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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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강도하 스물여섯, 김포도 스물.

‘스물여섯.’

강도하는 그토록 원해왔던 입학신청서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내가 서울에서 디자인을 공부하는 스물여섯 학생이고 네가 스물이었다면.’

삶이란 그런 것이다. 질서정연하게 나무토막을 쌓아 올려 높은 탑을 만들면, 그래서 남들이 보며 우와, 하게 만들면, 그래서 ‘야, 나 좀 잘난 놈이잖아?’ 하고 코끝이 우쭐해지면 바람이 불어와 툭 하고, 그것을 건드린다.

그러면 견고하게 보이던 그 탑이 와르르 무너진다.

그런 일들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는 게 인생이었다.

툭.

와르르.

도하에게도 그런 바람이 불어왔고, 그 산들바람에 얼핏 봐선 견고해 보이던 탑의 일부가 와르르 무너졌고, 도하는 무너진 탑에 가려져 있던 무지개를 보았다. 그게 도하에게는 디자인이라는 것이었다.

보는 순간, 흑백이었던 삶을 총천연색으로 바꿔버릴 만한 무지개.

도하는 열아홉 포도를 만나기 일 년 전 이미 그 일을 한 번 겪었다.

도하가 디자인에 푹 빠지게 된 것은 스물넷 겨울의 일이었다.

* * *

스물네 살 겨울, 그는 연합 동아리 모임에서 만난 친구 방에 놀러간 적이 있었는데 친구가 놀면서 끙끙거리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왜 놀면서 끙끙대느냐고 물었다. 친구는 노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공부하는 것이라고 했다. 공부해야 하는데 정말 안돼서 죽겠다고. 방은 동그란 구체 모형이며 색색깔의 잡지를 오려 놓은 것이며 도면 같은 것들이 늘어놓아져 있었다.

―이게 뭔데?

―행성 모형 과제 만들기 하는 거야.

친구는 한숨을 푹 쉬었다.

―뭐? 이게 공부라고?

‘이렇게 쉽고 재미있어 보이는데?’

강도하는 황당했다. 그는 그렇게 디자인과 만났다. 아니 디자인이란 것이 자신의 삶으로 걸어 들어와, 나 예쁘지? 하고 말했다.

나 예쁘지? 사랑스럽고 같이 있으면 재미있겠지? 나랑 같이 놀면 좋겠지? 하고.

도하는 엉겁결에 응, 하고 대답했다. 그러고 나서, 친구에게 물었다.

―이런 걸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데?

확실히 재미있어 보이기는 하니까 처음에는 취미로만 하자, 하고 자신을 다잡으며 그는 대학의 산업 디자인 학과 수업을 난데없이 교양으로 신청했다. 그 일이 삶의 진로를 바꿔놓을지도 모르고 말이다. 도하는 난데없이 전공으로 꽉 찬 시간표에 디자인 수업을 추가했고, 수업을 듣는 그 순간 깨달았다.

‘아. X됐다.’

X됐다고. 취미로만 할 생각이었는데 너무 재미있어서 뭘 어찌할 수가 없다고.

그렇지만 아주 뒤늦게 돌이켜 생각해보니 책도 그런 것만 읽었더랬지. 몇 시간이고 헌책방을 돌아다니며 화보집을 디자인 서적을 그래픽 책을 샀더랬지. 아마도 더 예전부터 좋아하고 있었는데, 무시하고 싶었는가 보다. 좁고 험한 길이니까. 더 편하고 큰 길로 자신은 걸어갈 수 있었으니까.

공학도가 되는 길과 광고 디자이너가 되는 길, 꿈은 양립하고 있었다. 둘 다 선택할 수는 없다.

결국 그는 휴학 신청을 하고 나름의 포트폴리오를 준비해서 고향에 내려왔다. 그리고 부모님 앞에 그걸 펼쳐놓았다.

“저 디자인 공부를 하려고요. 그동안 제가 뭘 잘하는지는 알아도 뭘 좋아하는지는 몰랐는데 바로 이게 제 길인 것 같습니다.”

그는 사실 부모님을 설득시키려 이곳에 내려온 것이었다.

“내년에 미국으로 유학 갈 생각입니다.”

뉴욕비주얼아트스쿨 입학이 그 첫걸음이었다. 그것은 지금까지 걸어온 가도를 불태우고 전혀 다른 세상으로 나아가는 일이었다.

* * *

그런데 부모님을 설득하며 디자인을 공부하려던 그 일 년 중에 도하는 포도를 만났다.

‘억.’

소리가 안 나올려야 안 나올 수 없었다. 일 년 후에 유학을 가야 하는데, 언제 돌아올지도 모르는데,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내가 좋아하는 일로 돈을 벌 수 있는지 없는지도 알 수 없게 되었는데 무턱대고 과일 이름을 한 꼬맹이를 그는 좋아하게 되어버린 것이다. 차라리 제대로 공학도의 길을 걸어가고 있었다면, 조금 덜 고민했을지도 모르겠다. 기다리기만 하면 되었을 테니까.

포도가 익기를.

그러나 일은 이미 벌려놨고, 양손에 떡을 쥘 순 없었다. 디자인을 위해 싫어하지 않았던, 잘하고 성과도 있었던 기계공학을 포기했듯이, 하나 쥐었다면 또 하나 놓아야 했다.

그리고 하나는 멀리, 하나는 또 가까이 있었다.

* * *

포도가 수능을 치르고, 또 대학 합격을 하고, 머리도 지지고 볶으며 놀러 다니는 동안 도하에게도 입학신청서가 왔다. 그가 선택한 곳은 그래픽 디자이너 키스 해링을 배출해낸 국제적인 디자인 대학교였다. 입학 시기는 9월이었지만 다음 달이라도 당장 먼저 건너가 새로운 세계에 적응해야 했다.

그런데 연애라니. 어떻게 그럴 수가 있겠는가?

‘몇 년이 걸릴지 모르는데, 아니 돌아오지 못할지도 모르는데…… 이게 무슨 군대도 아니고 지금 뭘 어찌 하더라도 국제 연애를 해야 할 판인데.’

도하는 입학신청서를 쥐고 끙끙 앓으며 생각했다.

‘그게 말이 되나. 쟤가 나만큼 나를 좋아한다면 모를까.’

“포도야.”

강도하는, 추진력은 있었어도 좋아하는 걸 좋아한다고 인정하기까지 시간이 걸리는 남자였다.

“너 내년에 유학 안 갈래?”

4월의 어느 날 밤, 불쑥 포도의 학교 기숙사 앞으로 찾아온 그는 그녀에게 팸플릿을 내밀었다.

“여기 이 학교에 말이야. 일러스트 과정이 있어.”

도하로서는 이게 최선이었다. 이 학교가 얼마나 좋은 학교이며 네 미래에 도움이 되며 또 자신과 함께 가는 게 얼마나 좋은 기회인지를 그는 포도에게 설득하려 했다.

“네가 마음만 먹으면 너희 어머니는 내가 설득해 볼게.”

“하지만 나 여기도 좋은데?”

그런데 4월의 포도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웃었다. 모르는 게 당연했다.

“나 내년에 복수 전공할 예정이야. 그리고 지금 이 학교 마음에 들어. 좋아해.”

지금 이 순간조차도 그가 자신의 마음을 드러내지 않았으니까.

“오빠는 내가 왜 유학을 갔으면 좋겠는데?”

사람은 타인을 모른다. 말을 하지 않아도 안다는 말은 어불성설이었다. 그러니 노력하지 않으면 결코 닿을 수 없다. 설득하려면 진심을 다해 노력해야 했다. 그래도 닿지 않는 게 사람 마음이었다.

그러니까 도하는 말했어야 했다.

―그거야 내가 유학 가니까 그렇지.

―그리고 내가 지금 너를 많이 좋아하니까 그렇지.

하고.

“그 학교가 그렇게 좋아?”

그런데 도하는 그렇게 말했다.

“응.”

포도가 답했다.

* * *

그 학교가 좋다는데 뭘 어쩌겠는가. 더는 설득할 생각을 하지 않고 강도하는 한국을 떠났다. 그가 바로 이 학교로 유학을 간다는 말도 없이 그냥 그렇게.

‘이 정도면 됐지.’

강도하는 김포도를 자신의 마음에서 뿌리째 뽑을 생각이었다.

‘이 정도면 충분해.’

포도가 자신의 마음에 깊이 뿌리를 내렸다는 건 인정했다. 그렇지만 그렇다 해도 이미 한 번 방향을 돌린 진로를 다시 바꿀 만큼의 가치는 없다. 그는 디자인을 선택했다. 그가 원하는 공부는 이제 손을 뻗으면 잡힐 만큼 있었고, 포도는 자신을 사랑하지 않았다. 그게 바로 그가 그녀를 떠나는 이유였다.

‘난 할 만큼 했어.’

사실은 미련이 뚝뚝뚝 떨어졌으면서도…… 도하는 포도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한 거지.’

보고 싶은데 그렇지 않은 척, 했다.

도하는 일 년간 앓았어도, 자존심이 센 사람이었던 것이다.

* * *

그리고 스물여섯, 늘 재능을 인정받으며 월반을 해왔던 도하는 뒤늦게 공부를 시작했다. 재능이 없다고 생각했으니 남은 무기는 성실함밖에 없었다. 하루에 두세 시간, 그것도 쪽잠을 자가며 도하는 과제가 드로잉 100장이라면 200장, 학기 중 디자인 책 1권을 만드는 것이라면 3권을 해왔다.

나중에 생각해 보니 재능도 있었다. 재능이 있고 또 재미있지 않았다면 그만큼은 못했을 것이다. 아무튼 도하는 밤낮을 잊고 매달렸다.

포도 생각이 날 때면 더더욱.

* * *

운도 따라주었다. 그는 2학년 때 학교 동료 네 명과 창업을 해 광고 디자인 회사를 꾸렸다. 처음부터 회사의 몸집을 불려나갈 생각은 아니었고 졸업 포트폴리오를 만들 심산으로 회사 홈페이지만 만들어 놓고 돈이 되든 되지 않든 재미있어 보이는 일감을 닥치는 대로 받아 작업했는데, 그들이 홈페이지에 올려놓은 일을 보고 점차 작업 의뢰가 들어오더니 삽시간에 부피를 불려나갔다. 그는 졸업도 하기 전에 상이란 상은 휩쓸었고 돈방석에 앉았다. 행운의 여신이 그에게 키스를 보내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쌓아올리면 산산이 무너뜨리는 일이 온다. 행운은 그를 사랑하는데 말이지, 강도하의 운명은 뭐 그런 식으로 굴러갈 모양이었다.

* * *

‘그냥 이대로 뉴욕에 눌러앉자. 나를 알아주는 곳, 내가 좋아하는 일이 있는 곳, 바로 이곳에서 뿌리를 내리자.’

그로부터 5년, 강도하가 자신이 살던 아틀리에 겸 숙소에서 어퍼이스트사이드의 펜트하우스로 집을 옮기는 순간이었다.

미리 짐을 싸 보내고 중요한 이삿짐을 스스로 정리하려고 장갑을 끼고는 한국에서 가져왔던 책들을 상자로 옮기는데, 발치로 팔랑, 무엇인가가 떨어졌다. 도하는 무심결에 고개를 숙였다. 그림이었다.

포도가 그려준 자신의 초상화.

‘돌아가자.’

그런데 그 순간, 도하의 귓가에 그의 마음이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다.

‘자, 이제 돌아가야지.’

* * *

‘돌아가는 거야.

그곳이 한국의 내 고향이든 서울이든. 그 어디든.’

오래전부터 말하고 있었지만 들으려 하지 않았던 말.

‘포도가 있는 곳으로.’

와르르.

순간 도하는 자신의 가슴 한켠이 와르르 무너지는 것을 느꼈다.

* * *

자.

이제

포도를 만나러 가자.

그의 마음이 외치고 있었다. 뉴욕에서 승승장구하고 있는 바로 이때,

‘억.’

사채를 당겨쓴 것도 아닌데 삼부 이자 붙여서 마음(이라고 쓰고 짝사랑이라고 읽는다)이 돌아온 것이다. 도하로서는 날벼락도 이런 날벼락이 아닐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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