가 뭐라고 받아들일까. 황당해하는 건 아닐까?’

    차가 서울을 향해 달리는 내내 할 말을 생각했는데 막상 오빠가 주차장에 차를 주차하고 나니 내가 내뱉은 건 될 대로 돼라에 가까운 말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빠는 내가 그냥 동생 같고 그렇지? 오빠는…… 싫지?”

    그런데 다가온 것은 오빠의 입술이었습니다.

    오빠의 입술.

    그게 내 첫 키스였습니다. 레몬 맛 혹은 민트 맛이 날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습니다만, 나는 이걸 술병 나서 토한 다음 날 하게 될지는 꿈에도 몰랐습니다. 오빠의 입술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육감적이고 뜨겁고 또 믿을 수 없을 만큼 부드러운 데가 있었습니다. 내가 놀라서 가만히 있자 오빠가 나를 단단한 두 팔뚝에 가두며 내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습니다.

    열어달라는 듯이요.

    나는 나도 모르게 입술을 열어 오빠를 받아들였습니다. 나도 모르게 나는 오빠의 가슴팍을 두 손으로 꼭 그러쥐었어요. 그리고 다가온 오빠의 입술은, 혀는, 그 첫 키스라는 것은.

    이렇게 말하면 그렇지만 참 달고 맛있는 데가 있었습니다.

    어떻게 오빠의 입술은 이렇게 부드럽고 사람을 간지럽게 하고 온몸을 또 둥실 떠오르게 하는지, 나는 거의 홀려서 정신이 없었습니다. 이 순간이 영영 끝나지 않았으면 싶었어요. 그런데 오빠가 입술을 떼었습니다.

    “그거 꿈 아니야.”

    오빠가 내게 고백했습니다.

    “내가 너 좋아했어. 진짜 몰랐어?”

    약간 울먹이는 투로요.

    “내가 너한테 말은 못 했지만, 그렇게까지나 했는데 진짜 몰랐어?”

    * * *

    지금까지 겪었던 이 불안, 슬픔, 기쁨, 짝사랑, 자신이 했던 온갖 헛발질까지, 도하는 더듬거려가며 포도에게 고백했다. 나는 너를 네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전 아주 훨씬 전부터 좋아했노라고, 짐승이 덫에 걸린 듯이 좋아했노라고, 사실은 너를 만나러 이곳에 다시 왔노라고, 나는 아주 훨씬 전부터 너를…….

    도하는 쉴 새 없이 고백했다. 지금까지 도대체 어떻게 이 말을 참을 수 있었던 것일까.

    “모르지!”

    다 들은 포도가 말했다.

    “당연히 모르지!”

    갑자기 왕왕 울면서 그의 가슴을 퍽퍽 쳤다.

    “말을 안했는데 당연히 모르지! 내가 어떻게 알아!”

    진심으로 화가 난 표정이었다.

    “내가 그래서 혼자 가슴앓이를 얼마나 했는데!”

    그런데 도하의 눈엔 그 모습조차 얼마나 귀여운지 몰랐다.

    “포도야.”

    도하는 포도의 이름을 부르며 포도를 끌어안았다. 숨도 못 쉴 만큼 꽈악.

    “포도야. 미안해. 네가 너무 좋아. 우리 사귀자. 응?”

    이게 꿈이면 절대로 깨지 않고 또 놓지 않고 싶어서. 계속해서 이러고만 있어도 좋을 것 같아서. 정말로 이렇게 보내고 싶지 않았다.

    “포도야. 내가 진짜 너 간호만 해 줄게.”

    보내기가 너무 싫었다.

    “진짜 옆에만 있을게. 응? 나 저 안으로 들어가면 안 될까?”

    이렇게는 헤어지고 싶지가 않았다.

    “싫어. 나 쉴 거야. 힘들어.”

    그의 가슴팍에 찌부러지듯 안긴 포도가 웅얼거렸다. 도하는 그녀의 어깨에 머리를 묻고 자신의 코를 비볐다. 그리고 덩치에 맞지 않는 애교를 마구 부렸다.

    “포도야. 포도야. 응?”

    그래서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아무 일도 없었다.

    당연하지. 아니 애가 어제부터 아픈데 뭔 일을 하겠어?

    도대체 무슨 일을 상상한 거야?

    “…….”

    포도의 집에 입성한 도하는 혹여나 쫓겨날까 얌전히 소파에 앉아 포도를 바라보았다.

    “기분 나빠. 그만 봐. 얼굴 뚫어지겠어.”

    “짐 정리 도와줄까?”

    “싫어.”

    “차 마실래? 내가 차 끓여줄까?”

    “우리 집에 차 없어.”

    포도는 붉어진 얼굴로 틱틱거렸지만 도하는 싱글벙글했다. 이렇게 봐도 저렇게 봐도 방금 전 자신의 여자 친구가 된 포도는 어찌나 예쁜지 도하는 이 상황이 정말 하나도 믿기지가 않았다.

    꿈이라면 깨지 않았으면 좋겠다.

    “포도야, 나 오늘 자고 갈까? 그냥 여기 소파에서…….”

    “미쳤어? 나가!”

    그러다 결국은 쫓겨나서 집에 돌아가는 길.

    ‘세상이…….’

    햇살은 눈부시고 바람은 아름다웠다.

    ‘세상이 이렇게도 아름다웠나?’

    운전하며 도하는 행복에 취해 생각했다. 시인 혹은 음악가처럼.

    “포도야.”

    도하는 집에 도착하자마자 포도에게 전화를 걸었다.

    “다음 주에 시간 돼? 주말에 밥 먹으러 가자.”

    “…….”

    “우리 뭐 할까? 영화도 보고 한강에 자전거도 타러 가자. 아니 그런 거 하나도 안 해도 되니까 아무튼 너 하고 싶은 거 다 하자.”

    “…….”

    “둘이서, 같이 있자.”

    그리고 데이트 신청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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