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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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상과는 달랐지만, 예상과는 너무도 달리 일이 흘러갔지만.

“포도야. 나는 네가 좋다. 그런데 너는…… 그래?”

도하는 결국 고백했다. 인생이란 결국 그 무엇도 제 뜻대로는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내 사랑으로는 안 돼? 나로는 안 되겠어?”

그렇게 많은 말을 준비해 왔는데 실제로 한 말은 결국 이것이었다. 찌질하다고 도하는 생각했다. 낭만은커녕 얼마나 찌질한지 치가 떨릴 정도였다.

“나로는 안 돼?”

그래도 더 이상은 어쩔 수 없다. 보답받지 못할 것을 아는데도 더 이상 마음을 숨길 수가 없었다.

“…….”

곪다 못해 터져버린 도하의 마음. 그런데 포도는 도하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침대 위 하얀 이불에 감싸인 채로 도하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순간 창밖의 구름이 속력을 내며 달을 스쳐 지나갔다. 달빛이 창문을 통과해 침대 위에 쏟아졌고 도하의 눈에 포도의 얼굴이 말갛게 드러나 보였다. 포도의 두 눈이 빨아들일 듯이 도하를 바라보고 있었다.

쿵. 쿵. 쿵.

그것만으로도 도하의 심장은 너무 뛰어 죽겠는데 사랑이 필요하다고 대성통곡하던 포도는 도하의 말에 아무 대답을 하지 않았다. 도하는 용기를 내 손을 뻗었다. 그리고 다시 포도의 머리칼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포도야, 내가 너 너무 좋아해.”

침묵.

백 년이 흘렀을까. 포도도 손을 뻗었다. 그리고 자신의 머리를 덮고 있는 도하의 손등 위로 자신의 손을 덮었다. 도하는 마른침을 삼켰지만 포도의 머리에서 손을 떼지는 않았다. 다만 그 동작이 자신의 머리에서 손을 치우라는 뜻인가 생각했다.

그런데 포도는 제 손을 도하의 손에 얽어 깍지 끼었다.

꼭 하고 잡았다.

꼭.

도하는 그녀의 입가로 자신의 손을 가져가는 포도를 바라보았다. 포도는 도하의 손등에 입술을 가져가 대었다. 그리곤 고개를 들어 애절한 눈으로 도하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눈을 감았다.

“포도야?”

그게 끝이었다. 포도는 움직이질 않았다.

그대로 잠이 든 것이다.

‘이게 무슨 뜻이야?’

덕분에 도하는 포도에게 손을 붙잡힌 채 그날 밤을 뜬 눈으로 다 새웠다.

‘이게 무슨 뜻일까? 포도야. 이게 무슨 뜻이니?’

머릿속이 하얘졌다. 그런 이야기 있지 않은가? 너무도 감당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나 하룻밤 새 노인처럼 머리가 다 세어버렸다는 젊은이 이야기, 도하는 그 이야기가 어쩐지 사실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당장 화장실로 가 거울을 보았을 때 자신의 머리가 하얗게 세었더라도 도하는 놀라지 않을 것 같았다.

‘뜻이 있니?’

마음 같아선 새근새근 숨소리를 내며 잠든 포도를 깨우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고, 그는 가닥가닥 깊어지는 밤을, 그리고 다시 반대로 밝아져가는 아침을 포도와 한 침대에서 보냈다.

‘뜻이 있기는 하니?’

다음 날 아침 일찍 포도는 일어났다. 그런데, 말갛고 부스스한 얼굴을 하고 도하를 바라보는데…….

“포도야.”

도하는 그 뜻이 너무도 궁금했음에도 질문을 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속은 괜찮니? 해장국 먹을래?”

포도의 눈이 뜻하는 바를 이해할 용기가 잘 나지 않았다.

“오빠가 너 집에 태워다 줄게. 집에 가자.”

벼랑으로 한 걸음 내딛을 용기, 날 수 있으리라는 믿음 없이도 저 절벽 아래 나를 내맡기는 용기, 아무것도 쥐지 못하리라는 걸 알면서도 손에 쥔 것을 놓을 수 있는 용기가.

‘다시 하자.’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이 아니라면 이런 미친 짓을 할 기회가 영영 오지 않으리라는 것도 도하는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제대로, 다시.’

도하는 문질문질 포도의 헝클어진 머리칼을 문질렀다.

“응.”

포도는 한참이나 도하를 바라보더니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내 방에서 씻고 짐 챙겨 올게.”

포도는 자기 방으로 건너갔고 도하는 그동안 포도가 자신의 손을 쥐고 있느라 하지 못했던 일을 했다. 워크숍을 담당하던 인사 팀장에게 일이 있어 먼저 올라가겠노라고 문자를 보낸 뒤에, 다 쓴 수건을 내놓고 짐도 정리했다.

도하는 어쩐지 스물셋 때 끊었던 담배 생각이 간절하다고, 그 모든 일을 하면서 생각했다.

“응. 왔어?”

포도가 짐을 챙겨오자마자 도하는 포도를 차에 태우고 출발했다. 아침 일찍이어서 그런지 도로는 뻥 뚫려서 운전하기 편했다. 평소였다면 재잘재잘해야 할 포도가 침묵하고 있어서 도하는 라디오를 틀었다. 아침 뉴스가 흘러나왔다.

“포도, 배고파?”

“아니.”

“그럼 서울에서 밥 먹을까?”

“응.”

“뭐 먹을래? 먹고 싶은 거 있어?”

휴게소를 그대로 지나치는데 차창을 잘디잔 빗줄기가 때리기 시작했다. 도하는 한참이나 생각에 잠겨 있었다. 한순간의 선택으로 인해 앞으로 잃어버릴 것들, 다시는 얻지 못할 것들을 생각하고 있었다.

포도는 미안해할 것이다. 미안해하고 또 어색해할 것이다. 벌어지는 거리. 앞으로 같이 겨울밤바다를 볼 일이 있을까. 도전이야 하겠지만 다른 남자가 마음에 있는 여자가 내 생각을 해주기는 할까. 나를 남자로 보기는 할까.

일단은 지금까지 쌓아올렸던 모든 관계를 잃어야 하겠지.

0으로 시작해야 하겠고 그게 1이 될 수 있을지 나는 알 수가 없지.

어쩌면 포도는 왜 고백을 했느냐고 원망할지도 모른다. 지금까지 충분히 좋지 않았느냐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어제 일을 기억하면서도 모른 척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 모든 것을 무너뜨릴 때였다.

차라리 차가 막혔다면 좋았을까? 도하는 두 시간 반 만에 포도의 집에 도착했다.

“…….”

그동안 포도는 자신의 가방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 꼭 끌어안은 채 말이 없었다. 포도의 아파트 앞 주차장에 도하가 차를 세웠다.

“포도야. 있잖아. 내가.”

“나 오빠 좋아해.”

그리고 포도가 말했다.

“어?”

“오빠를 사랑한다고.”

새카만 포도 같은 눈동자에 도하를 가득 담고.

“언제부터인지는 잘 모르겠어.”

핸들에 한 손을 얹고 포도에게로 몸을 돌린 도하는 그대로 멈췄다.

“나 이제 동원 씨 상관없어. 오빠가 좋아. 내가 좋아하고 원하는 건 오빠의 사랑이야.”

“…….”

“나…… 어제 오빠가 나한테 고백하는 꿈을 꿨어.”

포도의 두 눈이 찌그러지나 싶더니 물기로 촉촉하게 젖었다. 그녀가 목이 멘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데 그거 그냥 꿈인가봐. 오빠는 내가 그냥 동생 같고 그렇지? 오빠는…… 내가 싫지?”

도하는 포도의 말을 믿을 수 없었다.

“아니.”

도하가 말했다.

“안 싫어. 포도야.”

“동정하지 마.”

포도의 말이 떨렸다.

“이게 무슨 동정이야. 나는 좋지. 너무 좋지. 포도야.”

도대체 이게 꿈인지 뭔지. 포도의 말에 도하는 온몸이 다 떨릴 지경이었다. 도하는 안전벨트를 풀었다.

“나는 네가 너무…….”

그리고 두 팔을 벌려 포도를 끌어안았다.

“좋지.”

무슨 말을 한다 한들 이 마음이 전해지긴 할까.

“그거 꿈 아니야. 너무 좋아. 널 좋아해. 내가 너 좋아하는 거 아니면 지금까지 등신같이 왜 이랬겠어. 응? 왜 울고 그래. 포도야.”

끌어안은 포도의 온몸이 떨렸다. 포도의 얼굴을 묻은 어깨가 순식간에 젖어들었다. 도하는 포도의 어깨를 쥐고 얼굴을 바라보려고 했다. 포도가 고개를 숙였다. 도하는 포도의 이마에 자신의 입술을 얹었다. 눈가에도 입술을 묻고 뺨으로 내려갔다. 키스했다. 그 뜨거움과 촉촉함과 부드러움, 그 맛이란.

부드럽고, 부드러운 동시에 가슴이 뭉클하고…….

달콤하고 새콤하고 동시에 눈물 짠물이 다 섞여서 그런지 바다를 들이킨 것처럼 짜고 쓰고 시고 또 동시에 더 그래서인지 목마르고 달아 죽겠는 그런.

바로 그런.

‘도대체.’

도하는 이 일이 꿈이 될세라 그녀를 꽉 끌어안고 포도의 입술을 맛보며 생각했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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