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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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 알았어, 고마워.”

    나는 얼굴이 다 붉어져서 고개를 푹 수그리고 웅얼거렸습니다.

    “나 그럼 이제 나가봐도 돼?”

    “벌써? 여기 앉아봐.”

    그런데 칭찬이 다가 아니었는지 내 말에 오빠가 좀 우물쭈물하더니 소파에 앉기를 권했습니다.

    “있잖아?”

    나는 오빠가 뭔가 우물쭈물 말을 아끼는 걸 처음 보았습니다. 그럴 리야 없겠지만 마치 부끄러워하는 투로 오빠가 말했습니다.

    “오늘 동원이 외근 있어. 여기 안 들르고 출근했다가 퇴근할 거야.”

    “그래?”

    “응. 그러니까 너 오늘 시간 괜찮으면…… 오빠랑 데이트나 할까?”

    “헐.”

    내 입에서 육성으로 헐 소리가 나왔습니다.

    “내가 오빠랑 왜?”

    도대체 동원 실장님이 회사에 들르지 않고 퇴근하는 것과 제가 오빠와 데이트를 하는 것이 무슨 상관이란 말입니까?

    “야, 그게, 뭐, 뭐, 너 바빠? 어?”

    그냥 왜냐고 물었을 뿐인데 오빠는 갑자기 말을 더듬었습니다.

    “뭐, 그게, 너, 너 세이브 원고도 좀 있잖아.”

    “그걸 오빠가 어떻게 알아?”

    요즘 그렇긴 했습니다만 그걸 오빠에게 말한 기억은 없었습니다. 내 물음에 오빠의 입은 순간접착제로 붙인 듯 꽈악 하고 다물렸습니다.

    “어떻게 아냐고.”

    오빠는 두 손을 맞잡고 시선을 내리깔아 시선을 피하더니 물었습니다.

    “아니 그냥…… 파스타 좋아해?”

    “…….”

    “그, 너 내가 저번 주에 옷도 많이 사 줬잖아? 이거 머리 검은 짐승은 키우는 게 아니라고, 내가 밥 한 끼 하자는 것도 싫어?”

    오빠가 갑자기 저번 주에 사준 옷을 들먹였습니다. 나는 갑자기 할 말이 없어졌습니다.

    “내가 오늘 너랑 밥 먹으면서 동원이 뭐 좋아하는지도 말해주고 그러려고 했는데, 응?”

    “그, 응. 알았어.”

    나는 마음이 약해졌습니다. 그도 그럴 게 옷 입으면서 가격표를 좀 봤는데 가격이 하나같이 비쌌거든요. 구두도 그렇고 머리도 그렇고 화장품도 그렇고……. 비쌀 줄은 알았지만 그 정도일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그럼 오늘 밥은 내가 살게. 비싼 걸로 먹자. 파스타? 오빠 그게 먹고 싶어? 내가 맛집 찾아볼까?”

    “아, 안 돼.”

    그런데 내 말에 갑자기 오빠의 얼굴이 창백해졌습니다. 오빠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습니다.

    “내가 살게. 내가.”

    “왜? 아까는, 배은망덕한 짐승이라며.”

    “내가 언제! 그냥 머리가 검다고 했지, 아무튼 안 돼! 오늘 말고 다음에 사! 다음에, 알았지?”

    나는 오빠가 고개를 저은 이유를 그날 저녁에 알았습니다. 그날 오빠는 날 호텔 레스토랑에 데려갔거든요. 메뉴를 확인한 나는 귀 뒤의 솜털이 곤두설 정도로 깜짝 놀랐습니다. 나는 눈을 부릅뜨고 오빠를 바라보았습니다.

    ‘뭐야! 이 0들 뭐야! 이거 몇 개야!’

    내 무언의 생각을 알아차렸는지 아름다운 야경을 병풍처럼 뒤에 둔 오빠가 쩔쩔매며 변명했습니다.

    “아……. 그게 이건 내가 먹고 싶어서. 응?”

    “이걸?”

    “네가 사회생활을 안 해봐서 그런 거지. 이게 나한테는 별로 비싼 것도 아니고 뭐…… 음, 그게, 어? 이게 음, 오빠가 너 밥 한 끼 제대로 먹여주고 싶어서…….”

    누가 들으면 내가 하루에 한 끼도 못 먹는 궁핍한 삶을 사는 줄 알겠습니다. 나는 메뉴판을 소리 나게 턱 하고 덮은 뒤 오빠를 빤히 바라보았습니다.

    “오빠 아무한테나 이렇게 사주고 다녀?”

    아무리 많이 벌어도 이렇게 쓰다간 집안 대들보가 뽑히겠습니다. 고등학생 때 오빠는 도대체 어디로 간 걸까요? 아니 그때도 돈 잘 쓰기는 했지만 그래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사업을 해서 그런가?

    나는 눈을 그대로 부릅뜬 채 고개를 오빠를 향해 기울이며 소곤거렸습니다.

    “어?”

    “응?”

    “오빠 그렇게 돈 잘 벌어? 돈 도대체 얼마나 버는데 이렇게 정승처럼 쓰고 다니는 거야?”

    “나는…… 너, 아니 너 맛있는 거 사주고 싶어서…… 아, 그렇지, 아, 나, 나!”

    오빠의 눈이 갈피를 못 잡은 사람처럼 초점을 잃고 헤매더니 고개를 후르르르륵 저었습니다.

    “나 여기 오픈 때 광고했었어! 이거 DC돼! DC!”

    “얼마?”

    “70%, 그리고 여기 상품권도 있고! 그래!”

    오빠의 말에 나는 메뉴판을 다시 펼쳤습니다. 그리고 주판알을 튕겼습니다.

    ‘부담스럽게, 이 오빠 도대체 이번 주까지 나한테 얼마를 쓰려는 거야?’

    화이트 아스파라거스 스프는 깜짝 놀랄 정도로 맛있었습니다. 오빠는 또 일장연설을 시작했습니다.

    “이게 말이지. 너 이런 경험도 저런 경험도 해보고 그래야지 나중에 진짜 데이트 때 안 놀라지. 남자가 여기 너 데려올 때 마음이 어떻겠어? 가격도 확인 안 하고 널 데려왔겠어? 너 남자가 마음먹고 신경 써서 여기 데려왔는데 네가 지금처럼 굴어봐. 상처 안 받겠어?”

    그럴 듯한 말이었습니다. 나는 순간 아차 싶었습니다.

    ‘그, 그런가?’

    “예쁘다는 말도 많이 듣고 이렇게 좋은 것도 많이 먹어보고 그래야 연애도 잘할 수 있는 거야. 처음부터 수준을 높여야지 나쁜 남자한테 상처 안 받지.”

    ‘그런가?’

    말은 그럴 듯하기도 하고 아닐 듯하기도 했습니다. 어쨌든 오빠가 더 잘 알겠죠. 나는 고개를 끄덕끄덕했습니다.

    “맛있잖아. 그치?”

    끄덕끄덕.

    “일 년에 몇 번은 남자랑 이런 거 먹어줘야지.”

    내 끄덕거림에 오빠의 어깨가 으쓱거렸습니다.

    “오빠는 일 년에 몇 번쯤 이런 거 먹어? 여자랑?”

    “어? 아니이?! 아니이이? 나, 난 깨끗해!”

    오빠의 얼굴이 다시 순식간에 창백해지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습니다.

    ‘깨끗하다니 뭐가?’

    여자와 음식 먹는 것과 깨끗한 것이 무슨 상관이란 말입니까. 그에 대해 물으려는데 굴 위에 사워 크림과 캐비어를 올렸다는 아무즈 부쉬가 나왔습니다.

    “포도야.”

    비싼 데라서 그런지 음식도 조금 나오고 식사 시간이 아주 길었어요. 하나같이 사진을 찍어야 하는 것 아닌가 싶을 정도로 예쁘고 아쉬울 정도로 양이 적어서 입맛을 다시고 있는데 오빠가 문득 물었습니다.

    “응?”

    “너 행복하니?”

    나는 오빠의 말에 고개를 갸웃했습니다.

    “행복?”

    “그래, 행복. 너 지금 네가 원하는 삶을 살고 있잖아. 어릴 때 만화가 되는 게 꿈이었는데 이렇게 좋아하는 거 그리면서 잘 살고 있고, 이제 행복해?”

    오빠의 물음에 나는 곰곰이 생각에 잠겼습니다.

    “글쎄, 응, 아니…… 아니 그게 아니라 엄청 행복하지. 행복하기야 하지. 이 직업에도 물론 나쁜 점이 있지만 그런 거 투정부릴 수 없을 만큼 이 일이 정말 좋아. 아직도 아침에 일어나면 혹시 지금 이 생활이 꿈이 아닌가 싶을 때도 있어. 그런데 그것만으로 해결되지 않는 게 있는 것 같아.”

    말을 하다 보니 어쩐지 나는 울 것 같아졌습니다.

    “나는 외롭고 지금 굉장히 슬픈 것만 같아.”

    “야, 있잖아……. 김포도.”

    “응?”

    “나도 그렇다?”

    그 말에 무슨 꿈에 겨운 소리냐고 할 줄 알았던 오빠가 시선을 빈 접시 위로 떨어뜨렸습니다.

    “내가 말이야. 포도야. 나름 정말 열심히 살았는데 말이야. 그래서 지금 남들 눈에는 아마 성공한 광고쟁이, 혹은 사업가로 보일 텐데 말이야.”

    “응.”

    “나 말이지. 지금 속 빈 강정 같다, 솔직히. 남들이 보면 무슨 복에 겨운 소리 하느냐 하겠지만 지금 내 삶에 뭔가 아주 중요한 게 빠져 있다는 기분이 들어. 포도야.”

    오빠가 그런 말을 하며 물잔을 자신의 입으로 가져갔습니다.

    “그게 사랑인가?”

    “풉!”

    그리고 내 말에 물을 마시다 뱉었습니다. 오빠가 허겁지겁 냅킨으로 입을 닦더니 물었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아니 정말 말이야. 오빠.”

    나는 진지하게 말했습니다.

    “나 말이야. 그림으로 먹고 살면 정말로 행복할 줄 알았거든. 더 바랄 게 없을 줄 알았거든. 그런데 막상 이렇게 되니까 그게 그렇지가 않아.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야. 퇴사까지 하고 이 일에 도전했고 나름 자리도 잡았는데 그게 끝이 아니더라고. 목표에 도착하면 종료되는 마라톤 시합 같은 게 아니더라고.”

    “…….”

    “LIFE IS GOING ON AND GOING ON 이라고 하잖아. 오빠. 산꼭대기에 도착한 줄 알았는데 또 능선을 따라 산이 있고 또 산이 있고, 나 솔직히 힘들어서 더는 못 걷겠고 또 외롭고 울적하고 그래. 내 삶에 도대체 무엇이 부족한가 생각을 해봤는데 그게 나는 역시 사랑 같더라고. 오빠 생각에는 어때? 내 삶에 빠져 있는 건, 사랑인가?”

    내 말에 오빠의 얼굴은 와인을 마신 듯이 붉어졌습니다.

    “그래서 네가 생각하는 사랑이 뭔데?”

    “잘 모르겠다.”

    나는 그냥 웃어버렸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오빠의 얼굴이 진지해졌습니다.

    “포도야. 나는 그게…….”

    오빠가 테이블에 올린 손에 턱을 괴더니 한숨을 푹 쉬었습니다.

    “해주고 해줘도 더 해주고 싶은 마음이라고 생각해.”

    “…….”

    “난 그렇더라. 보고 있으면 뭔가 주고 싶고 또 주고 싶고 그래. 그게 그러네.”

    진심이 묻어나는 음성이었습니다. 나는 오빠의 말을 들으며 실장님을 떠올렸습니다.

    내가 그 사람한테 줄만한 게 무엇이 있을까요? 그 사람은 내게 너무 완벽해 보여서 더 보탤 필요가 없어 보였습니다.

    ‘내가 누군가에게 도대체 뭘 줄 수 있을까? 내가 무엇을 주어서 누군가를 행복하게 해줄 수 있을까?’

    “포도야. 밥 나왔다.”

    “어?”

    그런 고민을 하고 있는 사이에 또다시 음식이 나왔고 화제는 다른 것으로 전환되었습니다.

    하나하나는 양이 작다 싶었는데 막상 코스 요리가 끝나니 놀랄 만큼 배가 불렀습니다. 디저트는 만개한 꽃 모양의 산딸기 소스를 뿌린 초콜릿이었습니다. 달콤했습니다. 한 스푼 떠서 입에 넣으니 순간 눈이 반짝 하고 떠질 정도였어요.

    ‘으음!’

    “내 것도 먹어.”

    그걸 보더니 오빠가 입도 안 댄 자신의 디저트를 내게 스윽 하고 내밀었습니다.

    “오빠는?”

    “나 단 거 싫어해서 그래. 너 먹어.”

    그날 밤 날이 너무 좋아서 우리는 식사를 마친 후 호텔 근처의 커다란 인공 호수를 거닐었습니다. 아이스커피를 손에 들고요.

    “그런데 있잖아.”

    “응. 포도야.”

    “오빠는 연애 안 해?”

    “어? 나?”

    “응. 오빠도 연애할 때 됐잖아. 안 해?”

    “나는 뭐…… 나는 일이랑 결혼했고 뭐…… 바쁘기도 하고. 그게 인연이 나타나면 자연스레 되는 그런 거지. 어떻게 그걸 때 됐다고 하냐? 그건 아니지.”

    “그러게. 오빠한테 인연 나타나면 빨리 결혼해야지.”

    쿨럭쿨럭!

    커피를 먹다 사레가 들렸는지 오빠는 입을 막고 피를 토할 정도로 심하게 기침했습니다.

    “괜찮아? 손수건 줄까?”

    어느새 무더위도 지나가고 살랑살랑 바람이 불었습니다. 어쩐지 여름이 안녕 하고 떠나가는 느낌이 들었어요. 나는 고개를 쳐들고 사라져가는 여름의 냄새를 맡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호숫가라 물 냄새가 났습니다.

    “아. 맞다.”

    오빠가 갑자기 바지 주머니를 뒤적거렸습니다. 레스토랑에 뭔가를 두고 왔나 싶어서 고개를 갸웃하는데 오빠가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 내밀었습니다.

    “이거 내가 너한테 주려다가 잊어버렸는데.”

    반짝.

    오빠의 손 안에서 무엇인가가 가로등 불빛을 받아 빛났습니다. 조그마한 비닐 봉투에 담긴 작은 귀걸이였습니다.

    “이거 비싼 거지?”

    내가 경계하며 물었습니다.

    “아니이이? 무슨. 그냥 길거리에서 산 거야. 봐봐. 비싼 걸 이런 데다 담아 주겠냐?”

    오빠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습니다.

    “진짜야. 믿어.”

    그리고 그걸 내 손에 쥐여줬어요.

    집에 돌아오는 길에 문득 이렇게 입고 오길 잘했네,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도 꾸미고 오기를 잘했네.’

    덕분에 데이트도 했잖아요. 식사는 맛있었고 이야기도 시답잖지만 재미있었습니다.

    “잘 들어가. 집에 들어가서 카톡 하고. 응?”

    “알았어. 알았어.”

    오빠가 집 앞 주차장에서 나를 들여보내며 말했습니다.

    [잘 들어왔어. 오늘 정말 재미있었어. 고마워.]

    나는 집에 들어가자마자 카톡을 보냈습니다.

    ‘어?’

    그리고 세수를 하기 전 나는 화장대에서 오늘 받은 귀걸이를 두 귀에 달아보다가 오늘 우리가 연애와 사랑에 대해선 이야기를 했어도, 오빠도 나도 동원 씨에 대해서는 하나도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 * *

    푸욱.

    집으로 돌아오는 길. 어쩐지 차가 막혔다. 도하는 혼자 된 공간 안에서 푸욱 푸욱 기차 연기 뿜어내듯 한숨을 내쉬었다.

    “이게…… 잘 안 믿네. 뭘 해주고 싶어도 이상한 데서만 눈치만 빨라져가지고.”

    혼잣말도 했다.

    ‘전에는 구형이라고만 하면 다 믿더니, 이제는 무슨 회사 세무사처럼 굴어.’

    좋은 데 데려가면 좋아할 줄로만 알았는데 혼이 잔뜩 났다. 어릴 때는 뭘 사줘도 좋아하더니, 서울 데리고 가주는 것만 해도 얼굴이 활짝 하고 펴지더니만.

    ‘부담스러웠나? 잘해주고 싶은데 이젠 뭘 해줘야 잘해주는 건지 모르겠고, 쟤도 머리 크고 나도 생각이 많아지니까, 후……. 아무튼 저렇게 예뻐 가지고 어떡해? 다음엔 어떻게 꼬드기나. 길거리 데리고 다니면서 떡볶이라도 먹여야 되나?’

    도하는 머리를 하도 많이 굴려서 이젠 터질 것만 같았다.

    ‘아. 의식하니까 더 안 되네, 안 돼. 도대체 우리 포도는 응? 왜 이렇게 예쁘냐?’

    머리는 사실 이미 과부하가 났다.

    사실 아무리 생각을 해도 그 끝이 한 결론만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는 게 당연했다.

    ‘너무 예뻐. 정말로 의식 안 하려고 해도 너무, 너무 예뻐.’

    도하의 머리는 이미 이성이 아니라 감성에 지배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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