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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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펑.

    짐작은 이미 하고 있었으나 포도의 대답을 들으니 도하의 머릿속에는 폭탄이 터진 것 같았다. 원자폭탄 수준이었다. 도하의 머릿속에 버섯구름이 피어올랐다.

    ‘짝사랑할 시간을 뭐 얼마나 줬다고, 아직 두 달도 되지 않았잖아. 아니 두 달은 넘었나? 두 달. 이제 두 달인데. 아니 어떻게……?’

    도하의 머릿속은 마구 헝클어졌다. 포도가 물었다.

    “나 실장님 좋아해. 그러면 안 돼?”

    “…….”

    “사내연애한다고 나 쫓아낼 거야?”

    놀라서 얼굴을 붉히지도 않고 그런 거 아니라고 손사래 치지도 않고 포도는 단정한 얼굴로, 포도의 대답에 그만 침묵해버린 도하를 바라보았다.

    “뭘 어쩌려는 건 아니야. 그냥 좋아하기만 할게.”

    그러니까 오랫동안 그녀를 짝사랑해왔고 이제 와서는 고백할 기회만을 노리고 있었던, 남들 보기에는 꽤 근사한 남자를 향해 포도가 말했던 것이다.

    “좋아하기만 할 거야.”

    “…….”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그녀의 집에 가 문을 두드리며 어느 로맨스 영화처럼 사랑 고백이 담긴 스케치북이라도 들이댔어야 했던 것일까?

    도하는 실의에 빠져서 아무 말도 못하고 가만히 포도를 바라보았다.

    사랑은 타이밍인데 그걸 놓쳤다.

    또.

    그렇다. 사랑은 타이밍이다. 노력한다고, 누가 더 먼저 좋아했다고 해서, 되는 일이 아니었다.

    ‘너, 내가 더 먼저 좋아했어.’

    꿀꺽.

    ‘나도 너 좋아해. 내가 훨씬 더 너 먼저 좋아했다고. 아냐? 야, 사실 우리 회사에 들어오라고 한 것도 내가 너 얼굴 한 번 더 보려고 이렇게…….’

    도하는 목구멍까지 넘어와 입 안에서 넘실거리는 말을 꿀꺽꿀꺽 집어삼켰다. 거절당할 걱정 때문이 아니었다. 그런 말을 한들 아무 소용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도하는 소비자의 감각에 민감한 사람이었다. 지금 와서, 그런 식으로 고백해봤자 아무 메리트가 없다.

    메리트. 이미 선발주자에게 푹 빠져 있는데 후발주자가 사용할 수 있는 전략은 무엇인가.

    ‘네거티브 전략이라도 사용할까? 그놈 게이라고, 유부남이라고? 여자가 막 여럿…… 아냐. 이건 내 발목 잡는 일이지. 시발. 이건 아냐. 아니고, 아닌데, 아, 아아…….’

    “야. 포도야. 너 한번 잘 생각해봐.”

    그의 머리가 해결책을 찾기 위해 팽팽 도는 동안 그는 아무 말 대잔치를 시작했다. 말이라는 것은 참 힘이 있어서 이대로 그에게 제 마음을 고백한 포도를 돌려보냈다간 그녀의 감정은 걷잡을 수 없이 커질 것 같았다. 안 됐다. 그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야, 넌 말을 안 해서 모르겠지만 내가 너 땜에 회사까지 정리하고 돌아왔는데!’

    이대로 칼도 못 뽑고 끝낼 수는 없었다.

    “우리, 우리 회사 사내연애 안 돼. 인마. 그게 왜 그러냐면…….”

    “오빠가 무슨 생각하는지 알아.”

    포도가 무릎에 두 손을 올린 채 담담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나 회사에 분란 안 일으킬게. 고백할 생각도 없고 티 낼 생각도 없어. 그냥 조용히 좋아만 하겠다고.”

    ‘야! 그게 안 된다고!’

    그게 안 돼 인마! 그는 주먹을 꽉 움켜쥐고 이를 악물었다

    ‘니가 뭘 알아!’

    “크흡.”

    그는 고뇌하는 얼굴로 주먹을 이마에 대었다. 분명 이를 꽉 물었는데 신음을 막을 수가 없었다. 핸들에 그대로 이마를 처박고 싶었다.

    ‘니가 뭘 아냐고…….’

    죽고 싶었다.

    넌 내 마음을 몰라.

    전혀 몰라. 니가 뭘 알아?

    몰라. 인마. 몰라! 몰라!

    야. 시발, 이제 와 말하지만 내가 너 얼마나 좋아하는데. 나 진짜, 너 사랑한다고…… 씨이발, 난 막 시작한 풋풋한 풋사랑도 아니란 말이야. 그놈의 자기부정 때문에 푹푹 썩은…… 야, 내 마음은 막 문드러지고…… 근데 넌 다른 사람 좋아한다고 그러고……. 아, 진짜. 아아.

    내 잘못이지만, 모두 다 내 잘못이지만 말이야.

    내가 그래도 너 얼마나 많이 좋아하는데 그땐 니가 너무 어려서 내가 손도 못 대고,

    그러다 보니 이게 이렇게…….

    침묵.

    장고의 시간.

    그는 그 와중에도 돌파구를 생각해내려고 갖은 애를 썼다. 그러니까 후발주자로서(사실 시작은 7~8년 전에 했으니 더 미칠 노릇이었지만) 이미 마음 속 우위를 점한 선발주자를 제칠 묘수를 말이다. 그의 얼굴은 벌게졌고 머리는 모터 돌아가듯 돌았다.

    윙윙윙윙윙!

    아주 열이 오르고 머리에 모터 도는 소리가 날 정도였다. 그는 얼굴이 시뻘게져서 말했다.

    “야.”

    포도는 움찔했다.

    “내가, 그 내가…….”

    “…….”

    “내가 도와줄까?”

    “응?”

    도하의 말에 포도의 머리 위로 물음표가 떠올랐다. 도하가 그 말만 내뱉고 그만 침묵해버리자 포도가 물음표 가득한 얼굴로 되물었다.

    “응?”

    “내가 그…… 연애, 짝사랑, 그거 도와주겠다고, 어?”

    도하가 팔뚝에 핏줄이 설 정도로 핸들을 꽉 쥔 채로 말했다.

    그렇다. 장고 끝에 나온 자충수였다.

    “오빠 좋다는 게 뭐야? 나한테 맡겨.”

    아, 자살골이에요~!

    어느 유명한 축구중계 해설가의 목소리가 호언장담을 하는 도하의 머릿속에서 들리는 듯했다.

    “어? 아니……. 싫은데?”

    포도가 당황한 얼굴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싫어. 나 그냥 혼자 좋아하겠다니까.”

    “왜!”

    도하는 다급해졌다.

    “너, 이 감정, 이 감정이 얼마나 소중한 건지 알아? 이게 인생에 몇 번 온다고, 뭐 해보지도 않고 그걸 그냥 흘려보낼 거라고? 야. 너 제정신이야?”

    그는 일장연설을 시작했다.

    “너 내가 말이야. 이 분야에서는 내가 전문가야! 전문가!”

    마치 클라이언트에게 PT하는 것처럼.

    ‘아오!’

    언뜻 보면 미친 자충수였지만 도하에게도 생각은 있었다. 그런 일 있지 않은가. 짝사랑 상담을 하다가 이야기를 들어주는 상대가 더 좋아지는 일. 친구에게 연애 고민을 말하다가 연애 상대가 그 친구로 교체되는 일 말이다. 도하는 그녀의 짝사랑 상담 상대가 되어주고 괴로운 마음을 들어주고 그 마음 안으로 파고들어 자리를 차지할 생각이었다.

    도하의 연설에 포도의 얼굴이 알쏭달쏭하게 변했다.

    “정……말?”

    “그래 야. 너 오빠 좋다는 게 뭐냐.”

    물론, 좋을 리 없다. 도하의 마음에서 주르륵 피눈물이 흘렀다.

    “아니, 그렇지만.”

    포도가 도하의 기세에 눌려 더듬거렸다.

    “아니, 음…… 저기 좋아하기는 하는데 그냥 좋아하는 거고, 내가 이 실장님 상대가 될까. 나 그 음, 저기, 응. 나는 실장님한테 그냥 이 나이에 알바하는 여자애로 보일 거고…….”

    “상대가 안 되기는 뭐가 안 돼. 네가 얼마나 이쁜데.”

    도하의 진심 가득 담긴 말에 포도는 머리를 긁적거리다 머뭇머뭇 웃었다.

    “정말로 그렇게 생각해?”

    ‘응, 그렇게 생각하지. 시발, 걔 그거 아무것도 아니야. 야, 니가 얼마나 이쁜데. 내 눈에. 어? 넣어도 안 아플 것 같고. ……야. 내가 너 좋아해. 사랑한다고.’

    도하는 다시 목구멍까지 울컥하는 말을 꾹 참았다.

    “그래.”

    “싫어.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비행기 태우지 말라는 듯 포도는 머쓱하게 우물거리다 문득 물었다.

    “저기. 그런데 오빠.”

    “어.”

    “나 실장님 좋아하는 줄 어떻게 알았어?”

    헤헤헤헤헤. 포도가 그제야 마음을 놓은 듯 편하게 웃었다.

    “…….”

    도하는 할 말이 없었다.

    그렇다. 흐른 시간이 몇 년인데.

    포도는 도하가 그녀의 블로그를 까맣게 잊어버린 줄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도하는 포도를 바라보았다. 이리 보고 저리 봐도 그가 자신의 블로그를 아직도 볼 리 없다고 단단히 믿는 얼굴이었다. 그 말간 얼굴에 대고 나 네 블로그며 웹툰이며를 매일매일 정주행, 역주행한다고 말할 자신이 도하에게는 없었다.

    그게…… 있었으면 그냥 고백을 했지.

    “…….”

    집에 돌아온 도하는 씻고 목욕가운을 입고 침대에 앉았다. 그리고……

    ‘와아아아아악!’

    킹 사이즈의 침대 위에서 발버둥 치며 소리 없이 발악하기 시작했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악!’

    * * *

    오늘 일을 잊고 싶어 눈을 감을라 치면 헤헤헤헤 하고 웃는 포도가 떠올랐다.

    ―나 실장님 좋아하는 거 어떻게 알았어?

    번쩍!

    그는 설핏 잠들려 했다 떠오르는 기억에 어둠 속에서 눈을 번쩍 떴다. 꿈이었나 싶지만 현실이었다. 도하는 결국 잠들지 못하고 침대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밤새 반곱슬머리를 쥐어뜯으며 생각했다.

    ‘그래, 해보자! 해보자고!’

    포도가 연애 과외가 필요하다면 해줄 생각이었다. 단, 정말로 연애가 이루어질 경로는 단단히 막아두고 말이다.

    ‘아오…….’

    정공법을 사용하는 걸 포기했으니 그는 후발주자로서 할 수 있는 모든 걸 할 생각이었다. 그러니까 야합이나 권모술수 뭐 그런 것 말이다. 도하는 디자이너 이전에 기업 하나를 이끄는 사업가이기도 했다. 그리고 의외로 이 부분에서도 재능을 발휘했다.

    그는 구질구질하고 치졸하고 비겁하든 말든 자신이 쥔 것은 모두 사용할 생각이었다.

    “야.”

    강도하는 다음 날 아침 이동원을 사장실로 불렀다.

    “나 김포도 씨, 아니 김포도 좋아해. 그냥 호감 있고 그런 거 아니야. 사랑한다고.”

    그리고 다짜고짜 말했다.

    “어? 나 걔 칠 년째 짝사랑중이야. 그래서 나 한국 돌아온 거고 포도 여기로 데려온 거야. 그러니까 건드리지 마. 나랑 척질 생각 없으면 절대로 그러지 마. 알겠어?”

    아니 으르렁거렸다고 해야 옳다.

    “…….”

    그런데 원래대로라면 무슨 말을 하느냐고 웃어야 할 동원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강도하.”

    이름을 한 번 부르고 그는 한참 답이 없었다. 긴장감 넘치는 침묵이 흐르고 동원은 한숨을 쉬며 머리칼을 쓸어올렸다.

    “나는…….”

    그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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