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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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짝. 사랑.

    몇 년 전 이미 종료된 줄로만 알았던 짝사랑의 쓰나미에 덮쳐진 강도하는 꽤 한심해졌다.

    ‘흐으으…….’

    그는 집으로 돌아와 베개에 머리를 묻은 채 애간장이 토막토막 끊어질 때 나는 소리를 내뱉었다.

    “어흐으으으흐흐흐으…….”

    실제로 소리를 냈다. 그의 뱃속에선 고통으로 정말로 애간장이 토막토막 끊어지는 중이었다.

    ‘내가 그때 왜 그렇게 겁을 먹었을까. 생각해 보니까 왜 그랬을까. 미래에 이렇게 될 줄로만 알았던들 그때 살살 꼬드겨서 유학에……. 아니면 나 너 좋아한다, 사랑한다, 시발, 한 번이라도 미친 척 해봤어야 했는데, 그걸 못해서 지금 이렇게……. 그놈의 선택이 뭐라고! 내가 그때 지 딴에는 머리 굴린다고 이것저것 재지만 않았어도!’

    그러나 실은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상황은 그때도 지금도 정체된 고속도로처럼 꽉꽉 틀어 막혀 있었다.

    ‘포도가 다른 놈을 좋아한다니, 그것도 이동원 그놈이라니.’

    좋아하는 사람의 마음속에 다른 남자가 있다는 생각을 하자 가슴이 곯았다. 그는 베개에 얼굴을 묻고 끙끙 앓았다. 정말, 심장이 아팠다. 무리가 갈 지경이었다.

    ‘어쩌지? 어떡하면 좋지?’

    더 생각하기 싫었다. 생각하면 할수록 한숨이 나오고 마음이 괴로웠다.

    ‘포도가 몇 년이 지나도록 이동원이를 좋아하면 어쩌지? 내가 포도한테 그랬던 것처럼?’

    게다가 아무리 생각해도 그와 이동원이 비슷한 점은 단 하나도 없었다.

    ‘나 지금 무슨 아침 드라마에 나오는 남녀 주인공 간 사랑을 방해하는 그런…… 그런 놈이 된 거 아닌가?’

    그런 식으로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을 따라가다 보면 그저 마음이 슬프고 아프고 밤에 잠도 오지 않게 된 것이다.

    ‘어쩌지. 지금 고백한다 한들 승산이 없을 것 같아. 좋아하는데, 정말 좋아하는데, 죽을 것 같다. 지금까지 도대체 어떻게 참았냐. 한심해. 나는…… 나는 정말 왜 이렇게 한심하냐?’

    별 헤는 밤.

    “강도하 너는 어쩌다 드라마에서 주인공들 갈라놓는 악역 역할을 하고 있어?”

    아니 천장의 벽지 무늬 헤는 밤은 바로 이렇게 시작되었다.

    ‘생각해 보니 기회가 그렇게 많았는데.’

    그는 주책없이 베개에다 찔끔찔끔 새어나오는 눈물을 닦았다.

    ‘이제 또 기회가 있을까?’

    * * *

    한편,

    강도하는 그 자신의 사랑을 쟁취해야 하는 한편 연적 아닌 연적인 동원의 사랑이 이루어지도록 도와주어야 했는데 동원이 요구한 것은 의외로 간단했다.

    “내가 다 알아서 할게. 다리만 놔줘.”

    동원이 후후 웃었다. 그것은 선택의 기로에 섰을 때 늘 자신의 마음이 원해 온 길만 선택해 온 사람만이 지을 수 있는 종류의 미소였다.

    “나 많은 거 바라는 거 아니야.”

    실로 재수 없는 표정이 아닐 수 없었다.

    “만날 기회만 만들어 줘. 기회가 있으면 난 잡을 테니까.”

    그러나 재수가 없다 한들 뭘 어쩌겠는가?

    “어때?”

    그런 이유로 도하는 사랑의 큐피트가 되어주기 위해 현재 협상 테이블에 나와 있었다. 협상 장소는 법무법인 「도원」의 접대실이었다.

    “…….”

    법무법인 도원의 대표 강도라는 길고 웨이브진 머리칼을 검은 폭포수처럼 한쪽 눈이 다 가려지도록 흘러내리게 하고 있었다. 회색 바지 정장을 입은 그녀는 소파에 앉아 다리를 꼬며 팔짱을 꼈다. 그리곤 그의 얼굴을 한참 노려보듯 바라보다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니까 네 말은 우리 회사 광고를 지금 제작해 주겠다고? 이 인건비도 나오지 않을, 거의 무료에 가까운 가격으로?”

    “그렇지.”

    “불어.”

    “뭘?”

    “너 이 새끼 지금 이게 무슨 꿍꿍이속이지?”

    도라가 날카로운 눈을 번뜩였다.

    “네 호의에 숨겨진 진짜 의도가 뭐야?”

    ‘저저, 눈치는 빨라가지고.’

    도하는 뜨끔했다.

    “허, 거 참, 내가 누나 도와줘서 잘될 일이 뭐가 있어? 나 자리도 잡았고 전에 그 광고 소송 건 도와준 것도 있고 해서 그런 거지. 나는.”

    “웃기고 있네. 너랑 내가 언제부터 이렇게 살가운 사이였었어?”

    그냥 대표 등장하는 광고 제작해 준다고 하고 이동원 붙여주면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쪽도 호락호락하지가 않았다. 중매란 게 정말 쉬운 노릇이 아니었다.

    “너 미국 있을 때 소송 도와준 건 너 때문에 내 경력에 금 갈까봐 그런 거지. 너도 알잖아? 뭔데? 무슨 꿍꿍이속인데? 뒤로 털기 전에 좋은 말 할 때 불어, 알았어? 무슨 사고 쳤지 너?”

    “사고는 무슨 사고. 내가 누나한테 진짜 좋은 일…….”

    “지랄 말고, 죽고 싶어?”

    도라의 말에 그는 순간 어이가 없었다. 이유가 있는 건 맞지만, 그래도 그렇지. 광고를 공짜로 만들어 준대도 지랄이야! 지랄이!

    “…….”

    도하는 어쨌든 상황을 타전시키기 위해 머리를 굴렸다. 진짜 여기 온 이유를 말하기에는 지금까지 벌어진 일련의 사건들이 너무도 지난한데다 길었다. 게다가 인당수 심청이 던지듯 도라를 자신의 사랑의 제물로 삼겠다고 도라에게 말했다가는 뺨을 맞을 것이다.

    “그, 그, 빚지기 싫어서 그래! 내가! 빚지기 싫어서! 그때 우리한테 돈도 안 받았잖아!”

    “상대편에게 뜯어냈는데?”

    “어쨌든!”

    도하는 결국 소파 테이블을 쾅쾅 치며 연기를 시작했다.

    “내가 야! 너한테 빚지기가 싫어서 그래! 싫음 말아!”

    “싫어.”

    “아 왜!”

    도하가 미간을 찌푸리더니 꼬았던 두 다리를 풀어 다리를 벌리고 앉았다.

    “안 그래도 광고, 필요했었어. 그리고 너랑 너희 회사, 능력 있는 거 내가 알아. 그러니까 이 가격은 시장논리에 비춰 보면 전혀 공정하지 않지. 너와 나는 혈연이잖아? 혈연이란 이유만으로 뇌물에 가까운 가격으로 광고를 제작해주는 건 옳지 않아. 게다가 정당한 대가를 받지 않으면 아이디어를 내는 창작자의 능률도 오르지 않지. 그러니 네가 광고를 해줄 거라면 기업 대 기업으로 공정하게 해. 가격 올려.”

    도라가 툭툭 잘 정돈된 손톱으로 테이블을 두드리며 말했다.

    “남매 말고 남들처럼 말이야.”

    도라의 말에 도하는 침묵했다. 자신이 아는 이동원은, 좀 가끔 또라이 같은 면이 있긴 하지만 좋은 놈이었다. 사랑을 할 때는 여자한테 어떻게 구는지 몰랐지만 말이다. 어쨌든 양다리를 걸치는 것 같지도 않았고 그래도 사람 대하는 데 진지한 면도 있었고 업무 능력도 출중했다.

    ‘싸게 해준다니까.’

    도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심이 쿡쿡 찔렸다.

    ‘남녀 일은 모르는 거고, 누나 싫으면 누나가 거절하면 되니까. 그렇지?’

    어쩐지 누나를 팔아넘기는 느낌에 도하는 저도 모르게 제 가슴을 문지르며 시선을 피했다. 상대는 강도라, 팔아넘긴다고 팔아넘겨질 정도로 호락호락한 여자가 아니기는 했지만 말이다.

    * * *

    오빠한테 이동원 실장님을 좋아한다고 말한 이후, 나는 어쩐지 한참 동안 실장님을 뵐 수 없었습니다. 하기야 그런 일은 자주 있었습니다. 실장님은 대표님만큼이나 외근을 잘 나가니까요. 우연인 것이겠지요.

    게다가 그에 맞게 나도 좀 바빠졌습니다. 회사에서 디자인 보조뿐만 아니라 광고 회사 안에서 일어나는 이야기를 웹툰 형식으로 그려 홍보하는 일을 따로 시작했거든요. 아, 물론 같은 팀원들 몰래요.

    “포도 씨, 회의실로 와 봐요.”

    그때문에 나는 대표님께 따로 끌려가 작업물을 컨펌 받는 일이 늘었습니다.

    “이거 재미있네. 그런데 지금 우리가 중저가 핸드폰 광고를 하고 있잖아? 다음 번에 그 얘기를 넣었으면 좋겠어서 여기 배경에 작게라도 벽면 포스터 같은 데 있잖아. 핸드폰 포스터를 넣어주었으면 싶은데.”

    “응응.”

    “그리고 이거.”

    나는 노트에 수정할 사항을 하나하나 적었습니다. 수정 사항을 보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오빠가 말했습니다.

    “아, 그 동원이 있잖아.”

    “응.”

    “걔 지금 뭐 해. 그 변호사 사무실 광고인데 그래서 한 달 정도 회사 출퇴근이 좀 어렵게 됐어. 괜찮지?”

    괜찮으냐니 뭐요? 개인적으로는 섭섭하긴 했지만 일이라는데 내가 괜찮고 말고 할 건 없었습니다. 내가 고개를 들어 뭐가 괜찮으냐고 묻는 듯이 오빠를 바라보자 오빠가 시선을 피하며 뺨을 긁적거렸습니다.

    “그동안 나랑 예행연습하고 좋은 거지. 뭐, 음.”

    “…….”

    “니가 초보니까.”

    ‘뭐래요.’

    나는 다시 고개를 수그렸습니다. 오빠는 또 한참이나 말이 없었습니다.

    “다 됐으면 갈까?”

    “오늘 시간 괜찮아?”

    오빠가 머뭇머뭇하며 물었습니다.

    “왜?”

    “아니 너 시간 되면, 행사장이나 같이 가자구.”

    “무슨 행사장?”

    오빠가 가방으로 유명한 명품 브랜드의 이름을 댔습니다.

    “왜?”

    “왜긴, 나 혼자 가는데 심심해서 그러지. 일손도 필요할지도 모르고.”

    내가 아무 말 없자 오빠가 조심스레 물었습니다.

    “바빠? 거기 맛있는 것도 많고 연예인들도 오고 또 선물도 주는데.”

    “오늘은 바빠.”

    “뭐 하는데?”

    “일해야지. 수정사항이 이렇게 많은데.”

    방금 일거리를 이렇게 많이 던져주고 바쁘냐고 묻다니 뭐 하나 싶었습니다. 오빠는 내 일상을 요즘 블랙홀처럼 잡아먹고 있었습니다. 일상툰 작가인데 요즘 내 일상이 없었어요. 일상이.

    “그럼 여기서 해라.”

    “뭐?”

    “아니 여기서 전기 쓰면 좋잖아. 에어컨도 빵빵하게 쓰고. 여기서 해 그냥.”

    “싫어. 요즘은 밤에 추워.”

    “나는 너 좋으라고 그런 거지. 혼자 집에 있으면 심심하지 않아? 내가 일 끝나면 올게. 빨리.”

    ‘지금 나한테 더 일 시키려고 그러나?’

    “여기서 해. 여기서. 응? 내가 맛있는 것도 사올게.”

    오빠는 엉겨 붙듯 턱도 없는 말로 나를 꼬드기기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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