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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칵.
플랫폼 웹툰 담당 PD님에게는 이미 오전에 작업물을 보내놓았습니다. 웹툰의 업로드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빈 화면의 컴퓨터를 바라보았다가 워드 창을 하나 띄워 놓았습니다.
쓸 말이 있긴 한데…… 타자기에 두 손을 올려놓고 나는 한참을 머뭇거렸습니다.
“…….”
글을 쓰는 일은 실상 글을 쓰는 일보다 글을 쓰기까지 머뭇거리는 일로 이루어져 있는 것 같습니다. 나는 결국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때는 여름.
달각달각
아이스커피를 만들면서 나는 머릿속으로 내가 할 말과 할 말 사이에 있는 어떤 간격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하아.’
나는 다시 자리에 앉았습니다. 커피를 몇 모금 마시고 심호흡을 한 다음 자맥질하듯 글을 썼어요.
「짝사랑에 대하여」
손이 멈춰 같이 멈춰선 커서가 다시 깜박였습니다. 나는 다시 심호흡을 하고 천천히 나의 마음에 대해 써내려가기 시작했습니다.
「마음에 드는 사람이 생겼다. 회사를 다니며 생긴 일이다. 그런데 아주 오랫동안 바라고 있었던 일이었으면서도 나는 이 변화에 당황했다. 왜」
타닥타닥
「왜냐하면」
타닥타닥
「그것이 짝사랑이든 아니든 사랑을 쉬는 동안 나는 나도 모르게 상상하고 기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는 게 일상툰이라고 해도 거기서 나를 가감 없이 보여주는 건 아니었습니다. 여러 부분이 나인 것을 알 수 없도록 베일로 가려져 있었고 각색된 부분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내가 낳은 것은 아무리 부정하더라도 어쩔 수 없이 나였습니다. 나의 생각과 나의 삶이 어쩔 수 없이 작업물에 녹아들어 갔습니다.
그리고 나는 그 일을 좋아했어요.
예전엔 설정집이 필요할 정도로 방대한 판타지를 그리기도 했는데 이 일을 하고 에세이를 쓰다 보니 나는 나를 드러내는 일을 생각보다 아주 좋아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다음 번 사랑은 이전의 사랑들보다 더 찬란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저번의 사랑이 추레했으니 나는 전보다 좀 더 잘난 사람을 만나 전보다 더 사랑받을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정말이지 간절히 괜찮은 사람이 짠 하고 나타나서 나를 오랫동안 좋아했다고, 나만을 기다려 왔다고 고백해주기를 바랐다. 온몸이 녹아내릴 정도로 나를 사랑해주고 또 내가 예쁘다고 한없이 속삭여주기를 바랐다.」
‘그래, 이번 걸 거절했으니까 다음에 오는 건 더 좋은 것이어야 해, 하고 생각했나 보다.’
나는 글을 쓰며 깨달았습니다.
‘꼭 이루어져야 한다고, 지금까지의 아픔을 보상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나 보다.’
「그런데 다가온 것은 이룰 일 없어 보이는 짝사랑이었다. 다음 번엔 내 상처받은 자존심을 치유해줄 만큼 대단한 남자가 나를 졸졸 쫓아다닐 줄 알았는데, 백마 탄 왕자님처럼 나타나 무릎을 꿇고 내게 사랑 고백을 할 줄 알았는데.
예고 없이 다가온 짝사랑은 또 나를 주눅 들게 했다.
나의 처지, 나의 외모, 나의 삶 같은 것을 다시 뒤돌아보게 했다.
나를 또 작아지게 했다.」
나는 사랑을 하게 되면 사랑 이야기를 쓰고 싶고 연애를 하면 연애 이야기를 쓰고 싶고 결혼을 하면 결혼 이야기를 쓰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내게 돌연 닥쳐온 짝사랑에 대해서 내가 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고 싶었습니다. 다른 사람은 어떤 생각을 할까? 내 생각에 대해서 어떻게 받아들여 줄까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이 글을 쓰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아, 쓰니까 더 부끄럽네.’
그러니 회사원 모두가 내가 웹툰 작가라는 걸, 또 속마음을 아무 생각 없이 죽 써 내리는 블로그를 운영하고 있다는 걸 몰라서 얼마나 다행인지요. 아무에게도 할 수 없지만 나를 모르는 사람 모두에게 할 수 있는 소통의 공간이 있어서 참 다행이었습니다.
「기대감이 꺾인다는 건 슬픈 일이지만……」
뭐 그래도 내일이면 밤에 쓴 글을 부끄러워하며 게시글을 내릴지도 모르지만요.
「……나는 이 일을 그냥 일어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싶다. 갑자기 떨어진 날벼락이라고 생각하기보다는 선물이라고 받아들이고 싶다. 그렇다. 나는 이 마음을 선물처럼 받아들이고 싶다.」
달칵.
나는 결국 내가 쓴 글을 블로그에 올렸습니다. 퇴고를 하지 않은 날것이어서 그런지 엉망이었지만 고치지는 않기로 했습니다. 그게 내 진심일 테니까요.
‘하.’
그렇지만 잘 모르겠어요. 역시나 잘 모르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나는 그래도 나의 마음에 솔직해지고 싶었으니까. 요즘은 이 생각으로 가득하니까 이 주제로 한번 말해보고 싶었습니다. 남들이 들어주었으면 싶었습니다.
‘그래, 누구를 좋아한다고 해서 꼭 그 사람과 사귀어야 하는 건 아니지.’
아무튼 인정하니 편해졌어요.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것만으로도 나의 마음은 등불을 켠 듯 환해졌습니다. 오랜만에 어둔 방의 스위치가 켜지는 기분이었습니다. 살아있는 기분이란 게 이런 것일까. 나는 오랫동안 잠들었다가 깬 사람 같았습니다. 난데없이 깨워져 조금은 어리둥절하고 온몸이 뻐근했지만, 창밖으로 비치는 햇살을 기분 좋아해 하는 그런 사람이요.
‘이것만으로도 좋다.’
그 글이 내 감정의 배출구였을까요. 어쩐지 후련해진 마음이 되어 나는 생각했습니다.
‘그래, 뭐 어쩔 거야. 나 그 사람 좋아해. 고백은 안 할 거지만. 그러면 많이 상처받을 것 같으니까. 사실 이루어진다고 해도 어떻게 해야 할지는 잘 모르겠고. 모르겠다 진짜 뭐 어떻게든 되겠지.’
그런데 후련해진 건 후련해진 거고 뭐 구질구질한 짝사랑은 그대로였던 것입니다.
* * *
인정.
그래도 인정은 크나큰 힘을 가져왔습니다. 인정이라고 해도 ‘음, 그렇군’보다는 ‘그래, 뭐 어쩔 거야’에 가까웠지만. 인정하고 나니 뭐 그냥 그렇게 되었습니다. 돌을 누른 듯 무겁던 마음은 한결 가벼워졌고 어느 순간 외면하고 싶어 고개를 돌리던 실장님을 스스럼없이 바라볼 수도 있었습니다.
나는 역시 내 마음을 깊이 들여다보기를 잘했네,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동원 실장님의 옆얼굴을 훔쳐보며 몇 번이고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음, 나 이 사람을 좋아하네.’
그런데 일주일 뒤의 일이었습니다.
‘흠. 오늘도 새벽별을 보며 퇴근하는군.’
“너 이동원 좋아하니?”
야근 뒤, 회사 일이라는 게 돈은 많이 주지만 그만큼 일도 많이 시키고, 좋아하는 사람 보는 거 아니면 다닐 낙이 없었겠네, 생각하며 안전벨트를 푸는데 오빠가 말을 걸었습니다.
“…….”
나는 오빠의 차에서 내리려다가 우뚝 멈춰서 오빠의 얼굴을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단 세 마디였지만 그건 내 마음을 추궁하는 듯한 말투였습니다. 실장님에게 호감 있다고 말하던 직원에게 아서라 하고 손사래를 치던 대리님처럼 그러지 말라는 듯한 눈빛이었습니다. 오빠를 바라보는데 내 눈에 담긴 오빠의 눈이 조금 흔들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돌멩이를 던져넣은 호수처럼요.
“포도야, 그래?”
도대체 어떻게 안 것일까요?
“응.”
난데없는 물음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나는 놀랍도록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나 실장님 좋아해.”
나는 오빠의 얼굴에 대고 말했습니다.
“그러면 안 돼?”
* * *
“…….”
도하는 침묵했다.
‘어. 안 돼.’
그런데 그 순간 사실 도하는 그렇게 대답하고 싶었다.
왜냐하면 그는 성과주의자였고, 지금 하는 짝사랑이 꼭 이뤄져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안 돼. 진짜 안 돼.’
포도를 아주 많이 사랑하고 있었으므로.
‘왜냐하면 내가 너를 좋아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