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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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생은 많은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었지만, 그래서 도하는 원한다면 그 무엇도 될 수 있었지만, 반대로 그 가능성 중 어느 하나를 택한다는 것은 나머지 전부를 잃는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가 원하던 모든 걸 손에 움켜쥐었다고 생각한 이때 나타난 포도가 그러했다. 탐스러운 포도송이가 그에게 손짓했다.

    ―지금까지 쌓아올렸던 모든 걸 버려.

    그의 인생은 지금 이렇게 근사한데도 다 놓으라고 말했다.

    ―나를 만나러 와.

    그를 그린 그림 위에서 웃는 얼굴을 한 그녀가 속삭였다.

    알아.

    나를 사랑하고 있잖아.

    털썩.

    도하는 빛바랜 그림 앞에서 다리에 힘을 잃고 풀썩 주저앉았다.

    ‘항복이야.’

    그건 뭐랄까, 그럴 수밖에 없었다…… 라고밖에 설명할 수밖에 없는 순간이었다.

    ‘항복이라고.’

    * * *

    그런데 그녀의 삶은 그녀의 코찔찔이 유년 시절, 그리고 과외를 하던 일 년간 그와 살짝 교차되었을 뿐이고 이미 한참이나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사귀지 조차 않은 여자를 위해 여기서 코피 쏟으며 이룬 모든 걸 버리고 한국으로 돌아가라니 정말이지 어불성설이었다. 미치지 않고서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강도하는 좀 미친놈이라.

    ‘항복하면 되잖아.’

    다 죽은 화분에 물을 주는 짓 같은데도 도하는 그러기로 했다. 다시 말하자면 그럴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말하면 이상하지만 자신은 원래 이런 놈 아닌가 싶기도 했다. 하기야 그런 인간이 아니었다면 2년간의 과학고등학교, 3년 반의 대학 생활을 버리고 여기로 오지 않았을 것이다.

    ‘시발. 이건 말도 안 돼. 시발. 시발. 시발. C-BAL! X같은 세상아!’

    물론 단숨에 그래! 그러자! 한 것은 아니다. 또 수많은 자기부정의 시간이 있었다. 그놈의 자기부정. 도하의 인생은 삶 - 운명과의 만남 - 자기부정 - 지금까지 쌓아올렸던 삶 무너뜨리기 - 운명의 성취 - 또 다른 운명과의 만남 - 자기부정으로 이어지는 뫼비우스의 띠였는가 보았다. 그래도 이번엔 3개월, 전보단 짧았다.

    ‘아. 씨발. XXX, XXXXX, XXX, 진짜.’

    도하는 드디어 완전히 백기를 들었다.

    ‘한국으로 돌아가야겠다.’

    그래, 간다. 가, 가면 되잖아.

    * * *

    그래서 도하는 또 자신의 삶을 무너뜨리기로 했다. 이번엔 뭐랄까, 노력만으로 되는 일이 아니라 자신이 없었지만, 그간의 블로그 염탐으로 포도의 짝사랑이 몇 년 전 끝났고 지금은 열심히 일만 하고 있을 뿐이라는 정도는 알고 있었다. 뭐 스토커 같다고? 남들 보라고 올려놓은 게시물 보는 게 불법은 아니잖는가?

    ‘아니 뭐 다들…… 다들 그러잖아?’

    도하는 사실 거의 사년간 그곳에서 한국에 올라오는 비정기적인 블로그 게시물에 정성스럽게 댓글도 달고 있었다. 사실, 그렇게나 멀리서 촉수를 한껏 뻗고 있었으면서 지금까지 잊어버린 척했던 것이 꽤 용하다 싶었다.

    아무튼.

    ‘지금 이 감정을 무시했다간 아주 뼈저리게 후회하게 될 거 같아.’

    김포도가 신포도가 아니라는 걸 인정하는 순간이었다.

    * * *

    자기부정의 시간이 많이 길어서 그렇지 한번 결단을 내리면 인간 불도저인 강도하는 회사를 정리하는 과정에 들어갔다. 그래 봤자, 임원은 단 네 명이었다. 도하는 책상에 걸터앉은 채 노타이 셔츠 단추를 툭툭 푸르며 말했다.

    “다음 달부터 한국에 지부 만들 거야. 그리고 난 거기로 간다.”

    “왜?”

    마이클이 물었다.

    “향수병이 생겼거든. 누구 따라갈 사람?”

    “나. 나. ME.”

    말은 했어도 누가 따라갈까 싶었는데 한 사람이 즉각 손을 들었다. 도하는 눈을 둥그렇게 떴다.

    “네가 나 따라간다고?”

    “응, 왠지 모르지만 너 가는 곳엔 재미있는 게 있을 것 같거든. 나 지금 좀 굴국밥 땡기기도 하고.”

    그 말을 한 것이 지금 기획실장 이동원이었다. 한국으로 유턴하는 이유가 굴국밥 때문이라니 미쳐도 단단히 미친놈이라고 도하는 생각했지만 생각해 보면 자신은 오 년 전 과외 해줬던 고등학생 때문에 간다. 뭐 그래도 창업멤버 중 3명 중 한 명이 따라간다니 꽤 든든했다.

    “한국에 가면 셋 이상 있을 때 존댓말 써라.”

    “응, 알았어.”

    이 얼굴 말끔한 생또라이는 눈을 빛내며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나중에 도하는 이 미친놈을 데려가는 걸 좀 후회하게 되는데 그건 앞에 말했다시피 미래의 일이라 지금 알 수가 있겠는가. 도하는 동원을 데리고 한국으로 날아갔다.

    * * *

    행운의 여신은 아직 그의 편인 모양이었다.

    혹시나 자리 잡지 못할까 걱정했지만 그 걱정은 기우였다. 한국에서는 외국에서 받은 상이 굉장히 먹어준다는 것을 도하는 이곳에서 사업을 하며 깨달았다. 상이 상금 말고도 이리도 도움이 될 수 있을 줄이야. 그는 잇달아 대기업의 광고를 수주했고 마음껏 실력을 뽐냈고 사옥을 사들일 수 있었다.

    그렇게 몇 년. 도하는 드디어 포도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게 처음 서울 왔을 때보다 훨씬 더 두근거렸다.

    “여보세요?”

    “…….”

    목소리를 듣는데 도하는 심장이 쿵 했다.

    쿵.

    “어. 야. 오랜만이다.”

    오랜만에 목소리를 들었을 뿐인데. 케케묵어 먼지가 쌓여 이제 과거가 되어버렸다고 생각했던 감정이 확 하고 일어나 그를 덮쳤다.

    ‘내가 너 보고 싶었어.’

    “나 도하야. 강도하.”

    도하는 두근거리는 심장을 애써 억누르고 포도를 꾀어 첫 약속을 잡았다.

    ‘진짜 보고 싶었어.’

    오랜만에 만난 포도는 도하에게는 어쩐지 연예인 같았다. 매일 휴대전화와 모니터 너머로 보던 포도는 그의 앞에서 살아 숨 쉬는 어엿한 어른이 되어 있었다. 안경도 벗었고 흰 운동화에 푸른 셔츠, 커다란 꽃이 프린트된 흰색 긴 치마를 입고 있다. 그 모습이 믿기지 않은 동시에, 아직도 포도가 좋다, 고 말하는 자신이 거기 있었다.

    야, 반갑다.

    반가워.

    진짜 반갑다.

    마음 속 또렷한 목소리에 도하는 안심했다.

    ‘내가 페도필리아가 아니라 네가 포도라서 좋았던 거지.’

    진짜 너무 보고 싶었다. 포도야.

    그의 나이 서른셋, 포도 스물일곱.

    “밥은 먹고 다니니?”

    첫 만남에 아무것도 모르는 척 퉁명스레 물었지만 도하는 사실 안부를 묻기 전부터 포도에 대해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심심하면 늘 읽던 것이 그녀의 블로그였으니까. 그리고 포도는 자신의 하루 일과를 남들 다 보는 공간에 세세하게 적어놓고 또 그걸 그림으로 그리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보고 싶었어. 그러지 않은 척했지만 진짜 지금 네 얼굴 보니까 살 것 같다.’

    그러나 도하는 어디까지나 일감을 물어온 동네 오빠의 태도를 견지하며 속으로 포도에게 말을 걸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척. 그냥 이제야 여건이 되어 연락이 된 척.

    ‘정말 정말 보고 싶었다. 포도야.’

    “너 내 회사에서 일 좀 해라.”

    그도 그럴 게 처음부터 ‘포도야. 내가 오랫동안 생각해 봤는데 우리 결혼할까?’하고 말하면 정말 미친놈 같지 않은가.

    * * *

    지금 와 생각해 보면 네가 고등학교 시절이었던 때부터 내가 널 좋아했다고.

    오랫동안 봐 왔지만, 바로 그때 내가 너한테 첫눈에 반한 거라고.

    * * *

    도하는 예전에 쌓았다면 한결 쉬웠을 썸을 타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했다. 그래도 그 전엔 높은 허들처럼 보였던 것들이 도하에겐 이젠 쉽게 넘을 수 있는 조그마한 장난감 블록처럼 보였다. 예를 들면 나이. 직업. 그리고 앞으로의 미래 같은 것.

    그런데 포도는 그렇게 생각지 않는지, 처음에 갑자기 훅 다가가면 놀랄 것 같아 퉁명스레 굴었던 것이 어쩐지 역효과였던지, 야근은 좀 시키지만 매일매일 집 앞까지 태워줘, 같이 저녁도 먹고, 밥도 먹이고 커피도 먹는데 관계는 좀처럼 진전될 줄 몰랐다.

    ‘이렇게,’

    도하는 매일 집에 와 얼굴을 붉혔다.

    ‘아니…… 이렇게 좋아하게 될 줄은 몰랐지.’

    이렇게나 나이를 먹었는데, 포도를 보면 곧바로 대학생 때로 돌아가게 된다.

    심지어 그 시절에도 여자를 못 꼬셔본 게 아닌데 왜 자신은 다른 사람에게 그러는 것처럼 상냥해지질 못하는지 여전히 퉁명스러운 동네 오빠처럼 구는지 도하는 이해할 수 없었다. 긴장해서 그러는 건지, 프리젠테이션 때 나오는 유머러스함, 카리스마 이런 걸 포도랑 있을 때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천상 광고쟁이인데, 게다가 알맹이도 이렇게나 근사한데, 포도에겐 자신을 잘 포장해 팔 수가 없었다. 막상 얼굴을 보면 떨리고, 얘기를 듣고 있는 것만 해도 좋고 그래서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는 게 고작이었다.

    게다가 포도는 얼굴에 감정을 잘 드러내는 스타일이었다. 포도는 그를 여전히 성질 나쁜 동네 오빠로 생각하는 게 분명했다.

    ‘야. 너 내가 너 옛날에 컴퓨터도 사주고 타블렛도 사주고 영화도 보여줘 연극도 보여줘 서울에 있는 대학도 보내 줬는데.’

    도하는 좀 억울하고 그랬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기르던 개도 4년이면 종종 얼굴 잊어먹는다. 원래 삶이란 다 그런 것이다.

    * * *

    이제 와 뭘 어쩌겠는가. 어느 날 도하의 휴대전화에 그녀의 웹툰과 블로그 새 글 알림이 동시에 떴는데, 그걸 본 도하는 망연자실했다.

    * * *

    포도가 사랑에 빠졌다.

    그것도 아마…… 이동원과.

    ‘뭐, 이동원?!’

    도하는 어깨와 목의 솜털이 쭈뼛 하고 섰다. 물론 올리는 글에도 그림에도 각색이 되어 있었지만 강도하가 상대를 모를 수는 없었다.

    포도의 마음은 그렇게 난데없이 떡 하고 모든 사람 보라며 올라와 있었다.

    아주 제목까지 멋들어지게 붙여져서 말이다.

    <짝사랑에 대하여>

    도하는 모니터를 뒤흔들며 외쳤다.

    “아, 안 돼!”

    쩍, 하고 믿는 도끼에 발등을 찍히는 순간이었다.

    * * *

    다음 날 출근하자마자 도하는 득달같이 동원을 불렀다. 동원은 요즘 대기업 회사의 청량음료 광고 프로젝트에 참가하느라 회사에서 아예 사는 중이었다.

    그럼에도 말끔하고 멀쑥한 얼굴. 외모에서부터 밀린다. 도하는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한 적 없었는데 사장실로 걸어 들어오는 동원을 보고 처음으로 분노가 치밀었다.

    질투심이었다.

    “동원아.”

    “왜?”

    “소개팅 시켜줄까?”

    “음?”

    그것은 일이 바빠 퇴근도 못하는 이동원이 강도하에게 돌았냐고 되물을 수밖에 없는 물음이었다. 하지만 동원은 그런 미친 소리를 내뱉는 도하를 한없이 빤히 쳐다보았다. 그리고 눈은 그대로 둔 채로 입만을 움직여 빙긋 웃었다.

    “지금은 생각 없는데?”

    “왜?”

    “왜냐면…… 좋아하는 사람이 있으니까.”

    동원의 말에 도하는 눈에 띄게 동요했다.

    “누구. 그게 누군데.”

    도하의 등골에 식은땀이 흘렀다. 둘의 눈빛이 진검을 겨누는 것처럼 챙, 하고 교차되었다.

    “말 안 할 거야. 아직은.”

    이동원 실장은 비릿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말 안 한다는 건 내가 아는 사람이라는 거야?”

    도하가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비밀이야.”

    !

    동원의 의뭉스러운 미소에 도하의 머리 위에 느낌표가 떴다.

    장난이 아니다.

    도하의 머릿속에 경고음이 울렸다.

    ‘아, 안 돼!’

    그간의 경험으로 도하는 알고 있었다. 사람에겐 취향이라는 게 있고 둘의 취향은 마치 영혼의 쌍둥이처럼 무섭도록 일치한다는 것을.

    ‘야! 안 된다고! 이 새끼야!’

    도하는 마음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 * *

    한편.

    ‘역시, 얘 따라오면 좋은 일 있을 줄 알았지.’

    도하의 정신상태가 포도를 앞에 두고 장장 5년간 뫼비우스의 띠를 그리고 있을 적에, 동원은 제 친구이자 사업 파트너가 그러거나 말거나 잘 살았다. 그의 머릿속은 사실 꽃과 꽃 사이를 건너다니는 나비와 같았다. 그의 삶은 놀랍도록 심플했다.

    즐거운 것을 하고 먹고 싶은 것을 먹고 하고 싶은 것을 한다. 당장. 인생은 그러라고 있는 게 아닌가. 동원에게 자기부정이란 존재하지 않았고, 일단 무엇을 하겠다고 마음을 먹으면 즉시 행동에 움직였다. 게다가 그는 뚝심도 있었다. 시도하고 안 되어도 몇 번이나 문을 두드리고 또 부딪쳤다.

    그런 그가 사랑에 빠진 것이다.

    ‘좋은 일 있을 줄 알았어.’

    어쩌면 제 임자를 만났다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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