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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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과 같겠지.

    오지랖도 넓고 아주아주 정도 많아서 쓸개도 간도 다 빼줄 것처럼 굴지만 딱 그 정도겠지.

    거기까지겠지. 사랑한다와 좋아한다는 아주 다른 거니까. 오빠에게 나는 아직도 그냥 어린아이일 테니까.

    ‘오빠에게 나는 이런 옷은 꿈에도 못 꿀 어린애일 텐데. 진짜.’

    새빨간 드레스를 앞에 두고 나는 어쩐지 정말로 엉엉 울 것 같았습니다. 새로 나타났다 믿었던 짝사랑은 갑자기 신기루처럼 사라지고, 해묵어 이미 사라졌다고 생각했던 짝사랑이 저 어둠 속에서 해처럼 불쑥 솟아올랐습니다. 그 오지랖 넓은 짝사랑 상대가 내 사랑에 대해 이것저것 조언해 주겠다고 신이 나 있는 바로 이 순간에 말입니다.

    ‘왜 이래. 맨날.’

    나는 어쩐지 오빠의 친절이 갑자기 잔인하게 느껴졌습니다. 희망고문처럼 느껴졌습니다.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왜 사람 헷갈리게 해.’

    그래요, 오빠의 친절에는 늘 어떤 잔인한 면모가 있었어요.

    ‘왜 갑자기 내 앞에 나타나서 그래.’

    동원 실장님 때보다도 더 가망 없는, 그래서 아주 오래 전에 구깃구깃 접었던 짝사랑이 갑자기 활짝 내 눈앞에 펼쳐졌습니다.

    ‘됐어!’

    나는 한참을 그러고 있다 벌떡 일어나 옷장에 옷을 옷걸이에 걸지도 않고 처박았습니다. 평생 내가 이 옷을 입을 일은 없을 것입니다. 나는 그냥 침대에 누워 자기로 했습니다. 원래 내가 가끔 감상적이 될 때가 있어요. 예술가니까요.

    그래 지금 이 감정은 내가 예술가라서 그런 거야. 내가 남들보다 많이 예민하고 그래서.

    그러니까,

    자고 일어나면 이 감정도 가라앉고 모든 게 잊혀 있을 거야.

    잠깐 오빠가 또 착각하게 만들어서 내 감정이 울렁거린 거지.

    이렇게 잘해주는데 도대체 누가 착각을 안 해.

    내 잘못 아니야. 오빠처럼 굴면 누구라도 착각할 거야.

    나는 눈을 질끈 감고 주문처럼 자기변명을 시작했습니다. 그때였습니다.

    삐리릭 삐리릭

    어디선가 전화벨 소리가 울렸습니다. 베개로 얼굴을 가려 보았지만, 아무리 전화벨이 끊기기를 기다려도 제발 좀 받으라는 듯이 끈질기게, 끈질기게 울렸습니다.

    나는 결국 전화기를 들었는데 웹툰 플랫폼 PD님도 아니고 외주 거래처도 아니고 오빠였습니다. 나는 괜히 화가 났습니다. 사실 오빠가 잘못한 건 하나도 없는데도요.

    ‘이 오지라퍼야!’

    그렇지만 무음으로 하고 잠을 자려다 나는 전화를 받았습니다. 계속 신경 쓰여서 더 잠이 안 올 것 같아서요.

    [포도야 왜 전화를 안 받아?]

    오빠였습니다. 이 아무것도 모른다는 목소리.

    “왜?”

    [어?]

    “왜 전화했는데?”

    [아니 뭐 잘 들어갔나 싶어서]

    “잘 들어갔어. 별말 아니면 끊어.”

    [어? 왜? 바빠?]

    “몸이 안 좋아서 그래.”

    [그래? 갑자기? 어디가?]

    내 말에 오빠의 목소리가 원고지에 왈칵 잉크를 엎지른 듯 당황으로 얼룩졌습니다.

    “그냥 내가 안 좋다면 안 좋은 거지. 묻지 마.”

    내 목소리가 점점 사나워지는 것을 나는 막을 수 없었습니다.

    ‘묻지 마.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나한테 이러지 좀 마.’

    “잘 들어갔으니까 끊어.”

    ‘착각하게 하지 마.’

    나중에 생각해보니 내 태도는 참 싹수가 노랬습니다. 그런데 후회도 되지 않고 뭐랄까 그냥 될 대로 돼라 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어차피 내 것도 아닌데, 이제 다 끝났는데 뭐.’

    어차피 동원 실장님과의 짝사랑은 끝났습니다. 목표가 신기루처럼 사라졌는데 더 이상 오빠가 내 연애 코치니 뭐니 자기 소중한 시간 써 가며 헛짓거리 할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과외비도 안 받는 일이었는데 사실은 오빠도 참 좋겠지.’

    그런데 그렇게 생각할수록 우울함은 깊어지는 것이었습니다.

    ‘좋아하지도 않는 여자한테 돈도 안 써도 되고 시간도 안 써도 되고.’

    남자는 자기가 좋아하는 여자를 착각하게 하지 않아.

    남자는 좋아하는 여자에게 시간과 돈을 아끼지 않아.

    그래, 사실 오빠가 잘못한 건 하나도 없는데.

    * * *

    ‘어?’

    전화를 했다가 난데없이 날이 선 포도의 태도를 맞닥뜨린 도하는 안절부절못했다. 다시 전화를 걸까 했지만 정말로 몸이 안 좋은 것 같기도 했다. 피로와 짜증으로 뭉친 것 같은 목소리.

    ‘너무 전화를 늦게 걸었나?’

    그는 손목시계를 내려다보았다. 저녁 9시 반.

    ‘역시 전화를 너무 늦게 걸었나? 아니면 체했나? 새우튀김 때문이었나?’

    그리고 아침. 아침 9시 반. 지금쯤이면 전화를 걸어도 괜찮은 시간이겠다 싶어 전화를 걸었지만 포도는 받지 않았다. 자냐? 도하는 운전하며 생각했다.

    ‘자냐? 남은 한숨도 못 자게 만들어 놓고? 자냐?’

    [깨면 문자해]

    ‘아닌가? 아파서 그러는 건가? 그런데 어디가 아픈 건데? 어? 말을 해줘야 알지?’

    그렇게 문자도 보내봤는데 답장이 없었다. 점심이 다 되는 이때까지도. 도하는 괜히 휴대전화를 들었다 뒤집었다 전원을 껐다 켰다 해보다가 그녀의 블로그로 들어가 보았다. 새로 올라온 게시물은 없었다.

    ‘왜 게시물을 안 올리지?’

    생각해보니 오랫동안 블로그에 글이 올라오지 않았다.

    ‘쓸 글이 없나?’

    그런데 어제 포도 목소리가 왜 그랬지?

    정말로 어디가 아픈가?

    ‘죽겠네.’

    답이 안 나오는 문제로 머리가 터질 정도로 회로를 돌리다 보니 도하는 기진맥진해졌다. 점심을 먹는데 들어가는 전채요리며 회며 구이며 맛이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게 그가 좋아하는 대하며 생선회인데도.

    밥을 사주는 상대방이 말했다.

    “나 도라 씨랑 사귄다.”

    “웩!”

    도하는 먹던 새우튀김을 손에다가 뱉었다. 전기충격기를 가슴에 대는 것과 맞먹는 충격요법에 그제야 그는 현실로 돌아왔다.

    “어떻게?”

    도하가 물수건으로 손을 닦으며 창백한 얼굴로 말했다.

    “어떻게라니?”

    피어나는 꽃봉오리처럼 행복해 보이는 동원이 방긋방긋 웃으며 말했다.

    “후후후후후. 들이댔지. 미친놈처럼.”

    실로 단순하고도 담백한 대답이었다.

    “그러니까 강또가 넘어가?”

    “강또는 또 뭐야?”

    동원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강또라이의 줄임말이었으나 그는 순간 말을 아꼈다. 도라랑 사귄단다. 지금부터 자신이 하는 말이 강또라이에게로 넘어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는 식은땀이 다 났다.

    ‘아니 그나저나 어떻게? 어떻게 니가?’

    “그런데 어떻게?”

    사랑을 쟁취한 자의 얼굴에는 어떤 아우라가 서린다. 그러고 보니 그것이 지금 이동원에게 있었다. 그는 갑자기 동원의 방법이 듣고 싶어서 애가 탔다. 어떻게?

    “도대체 어떻게 꼬셔서 우리 누나가 넘어간 건데?”

    “다시 만난 첫날에 결혼하자고 말했지.”

    “…….”

    “당신을 도저히 잊을 수가 없었다고. 내일이라도 당장 식 올리자고.”

    도하는 할 말을 잃었다. 정말로 미친놈이 아닐 수가 없었다.

    “그래서 도라가 그러재?”

    “아니? 뺨 맞았는데?”

    어찌나 세게 때렸는지 아직도 이가 흔들린다고 동원이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 도하는 그러고 보니 몇 주 동안 검은 마스크를 쓰고 동원이 돌아다니던 것이 기억났다. 도하는 입 밖으로 나오려는 신음을 집어삼켰다.

    ‘우리 누나 가라데 했어. 이 미친놈아.’

    도하가 생각하기론 그것도 누나가 힘 조절한 거지. 정말로 제대로 때렸으면 강냉이가, 아니 이가 우수수 뽑혔을 것이다.

    “그러니까 그냥 솔직하게 말했지.”

    동원은 이가 뽑힐 위기에 처했었거나 말거나 젓가락으로 회를 뒤적거리며 웃으면서 말했다.

    “당신한테 반해서 회사 일 다 정리하고 여기로 날아왔다고. 나 정말 진심이라고.”

    그리고 빙긋이 웃었다.

    “사람 꼬시는 데 방법이 어딨어? 모든 일엔 솔직하게 구는 게 늘 정답이야.”

    “…….”

    “그러니까 너도 그러라고.”

    “…….”

    “강도하? 넌 나한테 그렇게 으르렁대 놓고서, 지금 포도 씨랑은 잘돼 가?”

    “…….”

    “아직도 너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혼자 잘해준다고 착각하고 있는 건 아니지?”

    “…….”

    “혼자서 북 치고 장구 친 다음에 상대방이 알아주지 않는다고 섭섭해하면 진짜 안 되는 거야. 알겠어?”

    도하는 정곡을 찔렸다. 동원의 말에 무언가를 반박하고 싶었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동원의 웃음 앞에서 도하는 그야말로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 * *

    “그리고 도라 씨는 원래부터 나 같은 남자가 취향이었대. 후후후후후후. 정말 도라 씨는 겉으론 강한 척하지만 속은 아주 여린…….”

    ‘나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혼자 잘해준다고 착각하고 있느냐고?’

    그 다음 동원이 신나하며 자기 애인 자랑을 하거나 말거나 도하는 한참이나 그 질문에 대해 스스로 답해보는 시간을 가졌다. 곱씹고 곱씹을수록 쓸개를 핥는 것처럼 쓴물이 입 안에서 배어나오는 것만 같았다.

    ―착각하고, 착각하게 만드는 건 아니지?

    동원의 질문은 도하의 마음에 닿아 변화하기 시작했다.

    ―혼자서 북 치고 장구 친 다음에 알아주지 않는다고 섭섭해하면 안 되는 거야. 알겠어?

    * * *

    띵동. 띵동.

    그날 밤의 일이었다. 도하는 난데없이 포도의 집 앞에 나타나 그녀의 집 초인종을 눌렀다.

    “포도야. 포도야.”

    통통통.

    “포도야. 자니?”

    조그마한 목소리로 물으며 손등으로 철문도 두드렸다.

    “자?”

    아우우우우우.

    마치 지붕 위의 닭을 바라보며 개가 구슬피 울부짖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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