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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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치 해병대 구호 외치듯 이 세상에서 내가 제일 예쁘다는 구호를 외치고 나니 견딜 수 없는 자괴감이 몰려왔습니다. 내 얼굴이 다 벌게졌습니다.

    ‘창피해!’

    혹시 누군가 들은 것은 아닐까요? 나는 얼굴을 감싸 쥐고 마구 괴로워했습니다.

    ‘미쳤나 봐. 이게 뭐야. 진짜.’

    달칵

    “가 봐.”

    차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하루 세 번 거울 보고 외쳐. 양치하듯이. 알겠어?”

    오빠가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나는 대답도 않고 종이가방들을 든 채 휑 하고 달려 나갔습니다. 등 뒤에서 오빠의 목소리가 또 들렸습니다.

    “우리 김포도가 세상에서 제일 예쁘다아!”

    “그만해! 사람들 듣는다고!”

    나는 아주 저 주둥이를 꼬매 버리고 싶었습니다.

    * * *

    이거 생각해 보니까 연애 코치가 아니라 나 놀리려고 그러는 거 아니야 진짜?

    * * *

    그런데 말이에요. 막상 숨을 헐떡이며 집에 돌아오니 말이에요. 현관에 가방들을 우수수 떨어뜨리고 거친 숨을 몰아쉬며 운동화를 벗는데, 머리 위에서 센서 등이 켜지고 무심코 현관 앞 전신거울에 비친 나를 바라보니…….

    ‘아.’

    세상 예쁜 여자도 그렇게 예쁜 여자가 없었습니다.

    ‘와아.’

    열두 시가 넘었는데도 그 모습은 사라지지가 않았어요.

    거울 안 나를 바라보는데 나는 다른 의미로 심장이 팔딱팔딱 뛰었습니다. 이번에는 누군가에 의해 강제가 아니라 진심으로 그런 소리가 나왔습니다.

    “와. 진짜 예쁘네. 김포도.”

    그 순간이었습니다. 핸드백 안에서 핸드폰 진동음이 울린 건. 나는 휴대전화를 확인했습니다.

    [포도야]

    오빠로부터 온 문자였습니다.

    [네가 내 동생이라서 하는 말이 아니라 너 예뻐. 객관적으로 봐도 네가 최고야. 최고. 내 눈에는 그래. 이 안목 높은 내 눈에도 그런데 다른 남자 눈에 안 그러리라는 법 있어?]

    ‘얼씨구.’

    나는 피식 웃어버렸습니다. 나 공부 가르칠 때도 오빠는 이렇게 꿀 바른 말로 살살 꼬드겼거든요.

    ―너 머리 나쁜 거 아니야. 어? 네 머리가 얼마나 좋은데? 다들 몰라도 너 어릴 때부터 봐 온 나는 알지. 넌 <도둑과 경찰> 할 때도 남이 안 숨는 기상천외한 곳으로 숨어서 이 오빠가 너 잡느라 얼마나 고생……

    그때 당시 나는 얼마나 순진했던지. 나는 한참이나 휴대전화를 바라보다 다시 핸드백에 집어넣고 현관에 우수수 떨어진 쇼핑백들을 집어 들었습니다.

    ‘오빠가 도대체 뭘 샀나.’

    그날 밤 나는 쇼핑백 안의 옷들을 다 확인해 보았습니다. 입어도 보았습니다.

    ‘와.’

    겉으로만 보면 나와 어울릴까 싶은데 막상 입어보니 맞춤옷인 양 착 달라붙었어요. 예쁘고 또 입기도 편했습니다.

    ‘예쁘네.’

    한참이나 거울에 이리저리 나를 비춰보는데 아까 말이 정말 맞는 것도 같았습니다.

    ‘나 생각보다 훨씬 예쁘네.’

    짝사랑을 할 때마다 늘 내가 못나 보이고 작아 보이기만 했는데요. 그런데 오빠의 말에 마력이 있던 건지 아니면 오늘 이렇게 잘 꾸며서 그런 건지 정말로 그렇게 생각되는 것이었습니다.

    * * *

    억지로 구호를 시킨 뒤 차 문을 열어주자, 너무 놀렸는지 얼굴이 다 붉어진 포도는 양손 가득 짐을 들고 도망치듯 달려갔다. 포도가 시야에서 사라지자마자 도하의 얼굴은 붉어졌다. 그렇다. 이젠 도하의 얼굴이 붉어질 차례였다. 포도가 사라지자마자 그의 얼굴은 도수 높은 코냑을 입에 털어 넣은 것처럼 되었다.

    ‘아오.’

    그는 핸들 위로 얼굴을 푹 처박았다.

    ‘아오. 아오.’

    빠앙.

    ‘아오오오오오!’

    그는 소리 없는, 그러나 늑대의 울부짖음을 닮은 내적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왜 이렇게 예쁘냐!’

    빠아아아앙.

    ‘왜 이렇게, 응?!’

    주차장에 난데없는 경적음이 울려 퍼져나갔다.

    ‘정말이지 지가 예쁜 걸 지만 몰라. 아주.’

    그도 그렇다. 안 꾸며도 그렇게 예쁜데 꾸미니 또 얼마나 예쁜지. 도하는 그날 포도를 데리고 다니며 저만 모르는 남자들의 시선을 다 확인하고 으르렁거리는 데 온 정신을 다 쏟았다.

    ‘겁나 예쁘네. 도대체 언제 이렇게 큰 거야 진짜? 사내들 눈 다 삐었나. 나라면 정말, 내가 여건만 되었으면 진작……!’

    옷을 사주니 구두도 사주고 싶고 화장을 시켜주니 머리도 해주고 싶고 또 이것도 해주고 싶고 저것도 해주고 싶고, 어찌나 해주고 싶은 게 많던지 도하는 머리가 다 팽글팽글 돌 지경이었다. 사실 오늘 도하는 많이 절제한 것이다.

    더 해주면 이상하게 보일까봐, 연애를 도와주는 동네 오빠 같지 않고 껄떡대는 늑대처럼 보일까봐, 사실 옷 좀 눈앞에서 더 입어보라고 하고 싶었는데……. 그게 좀 그렇지 않은가?

    ‘그나저나…… 나중에 기분 나빠 하는 거 아니겠지?’

    많이 그렇다. 변태 같을 거 같다.

    ‘아. 모르겠다. 옷 그거 마음에 안 들어 하면 어쩌나. 하기야 아무리 예뻐도 자기 타입이 아닌 옷은 마음에 안 드는 거니까. 포도는 아직도 옷을 편하게 입고 다니는 걸 좋아하니까 구두는 눈대중으로 봤는데 사이즈는 맞으려나? 영수증도 같이 줬어야 했던 건가?’

    그는 술에 취한 기분으로 집에 돌아왔다. 다시 하면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도대체 왜 이렇게 횡설수설했는지. 아. 등신같이. 나이 서른 넘게 먹어서 왜 이렇게 등신 같냐고!’

    강도하는 왜인지 자책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더 잘할 수 있었는데.

    더더 잘할 수 있었는데.

    포도 앞에서야 연애에 대해 잘 아는 척, 뭔가 있는 척 있는 힘껏 허장성세를 부렸지만 그도 그동안의 연애 경험 무색하게 오랫동안 솔로였던 데다 진심이니 뭘 어찌할 수 없는 것이다.

    * * *

    그는 그날 침대에 누워 생각했다.

    ‘지금 내 포지션은 동네 오빠.’

    마치 등을 맞대고 반대편을 바라보는 것처럼 가까우면서도, 연애 상대로는 아주 먼 위치였다.

    ‘차라리 그냥 아무 사이 아니었던들 뭐 어떻게 질러 버리는 건데.’

    포도가 그냥 거래처에서 만난 꼬맹이라면, 길 가다 툭 하고 어깨 부딪치며 만난 사이라면, 그도 아니면 소개팅에서 만났거나 뭐 그러면……. 도하는 생각을 거듭하다 점점 침울해졌다.

    ‘난 늘 기회를 잘 붙잡는 놈인 줄로만 알았는데, 나 정도면 멋지고 잘나고, 어? 그런 줄로만 알았는데.’

    그는 베고 있던 베개를 목에서 빼 자신의 얼굴 위로 푹 덮었다.

    ‘나 지금 왜 이렇게…….’

    어쩐지 식은땀이 흐르면서 눈물이 찔끔 맺힐 것도 같았다.

    ‘한심하냐?’

    * * *

    다음 주.

    나는 회사에 출근하는 아침 화장품 쇼핑백에서 화장품을 꺼내 화장을 시작했습니다.

    삐뚤빼뚤.

    ‘안 되는데?’

    눈썹에서부터 어색한 느낌이 들더니 입술에 이르러서는 더해졌습니다.

    ‘어제처럼은, 안 되는데?’

    나는 엄마 화장대에서 화장품을 훔쳐 바르는 어린아이가 된 느낌이었습니다. 어제 아티스트분은 마이더스의 손을 가지고 있었던 걸까요? 아니면 내 손이 지나치게 곰손인 걸까요?

    ‘그냥 다시 세수하고 비비나 바를까?’

    마법은 그날로써 수명이 다한 모양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꽤 오래간다 싶었던 마법은 결국 신기루처럼 일주일도 되지 않아 자취를 감춘 것입니다.

    ‘으아, 꽤나 아픈데?’

    그날 저녁 집에서 잠깐 위에 올라가 ‘오, 편한데?’ 하고 생각했던 건 크나큰 착각이었습니다. 운동화만 신던 발이 뮬을 편하게 받아들일 리가 없었어요. 지옥철에 낑겨 가는데 발목이 지끈거려 나는 후회했습니다.

    ‘아. 그냥 운동화 신을걸.’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려고 회사에 이걸 신고 간단 말입니까.

    어색한 화장, 어색한 옷, 어색한 구두.

    ‘역시 괜히 이러고 왔나 봐.’

    회사에 일찍 출근한 나는 의자에 앉아 컴퓨터를 켜고는 주변을 이리저리 바라보았습니다. 너무 일찍 왔는지 아직 출근한 팀원은 보이질 않았어요. 실장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으응.’

    그것만으로도 어쩐지 바보가 된 느낌이었어요. 나는 시무룩해졌습니다. 누가 나더러 꾸미고 오라고 한 것도 아닌데 나 꾸민 걸 봐주지 않는다고 이렇게 침울해질지 나는 몰랐습니다.

    그때였습니다.

    “힉!”

    머릿속 생각으로 어지러워하고 있는데 누군가 내 어깨에 손을 올려놓은 것은. 나는 고개를 올려 위를 바라보았습니다. 오빠였습니다.

    “포도 씨? 잠깐 내 방으로 와 봐요.”

    오빠가 나를 내려다보더니 씨익 하고 그 커다란 입으로 웃었습니다. 양 입술 끝이 귀에 걸려라 하고 말입니다.

    “그래, 이렇게 입고 다니니까 얼마나 좋아?”

    도대체 사장실로 불러 무슨 말을 하려나 했더니.

    “우리 포도, 오늘 정말 예쁘다.”

    내가 사장실 문을 닫자마자 오빠가 실실 웃으며 말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순간 내 얼굴이 다 붉어졌습니다.

    “이렇게 하고 다니니까 얼마나 예뻐. 어? 계속 이렇게 하고 다녀. 이렇게.”

    “무슨 회사에서까지 장난을 치고 그래?”

    나는 얼굴이 다 화끈거려 오빠의 말을 농담으로 넘기려 했습니다.

    “장난? 내가 무슨 장난을 쳐?”

    그런데 오빠가 감정을 듬뿍 담아 진지하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려고 이런 말을 하는데? 나 지금 장난으로 말하는 거 아니야.”

    나는 그만 말문을 잃었습니다.

    “우리 포도 참 예쁘다. 진짜 너무 예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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