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음. 오빠 있잖아.”
어느 날 포도가 도하에게 면담을 신청하더니 이렇게 말했다.
“오빠가 계속 일을 주는 거, 그래서 내가 이렇게 출근을 하고 또 사회생활을 다시 하게 된 거 너무너무 고마운데 말이야.”
포도의 말로는 자기 일을 할 시간이 생각보다도 훨씬 더 줄어들었단다. 그러니까 이제 이 일을 그만두고 싶단다. 하기야 도하는 이미 훨씬 전부터 알았다. 포도가 일을 시작한 건 처음부터 옆에 두고 싶었던 자신의 욕심 때문이었다.
그런데도 도하는 질척거렸다.
“그래도 가끔 외주는 받을 거지?”
“그래, 받지. 나야 너무 좋지. 출퇴근하는 게 어려울 뿐이야.”
하지만 더 잡을 명분이 없었다. 하기야 고백도 못하고 실연을 당했으니 회사생활은 시들시들해져 버렸을 것이다. 동원을 바라보는 것조차 마음 아플지도 모른다.
“미안해.”
일어나는 포도에게 이 말은 꼭 해야 할 것 같아 도하는 진심을 담아 그렇게 말했다. 포도는 자리에서 일어난 채로 자신을 한참이나 바라보더니…….
“오빠가 뭐가 미안해.”
꾹 참는 듯한 얼굴로 웃었다. 꾹, 하고 넘쳐흐르는 마음을 눌러 담는 듯한 얼굴. 그걸 바라보는 도하의 마음에 파삭, 하고 기스가 났다.
그 기스가 난 곳에서, 도하의 마음이 울컥, 흘러넘쳤다.
내가 왜 너한테 미안하느냐면,
미안할 게 뭐가 있느냐면 너 사랑 도와준답시고 앞에서는 친절하게 굴어놓고, 내 멋대로 내가 하고 싶은 걸 다 하고서 말이야, 사실은 네 사랑을 훼방 놓은 것도 나고, 그러니까 니가 이렇게 침울해진 원인은 사실 나고 말이야, 내가 진짜 너한테 잘못했는데,
포도야. 내가 니가 포기가 안 돼.
야. 그때 차라리 그냥 솔직하게 말할걸. 그렇게 말하지 못해 여기까지 와놓고 나는 또.
또.
그냥 너를 사랑한다고 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포도야.
“……미안하다.”
그 모든 마음을 투명한 괄호에 담아 집어넣고 도하는 말했다.
‘포도야. 내가 정말 너무 미안해.’
* * *
“미안하다.”
오빠는 말했습니다.
“내가 정말 미안해.”
내가 고백 한 번 못해보고 실연당한 것이 자신 때문인 것처럼 오빠는 면목 없어했습니다. 오빠는 진심으로 나의 사랑이 이루어졌으면 싶었던 걸까요? 학생이 가고 싶었던 대학에 못 간 것을 애석해하는 과외선생님의 심정인 걸까요?
“미안해.”
“…….”
무엇인가를 더 말하고 싶은데 말하지 못하는 듯한 얼굴로 머뭇머뭇 미안하다는 말을 한 번 더 하기에 나는 뭔 말은 못하고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습니다.
‘미안할 필요 없어. 나 이제 오빠 좋아해.’
뭘 어쩌겠어요. 그 말에, 그냥 웃어주는 것밖에.
‘그래서 오빠 얼굴을 못 보겠어. 오빠.’
왜냐하면 오빠한테 나는 그냥 동네 꼬맹이잖아.
‘오빠 얼굴을 보면 좋은데, 좋은데 슬프고 힘이 들어.’
나는 아르바이트 생활을 마치고 퇴사했습니다.
“포도 씨 잘 가요.”
“포도 씨 시간 나면 또 올 거죠?”
애초에 들고 온 게 없어서 딱 작은 상자 하나에 짐을 부쳐 택배 보내는 것으로 정리는 끝났습니다. 별다른 송별회도 없었어요. 애초에 알바였고 마음만 먹으면 또 여기 올 수 있을 거라고 그들은 믿고 있었으니까요. 집에 돌아와서 나는 어쩐지 많이 울적한 마음에 슬픈 영화를 봤고, 슬픈 영화를 봤다는 핑계로 많이 울었습니다.
‘뭐야, 실연당한 것도 아닌데…….’
고백도 못했는데, 오빠는 내가 오빠 좋아하는 것도 모르는데…… 울면서 어쩐지 나는 내 삶에 무책임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또 나 혼자 북 치고 장구 친 것뿐인데. 내 삶에 민망하고 미안해.’
* * *
‘동원이 여친이 강도라라는 소문을 포도가 들었을까. 듣고도 그냥 말을 안 한 건가. 혹시나 동원이가 도라랑 사귀는 게 나 때문이라고 생각할까. 내가 그 변호사 광고 물어다 준 것까지 포도는 알까? 아니야. 거기까지는 모르겠지. 그렇지만 혹시나 소문이라는 게…….’
포도를 보내고 난 뒤 도하는 안절부절못했다. 블로그를 확인했지만 여전히 일기는 올라오지 않았고 일상툰에는 이제 사랑에 대한 이야기가 없었다. 포도는 일상툰에서 실은 아무것도 아닌 것들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다이어트, 스트레스, 여행과 맛집. 뭐 그런 것들. 사람들이 아무리 슬퍼도 SNS에는 행복한 얼굴을 한 자기 사진을 올리는 것처럼 포도의 작업물은 이젠 그녀의 마음을 드러내지 않고, 뜬구름 같은 행복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고 있었다.
‘역시, 알고 있는 걸까?’
이성적으로 생각해보면 소문이 안 날 리가 없다.
‘내가 미울까?’
도하는 마음이 곪아 들어갔다.
‘오빠가 뭐가 미안하냐고 말은 했지만 실은 포도는 내가 미울까?’
지금이라도 좋아한다고 말하고 싶다. 이 얽히고설킨 마음을 풀고 싶다.
‘그런데 그렇게 도와준다고 나댄 다음에? 그런 지 얼마나 지났다고 내가?’
그는 자신이 만든 수렁에 빠졌다.
‘내가……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지?’
그는 자신이 직접 판 무덤에 빠져 어찌할 바를 몰랐다.
* * *
회사를 그만 나가게 되었다고 오빠와의 관계가 끝난 건 아니었습니다. 그렇잖아요. 오빠는 연애 코치를 해준다며 눈치 없이 나서기 전부터도 오지랖이 하해와 같이 넓었고, 또 상냥했으니까요. 진짜 그놈의 미친 상냥함. 만약에 오빠가 다른 여자를 사귀면 그 여자는 피눈물이 날 것이었습니다. 관심도 없는 동네 동생한테도 마치 여자 친구처럼 치대는 걸 보면 말이에요.
[니가 좋아하는 그 영화 재개봉했던데]
[날씨 좋다. 밖에 나올래?]
[오빠가 너 드라이브 시켜줄까?]
오빠는 내가 실연당해서 많이 힘들다고 믿는 모양이었습니다. 오빠가 나를 지금 이 수렁에서 건져줄 수 있다고 굳게 믿는 모양이었습니다.
[응, 그런데 오늘은 바빠 가지고ㅠㅠ]
[나 다다음 달 캐릭터 페어에 나갈 거거든. 요즘 바빠]
[미안해. 카톡 늦게 봤다]
문자 메시지가 오면 나는 울적한 표정으로 거절 답장을 적어 보냈습니다. 지금 당장은 나도 내 마음을 제어할 수가 없었습니다. 오빠는 아무 잘못 없는데 어쩐지 만나면 나는 오빠에게 나쁘게 굴 것 같았습니다.
보고 싶은데 봐서 뭐 해. 아무리 친절하고 상냥해도 내 게 될 수 있는 것도 아닌데.
‘그냥 내 마음속에서 유학 보내자. 오빠가 다시 유학 갔다고 치자.’
나는 오빠를 피하기 시작했습니다. 오빠를 다시 뉴욕으로 유학 보내 버렸다 생각하고 당분간은 혼자 있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지. 그놈의 연애 코치한답시고 오빠와 너무 붙어 다녀서였던 걸까요.
주룩.
오빠의 빈자리가 너무도 쓸쓸하게 느껴지는 것이었어요. 마치 혼자 외로움을 견뎌야 했던 대학교 1학년 때처럼. 왜 같이 유학 가자고 안 했냐고 오빠를 원망하며 보냈던 그때처럼.
‘어……?’
혼자서 밥을 차려 먹는데 나도 모르게 주룩주룩 눈물이 나는 것이었습니다.
‘어어……???’
머릿속에서 뜬금없이 문득 오빠랑 자전거 같이 타던 풍경이 떠올랐습니다. 봄의 만남, 여름의 녹음, 오빠의 웃음, 자전거를 탔을 때 빠르게 피부를 스치던 바람, 그땐 그 일을 이렇게 소중하게 회상할 줄은 몰랐었는데.
‘흐윽.’
나는 손등으로 눈을 비비며 쿨쩍거렸습니다.
‘이게 뭐야.’
보고 싶어.
보고 싶은데 보기 싫어. 나를 애처럼 대하는 오빠는 보기 싫어. 하지만…… 보고 싶어.
나도 내 마음을 모르겠고, 보면 뭘 하겠어. 그런데 보고 싶고. 이런 마음을 알면 오빠는 뭐라고 생각할까. 뭐라고 할까.
미안해서 죽으려고 하겠지?
‘되게 바보 같아.’
다른 짝사랑보다도 충격이 좀 컸습니다. 이번에는. 어쩐지.
그 눈치 빠른 오빠가 내가 자신을 피하는 걸 모를 리 없을 것입니다.
[포도야.]
오빠가 어느 날 문자 한 통을 보냈습니다.
[내가 삼십 분 있다가 너희 집 앞에 가도 돼?]
[왜?]
나는 답장했습니다.
[아니 그냥.]
조금 시간을 두고 문자가 왔습니다.
[우리 포도 얼굴 보고 싶어서 그러지.]
[나 바쁜데.]
[내가 할 말이 있어서 그래. 10분도 안 걸려. 잠깐만 나와.]
거절하려고 했는데 문자가 또 전송되어 왔습니다.
[여기 놀이터에서 너 나올 때까지 기다릴 거야.]
* * *
샤워를 하고 드라이기로 급히 머리를 말리고 화장을 하고 오빠가 준 원피스를 입는데 딱 사십 분이 걸렸습니다. 나는 아파트 단지 안 놀이터로 뛰어갔습니다. 밤이 쌀쌀맞아서인지 다른 사람은 아무도 없고 코트를 입은 오빠가 발을 모래에 질질 끌며 그네를 타고 있었습니다.
“언제 왔어?”
“포도야.”
오빠가 나를 보더니 웃으면서 일어났습니다. 일이 바빠서 그런 건지 가로등 불빛 아래 오빠는 전보다 많이 야위어 보였어요.
“방금 왔지.”
“…….”
나는 나도 모르게 손을 들어 올려 오빠의 뺨을 만져 보았습니다. 오빠는 움찔했지만 내 손을 피하지는 않았습니다.
‘거짓말.’
얼음장처럼 차가웠습니다.
“여기 왜 온 건데?”
내 목소리가 이보다 더 상냥했으면 좋았으련만.
“아, 그게……. 있잖아?”
오빠가 여기 온 이유에 대해 말했습니다.
“우리 회사 이번에 워크숍 가거든.”
“응.”
“뭐 말만 워크숍이지. 포상 휴가에 가까운 거야. 그래서 말인데, 너 나랑 워크숍 갈래? 먼 데도 아니라 동해 가까운 데인데…….”
나는 어이가 없어서 오빠를 빤히 올려다보았습니다. 황당했습니다.
“내가 왜?”
“너 우리 직원이나 마찬가지잖아.”
“지금은 아니잖아.”
“왜, 거기서 조개구이도 먹고 대하도 먹고 좋잖아. 응?”
그 회사 그만둔 지가 언제인데, 워크숍을 가자는 거야? 미친 게 아닌가 싶었지만 오빠가 떼를 썼습니다.
“그냥 공짜로 바람 좀 쐬고 온다고 생각하면 되지.”
“싫어. 내가 거기 소속된 것도 아니고.”
“그럼 그냥 나랑 여행 가서 노는 거라고 생각하면 되잖아, 응?”
내가 계속 싫다고 말도 안 된다고 고개를 절레절레 젓자 오빠는 고개를 푹 숙이고 운동화 발끝으로 땅을 툭툭 쳤습니다.
“동원이 때문에? 거기 동원이 안 가.”
나는 엄청 답답했습니다.
‘아니. 그런 문제가 아니라니까.’
문제는 너야. 너. 너라고.
그런데 그로부터 삼 일 후, 나는 동해, 삼척에 있는 장호항 펜션에 있게 됩니다.
“자, 마셔, 마셔!”
나는 도대체 내가 왜 여기 왔는지, 그리고 이 술을 왜 마시고 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 * *
―혼자 있으면 외롭잖아. 거기 친한 사람도 많으면서, 응? 내가 너한테 한우도 구워주고 술도 무한정 줄 건데, 맛있는 칵테일도 만들어줄게. 장소도 별로 안 멀어. 나랑 같이 겨울 바다나 보자. 응? 내가 이제 네 사장님도 아니잖아. 민망하거나 심심하거나 거리낄 게 뭐가 있어. 잘해줄게. 나랑 같이 겨울 바다 보러 가자. 포도야.
아니 사실 이유는 압니다.
―내가 잘해줄게. 나랑 같이 겨울 바다 보러 가자. 포도야.
오빠의 바로 그 말 때문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