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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도 씨 예뻐졌어요,
어, 나도 그 말 하려고 했는데.
포도 씨 오늘 어디 가?
포도 씨 연애하는 거 아니에요?
나는 같은 팀 사람들에게 부쩍 그런 말을 듣게 되었습니다. 오빠에게 특훈 아닌 특훈을 받게 된 후로 말입니다. 그러니까 남자와 대화하는 법, 또 남자 눈에 예뻐 보이게 꾸미는 법, 밀당하는 법 등등, 이게 진짜로 남자라는 생명체에게 먹히는지 의심스러운 이야기를 오빠에게 한없이 들으며 같이 한강을 걷고 저녁 식사를 하고 가끔은 옷이며 액세서리를 고르러 가게 된 이후의 일이었습니다.
“연애하면 정말 이런 걸 해?”
“그렇다니까?”
선글라스를 낀 오빠가 한강에서 라이딩을 하며 말했습니다.
“진짜로?”
옆에서 자전거를 타며 내가 물었습니다.
“그래, 야, 앞에 똑바로 보고. 조금만 더 가면 내가 잘 아는 맛집이 있는데,”
* * *
“진짜네, 포도 씨 점점 예뻐지네요.”
그동안 이동원 실장님을 아예 안 본 것은 아니었어요. 외근이 많았지만 나도 덩달아 회사에 출퇴근할 일이 많아졌으니까요. 나는 실장님에게도 예쁘다는 소리를 한 번 들었습니다.
“사랑을 먹어서 그런가.”
실장님은 웃으며 그런 소리도 했습니다. 하지만 오빠에게 이런 저런 말을 많이 들은 덕분에, 나는 약간 작금의 상황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어요.
―남자는 말이야. 좋아하는 여자에게는 시간과 돈을 아끼지 않아.
좋아하는 여자는 한 번이라도 더 볼 기회를 놓치지 않아.
남자는 자기가 좋아하는 여자를 절대로 헷갈리게 하지 않는단 말이야.
아. 이동원 실장님은 나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 말입니다.
“실장님 저희 오늘 맥주 한잔 하려는데 어때요?”
“아. 저는 오늘 괜찮아요.”
“왜요? 실장님?”
“오후 9시부터 수영 있어서요. 이틀 전에 등록했거든요.”
어느 날 실장님은 수영을 이유로 회식 자리를 거절했습니다. 만약 이동원 실장님이 나를 좋아했다면 나와 조금이라도 더 같이 있고 싶어서 수영일랑은 포기해 버렸겠지요. 나라면 그랬을 겁니다.
‘음.’
상냥함과 배려가 다 사랑은 아니라는 걸 이제 나는 알았습니다.
‘그렇구나.’
그걸 깨닫게 되자 지금껏 나를 스쳐지나갔던 모든 짝사랑이 그러했던 것처럼 나는 천천히 마음 정리가 되었습니다. 누가 심었는지도 모르게 들판에 핀 한 송이 꽃처럼 혼자 피어난 사랑은, 또 그답게 혼자 지는 법이었으니까요. 이번 사랑은 짧았습니다. 삼 개월도 안 걸린 걸 보면 말이에요. 그런데 문제는……
오빠였습니다.
“왜 전화했는데?”
[그냥]
오히려 이제 헷갈리는 건 오빠였습니다.
[뭐…… 난 너한테 전화하면 안 되냐?]
야심한 밤, 전화를 걸어온 오빠는 투덜거렸습니다.
[나는 너한테 전화하면 안 돼?]
“…….”
아니 그게 아니라…… 나였습니다.
[왜? 동원이인 줄 알고 두근거렸어?]
오빠가 저 너머에서 볼멘소리로 말했습니다. 허, 참, 하고 기가 차다는 듯한 숨소리까지 막 섞어서 말입니다.
“그래서 왜 전화했는데?”
[……그냥. 뭐.]
전화기는 잠시 아무 말이 없었습니다.
[오늘 뭐 해?]
오빠가 물었습니다.
[뭐 할 거냐?]
“…….”
나는 거기에 대고 별말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오빠가 내게 전화를 건 건 오늘이라고는 삼십 분밖에 남지 않은 밤 열한 시 반이었으니까요. 나는 에너지 드링크 두 캔을 옆에 두고 타블렛에 그림을 그리고 있었습니다. 엄청 바빴어요. 오늘도 내일도 쭉 바쁠 예정이었습니다.
[그냥 뭐 있지.]
그런데 바쁘다는 말 대신 여지를 두는 내가 바로 여기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럼 잠깐 나올래?]
“이 늦은 밤중에?”
왜인지 오빠의 헛소리에도 전화를 끊기 싫은 내가 여기 있는 것이었습니다.
‘뭐지? 도대체 뭐지? 뭘 어쩌고 싶은 거지?’
오빠의 전화는 반가운 동시에 반갑지 않았습니다. 전화를 끊고 싶은 마음과 전화를 끊기 싫은 마음이 내 가슴속에서 교차했습니다. 나는 흔들렸고 또 내 태도에 내가 다 헷갈렸습니다.
[누가 지금 보자고 그러냐?]
오빠가 푸스스 웃으며 말했습니다.
“…….”
[오늘, 아니 내일 점심에 잠깐 회사 근처로 와.]
“…….”
[밥 사줄게. 같이 밥이나 먹자.]
나는 눈을 감고 하아 숨을 내쉬며 마치 밤 라디오를 듣는 것처럼 오빠의 목소리를 귀 기울여 들었습니다. 오빠가 말을 하다 말고 물었습니다.
[응? 왜 말이 없어.]
“맛있는 거 사주면…….”
대답을 하는데 어쩐지 목메는 목소리.
[내가 너 맛있는 거 안 사준 적 있냐.]
“…….”
[내가 너 사달라는 거 있으면 그게 해왕성에 있는 거라도 사주지.]
“…….”
[뭐 먹고 싶은데?]
“…….”
[응?]
전화여서 다행이었습니다. 왜인지 점점 와인을 마신 것처럼 얼굴이 붉어지고 있었으니까요.
우격다짐으로 점심 약속을 잡은 후에 오빠는 잘 자 말하곤 전화를 끊었습니다. 전화는 톡 하고 저 멀리서 부드럽게 끊어졌습니다.
그런데 전화를 끊은 나는 뭔가, 끊어진 기분이 들지 않았습니다.
‘어쩌지.’
심지어 왜인지 모르게 나는 울 것 같기도 했습니다.
‘어쩌면 좋지.’
깨달아버렸던 것입니다.
나는 전화를 하다 알았습니다. 나는 이제 더 이상 이동원 실장님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와 생각해보면 자상함과 상냥함에 잠깐 자석처럼 끌렸을 뿐, 이라는 생각마저 들었습니다.
나는 타블렛에 머리를 처박았습니다.
‘어쩌면 좋아.’
그런데 내가 사랑하는 것은…….
‘나 설마…….’
이제 나를 헷갈리게 하는 것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