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지금까지 혼자서 북 치고 장구 치고 도하는 아주 일인으로 사물놀이를 다 했다. 원래 이런 성격이 아닌데 하며, 자신의 마음에 대고 이런 핑계 저런 핑계 대며 비겁하게 굴고 있는 것은 사실 강도하였다.
도대체 내가 왜 그럴까.
식사 후 도하는 대표실에 앉아 곰곰이 생각했다. 덩굴처럼 자신의 발목을 움켜쥐고 있는 것이 무엇일까? 두려움? 사랑받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이 마음을 거절당하리라는 원초적인 두려움?
‘고백 한 번에 이 모든 걸 잃어버리리라는?’
그러나 그것뿐은 아니었다. 강도하는 얽히고설키는 자신의 마음 밑바닥에서 죄책감을 발견했다.
‘내가 모든 걸 망쳐버린 건 아닐까?’
포도가 사랑에 빠지지 않았더라면.
그리고 그 사랑을 내가 방해하지만 않았더라면.
지금까진 그리 생각했다. 남들이 봐도 가망이 없다는 것이 뻔히 보이는데도 제 욕망을 위해 몸부림치는 악역들을 보면, 주인공 간의 사랑을 방해하는 동시에 오히려 더 깊어지게 하는 장치가 되는, 그리하여 삶의 조연 자리에 스스로 서게 되는 그들을 보면 그는 혀를 찼다. 자신의 일이 아닌 것처럼 말이다.
―야, 뭐 저러냐?
―상대가 싫다는데 깔끔하게 포기 좀 하지.
―어?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면 행복을 빌어주지는 못할망정.
―진짜 사랑은 저런 게 아니야.
지금 생각하면 기가 차다. 어떻게 그렇게 사랑을 함부로 재단했었나.
악조.
이제 깨달아보면 도하 그 자신이 그 자리에 서 있다. 타인의 입장에 서서 쯧쯧거리고 손가락질했던 행동을 하고 꼴사납다 생각했던 위치에 그는 서 있었다. ‘만약’이라는 단어가 그를 괴롭혔다. 만약에.
그냥 그 순간, 회사에서 돌아온 그 순간, 혹은 포도가 다른 남자를 짝사랑한다는 걸 안 순간, 앞뒤 재지 않고 따지지 않고.
―나는 너 좋아하는데.
포도야. 생각해봐. 나는 너 좋아하는데.
했으면 어땠을까. 만약에.
―야. 사실 있잖아. 내가 널 좋아하는데.
뺨을 맞는 한이 있어도 그런 말을 할 수 있었더라면.
―내가 널 정말 좋아해.
‘그놈의 만약. 만약.’
도하는 두 손으로 얼굴 가죽이 벗겨지도록 거칠게 문질렀다. 만약 그랬더라면 자존심에 상처를 입었어도 오히려 지금쯤은 후련해질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가 바라는 것은 거절당하고 후련해지는 게 아니었다. 정말로 무슨 수를 써서라도 포도와 잘해보고 싶었다.
‘포도야. 포도야. 널 좋아해. 너와 잘해보고 싶어. 너와 잘해보고 싶어서 그랬어.’
그러니까 전에는 생각도 못 했던 짓을 하고 이렇게 기회를 노리며 옆에서 맴맴 맴도는 것이다. 이제 여름도 다 갔는데 철 지난 줄 모르는 여름 매미처럼.
김포도의 연애는 짝사랑으로 끝날 것이다. 왜냐하면 내가 이루어질 수 없도록 훼방 놓았으니까.
바로 이 내가 TV를 보며 혀를 끌끌 찼던 악역이니까.
도하는 그날 밤 절망적인 기분으로 포도의 아파트 앞에 섰다. 포도가 좋아하는 이동원은 다른 여자를 사랑한다는데 도하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 전혀 좋지 않았다.
‘나는 쓰레기다.’
어쩐지 더 엉망이 되어가는 기분이었다.
‘나는 포도 인생에 나타난 악역인지도 몰라.’
그렇게 생각하니 울고 싶었다. 악역도 조연도 아니고 싶었다. 나도 포도 인생에서 주인공이고 싶었다.
‘내가 네 인생의 주인공일 수만 있다면.’
상냥하고 사심 없는 동네 오빠라는 탈을 쓰고, 이미 다 방해해버린 사랑을 도와주는 척하며, 키다리 아저씨마냥 젠체하며 주변을 맴도는 일은 도저히 못하겠다는 생각이 든 도하는 이곳에 서기 위해 있는 용기 없는 용기를 다 쥐어짜냈다.
‘그런데 아직도 아픈가? 얼마나?’
가족과 함께 사는 것도 아니다. 연락이 안 되는 포도가 많이 아픈가 싶고 걱정되어 죽겠다. 도하는 자신이 포도의 건강을 걱정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원했다. 그 위치에 정말정말 서고 싶었다.
“포도야.”
도하는 한 손에 죽집 봉투를 쥔 채 문을 두드리며 포도의 이름을 불렀다.
‘나를 사랑해 줘.’
실은 구슬피 울부짖고 싶었다.
달밤, 지붕을 한없이 바라보다 고개를 위로 꺾고 울부짖는 개처럼, 아우우우우…… 하고.
포도야, 내가 참 이기적이었어. 지금도 이기적이야. 너한테 잘해준 거 사심 없이 그런 거 아냐. 내가 솔직히 너한테 못할 짓도 했어. 그런데, 그거 아는데…….
‘내가 이기적이지만 너를 사랑해. 그러니까 나를 사랑해 줘.’
사랑해 줘. 사랑해 줘. 나를 조연이 아니라, 무대가 아니라 흑막 뒤에 선 사람이 아니라, 너를 상처 입히는 존재가 아니라, 주인공으로 만들어 줘. 그러기 위해선 뭐든지 다 할 테니까…….
“포도야. 자니?”
도하가 철문에 대고 물었다.
달칵.
인터폰 수화기를 드는 소리가 도하의 귀에 들렸다.
[왜?]
철문 너머에서 포도가 물었다.
[갑자기 왜?]
낮고 거칠고 조금은 딱딱하게 들리는 목소리.
[왜 왔는데?]
“포도야. 몸은 어때 괜찮아?”
도하가 문 밖에서 신음하듯 물었다.
[응. 괜찮긴 한데]
“문 좀 열어봐. 오빠가 죽 사가지고 왔어.”
[그게……. 문을 여는 건 좀 그래.]
“왜?”
[몸도 안 좋고 지금 화장도 지웠고 땀도 많이 났고]
“그게 무슨 상관인데? 어? 내가 너랑 그런 거 안 본 사이도 아니고.”
[그냥 좀 그렇다고. 오늘 연락 안 한 거 보면 모르겠어?]
“…….”
[그게, 미안해. 오빠, 오늘 내가 몸이 아프고 힘들어서 그래, 아파서 혼자 있고 싶어.]
“어. 야. 미안하다.”
[미안해. 정말 고마워. 그런데 오늘은 좀 가주면 안 돼?]
포도의 목소리와 포도의 말에 도하의 용기는 아침 서리 녹듯이 순식간에 사그라졌다.
* * *
말을 하는 목소리가 내 귀에도 차갑고 딱딱하게 들렸습니다. 오빠에게 못할 짓을 하고 있다 생각하니 가슴이 지끈거렸습니다.
‘알아.’
나도 나 걱정되어서 온 사람에게 아주 많이 못되게 구는 건 알았어요.
‘나도 안다고.’
그런데 정말로 나는 진짜 몸이 좀 그랬습니다. 내내 자느라 머리도 엉망이고 땀도 많이 나고 지금부터 씻고 머리 말리려면 최소 삼십 분은 걸리고……. 오빠에게 이런 모습을 절대로 보여주고 싶지 않았습니다. 전이면 몰라도 오빠를 짝사랑하는 걸 알게 된 지금만큼은 그랬습니다.
‘이런 모습은 보여주고 싶지 않아’
내 자존심이 오빠를 보고 싶은 마음을 막았습니다. 게다가 어쩌면 나는 오빠를 좀 상처 입히고 싶었을지도 몰라요. 나는 오빠가 미웠습니다.
[어, 야, 미안하다. 이거 여기 두고 갈게.]
남자친구도 아니면서 전화하고 문자하고 걱정을 해주고,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죽까지 사들고 오는 오빠의 행동이 정말로 많이 미웠어요.
‘다른 여자에게도 이렇게 할까? 친동생같이 느껴지면? 그러면?’
[너무 아프면 전화하고. 어?]
‘내 또래 회사 직원이나 내가 모르는 다른 사람에게?’
‘내가 오빠를 짝사랑하게 된 건 바로 그 분별없는 상냥함 탓이야.’
그 상냥함이 정말로 어쩐지 아주 많이 잔인하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알았어. 월요일에 봐.”
오빠의 말에 나는 인터폰 수화기를 달칵 하고 끊었습니다.
“…….”
그리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어요.
* * *
도하는 죽 봉투를 아파트 문 앞에 두고 돌아갔다.
‘원래 아프면 다 그렇지. 신경질도 나고 머리도 떡 지고 뭐…… 그런 거지. 걔도 여자애니까.’
그날 밤 그리고 밤과 이어진 새벽, 도하는 포도의 태도를 변호하면서도 생각보다도 훨씬 더 절망했다. 생각보다도 훨씬 더.
포도의 낮고 차가운 목소리에서 도하는 깨달았던 것이다.
‘내게 조금이라도 호감이 있다면, 나를 자기가 좋아하는 남자라고 생각한다면 이러지는 않을 거야. 그래. 포도는 날 좋아하지 않는구나.’
그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 운전을 하며 생각했다.
‘걘 날 좋아하지 않아. 왜냐하면 이미 좋아하는 사람이 있으니까. 그걸 내가 모르는 것도 아니었었지.’
이제 도하의 문제는 이것이었다.
‘그걸 다 알고 있었으면서도 나는 왜 이렇게 슬퍼하는가? 가지고 있지도 않았는데 가지고 있던 것을 잃은 것처럼.’
도하의 자존심은 도미노처럼 와르르 무너졌다. 그는 자신의 아파트 앞으로 돌아와서도 한참이나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근처 편의점에서 맥주를 몇 캔 샀다.
‘한심하다. 진짜.’
그리고 아파트 단지 안 놀이터에서 그네를 타며 마셨다. 마시면서 그는 무심코 소름이 돋아난 자신의 팔뚝을 쓸었다.
날이 좀 쌀쌀했다.
금세 비워지는 맥주 캔.
‘야. 난 시발, 내가 이것보다는 좀 더 괜찮은 놈인 줄로만 알았어. 그런데 이렇게 되고 보니 나는, 쓰레기 같아. 사랑을 하면 할수록 한심하고 쓰레기가 되는 것만 같아.’
혼자 북 치고 장구 치다가 이 모양이다. 포도의 사랑을 도와줄 생각도 없었으면서 바람만 마구 피워놓고 착한 척 다 이해해주는 척하다가 닭 쫓던 개 꼴이 되었다.
‘시발, 이렇게 될 거라면 차라리 차라리…… 이동원에게 강도라를 소개해주지 말걸. 한 걸음 물러나서 아예 그들의 관계를 모른 척할 것을. 이 모든 일을 다 지켜보고, 그러고…….’
그러고 난 다음에…… 고백이라도 할 것을.
‘이제 난 어떻게 하면 좋냐.’
이제 와서 후회해도 소용없었다. 이미 자신이 다 망친 것이다.
* * *
낮은 청명해도, 새벽이면 서리가 내리는 계절이 되었다. 어느 날부터인가 포도는 조금 더 쌀쌀맞아지고 도하는 그런 포도에게서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 * *
저는 요즘 그런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채 영글지 못한 감정들. 옷장에 처박힌 옷들, 구깃구깃 접어 버린 마음들, 그래, 다 영글지 못하고 떨어진 꽃과 열매와 마음들. 뱉어지지 못한, 처리하지 못한, 그래서 삼켜버리고 소화되었다고 믿은…….
이뤄지지 않은 짝사랑들은 도대체 어디로 가는 걸까요?
“야, 이동원 실장님 연애하신대.”
“그런데 그 상대가…….”
일은 여전히 바빴고 그러는 와중에 풍문으로 어떤 소문이 실려 왔습니다. 이동원 실장님이 연애를 한다는 소문이요. 동원 실장님의 왼손 약지에 나타난 굵은 반지에 어느 순간 회사가 와글 끓어올랐지만 나는 더 이상 실장님에게 관심이 없었습니다.
‘내가 저 사람을 좋아했었구나.’
그저 난데없이 나타났다 또 난데없이 신기루처럼 사라진 감정이 신기할 뿐이었어요.
‘그럼 이 감정도 그럴까?’
내가 궁금한 건 이제 이것이었어요.
‘오빠에 대한 내 마음도 신기루일까? 어느 순간 사라져 버릴까? 그대로 두면 예전처럼 그냥 그렇게?’
어느 날 오빠가 나를 따로 대표실로 불러냈습니다.
“괜찮냐?”
“뭐 괜찮고 말고 할 게 뭐가 있어.”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웃었습니다. 그러고는 또 할 말이 없어 그냥 가만히 있었습니다.
“…….”
오빠가 김이 모락모락 나는 커피잔을 두 손으로 만지작거렸습니다.
“쌀쌀하다. 곧 겨울이네.”
“오빠. 나 일하러 갈게.”
“포도야.”
소파에 앉은 오빠가 나를 올려다보았습니다.
“미안해.”
그리고 미안해, 하고 먹먹한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 * *
동원 실장님에게 애인이 생긴 걸 알게 된 이상, 오빠와 따로 만나 예행연습을 할 일은 없었습니다. 한두 번 밥을 먹었지만 그것도 이 짧은 가을처럼 끝물이었고…….
“브랜드 웹툰은 여기까지 할게.”
긴긴 외주도 끝이 났어요.
“고생 많았다.”
딱 육 개월 만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