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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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장을 했는데도 눈 밑의 그늘을 감출 수가 없었습니다. 햇살 아래서 나는 나도 모르게 한 번 하품을 쩌억 했다가 입을 틀어막았습니다.

    “입에 파리 들어가겠다. 아. 저 새치고기고기요.”

    오빠가 말했습니다.

    “나는 동백.”

    “예. 그거랑 사이다 두 개 주세요. 아. 미니로요.”

    도시락 주문을 마친 후 오빠가 말했습니다.

    “그런데 너 왜 이렇게 시들시들해?”

    어이없어하는 목소리였습니다. 그야 그렇겠지요. 지금까지 한숨도 자지 못했으니까요. 오빠와 점심에 노닥거리기 위해선 밤을 다 새 작업해야 했었고 또 애초에 잠도 오지 않았습니다. 고민 때문에요.

    “포도야.”

    나 진짜 오빠를 좋아하는 걸까?

    “그런데 진짜 이걸로 충분해?”

    “응.”

    “고로케도 사줄까?”

    “아니.”

    “치킨은?”

    “됐어.”

    오늘 오전 열 시, 나한테 전화해서 뭘 먹고 싶으냐고 묻는 오빠에게 나는 도시락을 먹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포장된 도시락을 받아든 오빠가 내게 말했습니다.

    “오늘 날이 좋다. 공원 가서 먹자.”

    그러고 보니 성큼 하고 가을.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오빠가 어딘가를 빤히 바라보았습니다. 내 손 부근이었습니다.

    “왜?”

    “아냐. 가자.”

    도시락집 근처에는 서울숲이 있었고 거기엔 이걸 먹기에 알맞은 벤치들이 널려 있었습니다. 숲을 향해 천천히 또 별말 없이 걸었습니다. 날씨는 화창했고 살랑살랑 바람이 불어왔습니다. 하늘을 바라보자 가로수 나뭇잎 그림자에 구멍이 뽕뽕 난 햇빛이 보였죠. 걷기 딱 좋은 날씨였어요. 우리는 아무 말 없이 5분을 걸어 공원에 도착했습니다. 산책 나온 사람들, 콘크리트 계단에 앉아 도란도란 이야기하는 학생들, 나무 덩굴이 햇빛가리개를 한 벤치에 앉아 도시락을 꺼내는데 오빠가 말문을 열었습니다.

    “야, 오늘 동원이 왔다. 걔 오늘 내근할 거야.”

    나는 오빠를 바라보며 도시락 뚜껑을 열고 달콤한 소스의 불고기를 입에 넣었습니다.

    “응.”

    “그러니까 이거 먹고 회사 갈래?”

    “아니.”

    나는 짧게 고개를 젓고는 이번엔 묵묵히 밥을 입에 넣고 씹었습니다. 잠깐의 침묵.

    “왜.”

    “됐어.”

    “이거 너 먹어.”

    오빠가 자기 도시락을 열고는 새우튀김을 꺼내 밥 위에 얹어 주었습니다.

    “왜?”

    “너 좋아하잖아. 이거.”

    오빠가 내 밥 위에 놓인 새우튀김을 한참이나 바라보다가 새우튀김 부스러기가 묻은 나무젓가락을 빨며 말했습니다.

    “나 새우 싫어해서 그래.”

    나는 그 말에 내 밥 위에 놓인 새우를 한참이나 내려다보다가 조금씩 먹기 시작했습니다.

    “어이구, 잘 먹는다.”

    고개를 숙인 내 입가가 살짝 떨렸는데 오빠는 보지 못했을 것입니다.

    오랜만에 먹은 도시락에서는 그리운 맛이 났습니다. 고등학교 때 이걸 밥 먹듯이 먹었어요. 어쩐지 그 맛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마들렌처럼 나를 옛 시절로 되돌려 주었습니다. 옆에 앉은 오빠는 3분 만에 도시락을 해치우고는 주인이 일어나기를 기다리는 커다란 개처럼 나를 빤히 바라만 보고 있었습니다. 뺨에 느껴지는 시선.

    “오빠.”

    나는 밥을 먹다 말고 오빠를 바라보았습니다.

    “응.”

    “오빠는 청순한 여자가 좋아? 섹시한 여자가 좋아?”

    “응?”

    “오빠한테는 어떤 여자가 더 예뻐 보여?”

    내 물음에 갑자기 오빠의 얼굴이 화악 하고 붉어지더니 입술이 떨리기 시작했습니다. 오빠는 갑자기 주변을 두리번두리번하더니 당황한 얼굴로 나를 한 번 바라보고는 어쩔 줄 몰라 했습니다. 오빠가 내게 물었습니다.

    “야, 갑자기 그런 걸 왜 물어?”

    “그냥. 궁금해서.”

    “난, 나는 동원이랑 달라. 야, 나는 동원이랑 취향이 하나부터 열까지 다 다르고.”

    “나 실장님 아니고 오빠 이상형 물었는데.”

    “내 이상형이 왜?”

    “그냥. 오빠도 전에 내 이상형 물었잖아.”

    “그건 너 도와주려고 그런 거지.”

    “그래서 말 안 해줄 거야? 나는 전에 말해줬는데?”

    나는 오빠의 까만 눈을 빤히 바라보았어요. 오빠의 눈 안쪽에서 포말이 이는 파도처럼 파문이 이는 것을 나는 보았습니다.

    “그, 음, 어. 나는 좋아하는 여자는 그냥 아니, 아니 그게 아니고…….”

    그런데 오빠는 갑자기 말을 더듬더니 고개를 푹 숙이는 것이었습니다.

    풀썩.

    ‘역시.’

    집에 돌아오자마자 침대에 풀썩 내 몸을 묻은 나는 생각했습니다.

    ‘역시.’

    오빠의 말이 머릿속에서 재생되었습니다.

    ―솔직히 남자 중에 섹시한 여자 안 좋아하는 남자가 어디 있겠어? 나는 육감적인 여자가 좋지. 이렇게 말하면 그렇지만 딱 봐도 여자라는 걸 알 수 있는 그런, 뭐, 그런, 그, 있잖아. 연예인들이 시상식에서나 입을 만한 붉은 벨벳 드레스가 어울리는 여자……. 이번에 그 화제 됐던 그 드레스 입은 배우 ○○○ 씨 말이야. 아니 내가 딱히 그 ○○○ 씨를 좋아한다는 건 아닌데…….

    * * *

    그날 점심, 강도하는 포도에게 묻고 싶었다.

    포도야 포도야

    너는 어떻게 세상에서 제일 예쁘니?

    흰 나뭇잎 무늬가 귀엽게 박힌 남색 면 원피스, 허벅지까지 오는 흰 카디건, 귀여운 갈색 샌들, 가느다란 파랑색 실 팔찌, 포도가 한 것들은 포도가 한 것이라 그런지 하나같이 귀엽고 깜찍하다. 정말 어쩌면 이럴까. 지하철역에서 포도가 걸어오는데 도하는 순간 심장이 떨려 죽는 줄 알았다.

    “오빠.”

    부르며 손을 흔드는데 나이 서른 넘게 먹고 얼마나 심장이 터질 것 같던지.

    ‘나 바보냐. 진짜.’

    재미있게 해줘도 시원찮은데 포도 앞에서 계속계속 말수가 줄게 된다.

    얼굴 잠깐 본 것 같은데 시간이 뭉텅, 또 뭉텅 가 있기도 하다.

    ‘더 맛있는 거 사주고 싶은데.’

    처음엔 왜 도시락을 먹고 싶나 했지만 생각보다 날씨도 좋았다. 밖에서 먹으니 같이 소풍 온 듯한 기분도 들었다. 역시 불러내길 잘했다고, 밥을 먹으며 도하는 생각했다. 포도가 질문을 던지기 전까지 도하는 그저 시간이 좀 더 느리게 흘러갔으면, 점심시간이 영영 끝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뿐이었다.

    ―오빠는 청순한 여자가 좋아? 섹시한 여자가 좋아?

    목소리를 들으니 역시 얼굴이 보고 싶어서 치근치근 동원이 핑계를 대며 포도를 불러낸 도하는 포도의 질문 몇 마디에 패닉이 되었다.

    ―오빠는 이상형 어떤데?

    왜 갑자기 이런 걸 묻는데? 도하는 묻고 싶었다.

    ―말 안 해 줄 거야?

    살며시 치켜떠 자신을 떠보듯 올려다보던 두 눈.

    나는 니가 좋지.

    거기서 니가 좋지, 하고 말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청순한 여자고 섹시한 여자고 다 필요 없고 나는 니가 좋지, 라고 말할 수 있을 리가. 도하는 심지어 포도의 질문에 약간 겁을 먹었다.

    ‘역시 들켰나?’

    잠깐은 그런 생각마저 들었다.

    아까 그때, 도시락 사서 여기까지 걸어오던 때, 손 잡고 싶었다고 생각한 거 들켰나.

    너무 불러내니까 역시 이상한가?

    얘 도대체 무슨 생각인 거지?

    내가 너무 치댔나?

    갑자기 왜 이런 걸 묻는데? 얘가?

    반대로, 아무튼 반대로 말하기는 했는데 사실 뭔 소리를 했는지 하나도 모르겠고. 도하는 정신이 없고 포도의 질문에 휘청거렸다. 혹시나 이 흑심을 들켜 포도가 실망할까봐. 그래서 같이 도시락을 먹는 이런 순간이 다시 오지 않게 될까봐.

    포도는 아무 생각이 없을 텐데.

    분명 아무 생각 없이 ‘그냥’ 질문한 걸 텐데.

    나를 올려다보던 그 맑고 까만 눈엔 어떤 의도도 의미도 없는 걸 텐데도.

    * * *

    한참을 침대에 머리를 묻고 있는데 휴대전화 알림음이 세 번 들렸습니다. 확인해보니 월급이 들어온 것이었습니다.

    ‘백화점 푸드 코트에서 저녁이나 먹을까?’

    집밥도 질렸고 해서 그런 것이었는데, 어쩌다보니 나는 집 근처 백화점으로 가 전이라면 눈길 한 번 안 줄 원피스를 사고 있었습니다. 밥은 안중에도 없이요.

    회사엔 절대로 못 입고 갈, 등이 푹 파인, 마치 누군가 시상식에서 입을 법한, 게다가 비싸기까지 한, 그런 원피스.

    아무튼 어울리지 않아서 한참이나 빤히 바라만 보고 있는데도 점원도 권하지 않았던, 그런 원피스를 말입니다.

    이걸 왜 샀을까.

    ‘반품할까?’

    나는 침대에 그걸 펼쳐놓고 한참이나 그 원피스를 바라보다 바닥에 쪼그려 앉았습니다.

    “하아.”

    나는 그게 내가 쉰 한숨인지도 몰랐습니다.

    “하아아아아…….”

    내가 쉰 한숨이었다는 걸 깨달은 후에 나는 얼굴 껍질이 다 벗겨질 정도로 세게 마른세수를 했습니다. 나도 모르게 찔끔 눈물이 났습니다.

    ‘이게 뭐야.’

    아픈 게 아니라 한심해서요. 잊고 있었던 감정들, 잊은 줄 알았던 감정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때 전화 받지 말걸.’

    그리고 아무리 봐도 내겐 어울리지 않는 옷.

    ‘일한다고 하지 말걸.’

    깜박 까먹고 있었던, 아니 까먹었다고 생각한, 까먹었다면 참 좋았을, 내 사랑의 기원.

    ‘잊는 데 그렇게나 오래 걸렸으면서.’

    잠잠하기에 괜찮은 줄로만 알았습니다.

    ‘헤어 나오는 데 그렇게 오래 걸렸으면서, 정말이지 다시 또 그 안으로 굴러떨어질 줄은 몰랐어.’

    나는 정말로 많이 후회했습니다. 맨 처음 몇 년 만에 걸려온 오빠의 전화에 좋다고 쫄래쫄래 나간 바로 그때부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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