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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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도는 동생이었다. 그냥 동네 동생. 이 감정을 섣부르게 사랑이라 믿고 덤벼들기에는 리스크가 정말 컸다. 자신이 설마 고등학생을 좋아하는 변태는 아닌가 하는 무서운 깨달음은 뒤로하더라도 말이다. 쟤 과거와 쟤 부모님을 내가 아는데, 나중에 유학을 가든 어떻든 고향 내려오면 어떻게든 한두 번 볼 사이인데 그가 뭘 어쩌겠는가? 만약에, 아주 만약에 일 년이 흘러 포도가 대학생이 된다고 해도, 자신은 그때 여기 있을지 없을지도 몰랐다.

    게다가 포도는 지금 고3. 내년이면 대1.

    분명 뭘 어쩐다 해도 아주 짧은, 장난 같은 연애가 될 게 뻔했다. 그렇게 리스크가 큰데 도전하고 싶지 않다. 아니 도전한다는 생각을 품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었다.

    ‘야, 이건 아냐.’

    아무튼 많다. 문제가 아주 많다. 어떻게 헤쳐 나갈 수 있는 정도가 아니다.

    ‘그러니까 이건 진짜 아니야.’

    별이 아니라 생각을 헤는 밤, 안 되는 생각을 혹시 되지 않나 헤메이는 밤.

    그날 밤, 잠을 이루지 못하고 검은 천장을 바라보다 도하는 생각했다.

    ‘아닌 건 아니지.’

    두 번 봤고 두 번 다 가슴이 뛰었음에도 도하는 이 감정을 무시하고만 싶었다. 그리고 무시하면 무시될 수 있다고도 생각했다.

    ‘자. 아니다. 아니다. 아닌 것은 아닌 것이다…….’

    마치 식물을 키우는 것처럼, 마당에 잘못 떨어져 싹 틔운 씨앗은 골라 솎아내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쉽게. 어쩌면 공대생답게.

    그로부터 삼 일 후. 혼자 마음을 다잡아서인지 어쨌는지 도하는 포도 앞에서 전보다 평상심을 유지할 수 있었다.

    “…….”

    포도는 저번 만남으로 인해 자신을 못된 동네 오빠 업그레이드 버전으로 인식한 모양이었다. 이번엔 자리에 앉아도 ‘오빠, 안녕?’하질 않는다.

    “숙제는 다 해 왔어?”

    자리에 앉아 팔짱을 끼고 물으니 포도는 쭈뼛거렸다.

    “너무.”

    “너무? 너무 뭐.”

    “너무 많아.”

    뭐, 이런, 어이가 없어진 도하는 가방을 열고 주르륵 기다란 플라스틱 자를 꺼냈다.

    “내 말 좀 들어봐! 나 사실 할 일이 있단 말이야!”

    흠칫한 포도가 두 손으로 머리를 가린 채 울며불며 외쳤다.

    “나!”

    “나 뭐.”

    “나는! 나는 사실 만화가가 되고 싶어!”

    포도가 주먹을 쥐고 외쳤다.

    “만화에 학력이 무슨 필요야!”

    ‘이게 뭐라는 거야?’

    난데없는 선언에 그는 어이가 없었다.

    “네가 하고 싶은 만화라는 게 도대체 뭔데?”

    도하가 묻자 낙서 가득한 종이 뭉치를 꺼낼 줄 알았더니만 포도는 희희낙락하며 고개를 수그려 컴퓨터 전원 버튼을 켰다.

    “그게, 봐봐. 오빠. 나 요즘 이런 걸 그리고 있는데 얼마 전에 쪽지로 외주 문의도 왔다? 미성년자고 엄마한테 들킬까봐서 계약은 못했지만 나 그림 진짜 잘 그려.”

    과외 하러 왔다 난데없이 포도의 개인 홈페이지를 보게 된 순간이었다.

    달칵달칵

    컴퓨터 화면이 켜지자 포도가 앞에 달라붙어 마우스를 움직였다. 하얀 옆얼굴. 무의식중에 도하는 화면을 보러 가까이 다가갔다 순간 멀찍이 떨어졌다. 살랑 하고 샴푸 향기가 났던 것이다. 뺨이 찹쌀떡처럼 말랑말랑해 보였다. 분칠한 것처럼 하얗다.

    ‘얘가 어려서 그런가.’

    “요즘은 고등학생도 화장을 하냐?”

    “노는 애들은 하지. 이거 봐봐.”

    포도가 방긋방긋 웃으며 컴퓨터 모니터를 도하 보라고 돌렸다.

    도하는 포도가 올려놓은 작업물들을 바라보았다.

    “…….”

    한참이나 말없이 바라보다가 이번에는 포도를 비키게 하고 그 자신이 마우스를 움직였다. 도하는 자신도 모르게 한 손으로 턱을 괴었다.

    도하는 포도에게 그림이 도피처인가 보지 하고 생각했다. 작업물을 보기 전까진.

    “…….”

    그런 경우 많잖은가. 공부하기 싫어서 그림 음악 게임 뭐 그런 것에 갑작스레 빠져들게 되는 경우가. 티비 속 바둑 채널조차 흥미진진해지는 때가 고3이다. 도하는 포도도 그런 경우인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학원에서 배운 적 있어?”

    “아니? 동영상이랑 책 같은 거 보고…….”

    “너 이거 뭘로 그렸는데?”

    “마우스?”

    “허.”

    도하는 자신도 모르게 숨을 내뱉었다.

    ‘미쳤네. 이거.’

    아무리 엄격하게 봐도 포도의 그림은 준프로 수준이었다.

    ‘설마 이거 천재 아냐?’

    헛웃음을 몇 번 흘린 도하는 말똥말똥한 눈을 한 포도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그림 전공인 애 치고는 공부 잘하는 거 아냐?’

    그림을 다 감상한 도하는 속사포처럼 포도에게 질문을 던졌다.

    “포토샵은 정품이냐? 아니지?”

    “어? 어……. 그냥 친구가 알집으로 묶어줬는데……. 정품?”

    “이거이거 그림 그리는 애가 저작권 개념이 없네. 정품 써야지. 타블렛은 왜 안 쓰는데?”

    “타블렛? 그게…… 음, 저기, 비싸가지고. 엄마한테는 아직 말도 못했고.”

    “그림 말고 네가 말한 만화는 어디 있어?”

    “아? 그거? 그거 좀 긴데. 그리고 읽으려면 설정을 먼저 알아야 해서. 읽을래? 여기 설정집이.”

    “설정집 그게 왜 필요해?”

    포도가 컴퓨터 옆 책상 서랍을 열려고 하자 도하가 팔짱을 끼고 인상을 썼다.

    “독자들이 설정 알고 봐야 하는 수준이면 그게 만화야? 만화처럼 직관적인 콘텐츠가 어디 있는데. 그림만 잘 그려서 뭐하냐고. 보기만 해도 척하면 척하고 이해되어야지.”

    “…….”

    “만화 그리려면 설정집부터 찢어. 프로도 아닌 네 작업물을 설정집까지 읽어가며 봐줄 독자가 있을 것 같아?”

    포도는 식은땀을 흘리며 입을 다물었다.

    “오빠…… 공대생 아냐? 왜 이렇게 잘 알아?”

    한참 뒤 그렇게도 물었다.

    그러나 도하는 진지했다. 말은 그렇게 했어도 포도가 얼기설기 짜 놓은 설정집도 읽었고 한참 작업물을 보며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어머니한테 말할 생각은 해 봤어?”

    “…….”

    도하의 말에 포도의 얼굴에 미묘한 긴장감과 불안감이 스쳐지나갔다.

    “아닝……. 왜? 말할 거야?”

    “아닝이 뭐야. 아닝이. 되도 않는 애교 부리지 말고. 말 안 할 거야.”

    도하는 일단 칭찬할 부분은 칭찬해 주자고 생각했다. 도하는 포도의 머리를 헝클어뜨리듯 쓰다듬었다.

    “그래도 잘하네. 언제부터 시작한 거야?”

    “중학교 일 학년 때부터. 나 잘해?”

    포도가 반짝 하고 눈을 빛냈다. 귀여웠다. 도하는 아차 싶었는데 포도는 말을 술술 쏟아냈다.

    “나 사실 원래부터 그림 그리는 게 좋았어. 그림 그리는 애들 너무 부러웠어. 하지만 그쪽으로 가는 건 돈이 진짜 많이 들기도 하고……. 솔직히 내가 그 정도로 재능이 있는가 싶기도 하고. 하지만 역시 취미로만 하기엔 정말 좋아해. 잘 모르겠어. 내가 어떻게 해야 할지. 하고 싶은 공부도 없는데 꼭 대학에 가야 하나 싶기도 하고 그래. 학교에 있을 때는 할 게 없어서 공부하지만 역시 그림도 그리고 싶고.”

    “김포도.”

    도하는 점점 두서가 없어지는 포도의 말을 딱 잘랐다.

    “너 이런 일 하는 데 가장 필요한 게 뭔지 알아?”

    “뭔데?”

    “경험이야.”

    “…….”

    “네가 만화가가 되고 싶으면 우선 많이 그리는 것뿐만 아니라 좋은 작품들을 많이 봐야 해. 그런데 우리나라 공연전시출판 인프라는 서울에 다 몰려 있지. 네가 대학을, 그것도 서울에 있는 대학을 가지 못한다고 생각해 보자. 당장 꿈은 이룰 수 없는데 너 여기서 뭐 할 거야? 여긴 알바 자리도 잡기 쉽지 않잖아. 빈둥빈둥 놀면서 그림만 그릴 거야? 네 친구들은 다 대학에서 자기 하고 싶은 공부 하고 있는데?”

    그 말에 포도는 쭈그러들었다.

    “너 지금 이 그림들 몰래 그리지? 그래서 그림 그릴 시간도 안 나지?”

    “…….”

    “그런데 네가 만약에 서울에 있는 대학, 그것도 좋은 대학을 가면 너희 어머니가 기숙사에 보내 주겠지? 대학 가면 너 남는 시간 동안 부모님 눈치 볼 필요 없이 그림 그릴 수 있지 않겠어?”

    물론 그의 대학 공부는 고3 때 수능보다 훨씬 더 치열했지만 도하는 과감하게 생략했다.

    “거기 가면 너 할 일 하면서 좋아하는 전시도 보고 그림도 그리고. 그럴 시간이 4년이나 공으로 주어지는데? 지금 그림 그린다고 그 모든 기회를 포기하겠다고? 너 꿈 이루자고 가는 길이 너한테 더 먼 길이 될 수도 있어.”

    “아니 오빠, 하지만 나는 입시 공부도 안 해서 그림 관련 학과로는 갈 수 없고…….”

    “너 네가 존경하는 만화가 중에 만화학과 간 사람 있어? 네 전공이 네 꿈의 성공을 보장해? 너 잘 생각해봐. 네가 지금 오히려 네 꿈에게서 도망치고 있는 건 아닌지.”

    이렇게 말은 해도 도하는 포도의 꿈을 꺾을 생각은 전혀 없었다. 왜냐하면 그 꿈을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나 싶어서 그도 여기 내려온 것이었으니까.

    “…….”

    “넌 네 진로에 대해서 생각 많이 해야 될 건데, 나는 너 공부시키자고 여기 온 거니까, 일단 이렇게 하자.”

    도하가 말했다.

    “3월 평가 시험에서 너 등급 한 단계씩 올리면 내가 타블렛 사줄게.”

    선생님께 지도받는 듯 주눅들어 말을 듣던 포도의 두 눈이 커졌다.

    “그런데 못하면 네 작업물 하나 지우는 거야. 바로 이거.”

    모니터 안, 딱 봐도 공 많이 들인 작품을 도하는 가리켰다.

    “싫어.”

    포도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도하가 한쪽 눈썹을 치켜떴다.

    “그럼 네 어머니한테 이른다. 너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이짓 하고 있다고. 너 이거 한번 다 지워져 볼래?”

    “!”

    포도의 머리 위로 느낌표가 떠오른 것이 보였다. 도하는 비죽 하고 웃었다.

    “계약서부터 쓰자.”

    * * *

    “믿었는데! 믿고 보여준 건데! 이 악마야!”

    악마라고 포도가 왕왕 울든 말든 도하는 그날 계약서를 쓰고 지장까지 찍게 했다.

    “아니 그런데 진짜 이를 거야? 진짜 지울 거야?”

    울상이 된 포도의 표정이 웃기고 귀여웠다.

    “내가 언제 입 밖으로 내뱉은 말 못 이룬 적 있어?”

    도하가 되묻자 포도의 표정은 백지장처럼 창백해졌다.

    그러나 집에 돌아오고 나서 도하는 진지해졌다.

    ‘걔가 어쩌면…….’

    포도가 하는 고민은 그가 대학 졸업을 한 학기 앞두고 하고 있는 고민과 맞닿아 있었다.

    ‘나보다 낫네.’

    도하가 만일 이대로 하던 일을 쭉 밀고 나간다면 그 앞에는 탄탄대로가 펼쳐져 있었다. 벌써부터 기업에서 러브콜은 쏟아지고 있었고 그 중 하나를 골라잡으면 끝이었다. 성적도 좋았고 성공할 자신도 있었다. 아니 애초에 이때까지 실패한 적이 없다.

    ‘생각보다 지 인생에 진지하네.’

    그런데 강도하에게 실패하더라도 하고 싶은 일이 생겨버린 것이다.

    ‘쟤는 벌써 자기가 뭘 하고 싶은지 알고 있네.’

    도하는 만일 자신이 고등학생 때 저런 고민을 했으면 지금쯤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하고 생각했다. 도하는 자리에 누워 이불 속에서 뒤척이다 한숨을 쉬며 일어나 책상 위의 맥북을 켰다.

    “…….”

    그리고 그는 자신이 만들어놓은 포트폴리오를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급히 시작한 일이라 그가 봐도 엉망이었다.

    ‘그런데도 이렇게 재미있다니.’

    너무도 어이없는 일이다. 누구보다 빠르게 성공가도를 달려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때가 되어서야 가슴이 원하는 일이 뭔지 알다니.

    ‘도대체 나는 뭘 하고 싶은 걸까?’

    도하의 머릿속은 한없이 복잡해졌다.

    ‘정말로 하고 싶은 걸 해도 될까?’

    * * *

    아무튼 포도는 향상심 있는 학생이었다.

    “자.”

    한 달 후 도하는 포도의 부모님 몰래 포도에게 작업용 타블렛을 사주었다.

    “너 그런데 컴퓨터 잘 안 돌아가지? 포토샵 쓰다 계속 멈추고, 뻑 나고.”

    “응.”

    “네가 다음 시험에서 이보다 하나 더 올리면 내가 쓰던 컴퓨터 줄게. 포토샵에 일러스트레이터에 인디자인까지 정품으로 깔려 있는.”

    “정말?!”

    “속고만 살았나. 그런데 너네 부모님한테는 비밀이다.”

    빵가루를 솔솔 뿌려주니 포도가 졸래졸래 따라왔다.

    “응!”

    ‘귀여워 죽겠네.’

    그 일이 도하에게는 헨젤과 그레텔 놀이처럼 즐거웠다. 포도에게 주는 선물은 이미 받고 있는 과외비를 훌쩍 뛰어넘고 있었지만 상관없었다. 전혀 아깝지 않았으니까.

    선물을 준 다음 주에 도하는 포도에게 선물을 받았다. 도대체 언제인지 모르게 그를 그린 그림이었다.

    “선물이야. 오빠 엄마한테는 비밀이다.”

    “내가 비밀을 가져서 뭐 해?”

    도하는 피식 웃었다.

    그 누가 알랴마는,

    ―아들, 이거 니네 엄마가 고등학생 때 나 그려 준 거다. 완전 잘 그렸지?

    선물 받은 그림을 나중에 액자에 넣어 거실에 걸어놓고 평생 바라보게 될 줄은, 그때 받아드는 도하는 몰랐다. 김포도는 더더더욱 몰랐다.

    * * *

    포도와의 소꿉놀이 같은 과외놀이와는 별개로 도하는 꿈에 대해 생각했다.

    그에게 꿈이란, 지금까지 쌓아올린 것, 쥐었던 것을 놓아야 하는 일이었다. 모두 허물어버리고 다시 새로 쌓아야 하는 일이었다.

    이럴 줄 알았다면 차라리 좀 설렁설렁 쌓을걸, 그랬다면 포기하고 허물어버리기 참 편했으련만.

    그런데 그 모든 걸 감수할 정도로 꿈이라는 건 재미있었다. 가슴을 뒤흔드는 일이란 그런 것인가 보았다. 이렇게 말하면 좀 그렇지만…… 한 번 본 순간 인생을 바꾸어버리는 여자처럼. 숙명의 여인처럼.

    ‘대학 한 학기 남겨두고, 나 정말 미친놈 아닌가.’

    새로 시작한 공부를 하다 지쳐서 그런 생각이 들 때면 도하는 포도의 블로그를 정독했다.

    비정기적으로 방대한 분량의 게시물이 올라오던 포도의 블로그는 그림 그리는 시간이 줄었기 때문인지, 자신의 수험생활을 그린 간단한 그림체의 짧은 일상툰이 올라왔는데, 그게 꽤 재미있었다.

    전에 그렸던 아름다운 그림보다 훨씬 더 심플하고 사람의 마음을 끈다.

    ‘얘도 이렇게 노력하는데.’

    이상하게도 정기적으로 업로드되는 그 게시물은 도하에게 어쩐지 위로가 되었다.

    ‘나도 해봐야지.’

    당시 도하는 하드커버 그래픽 디자인 책에 포도가 준 그림을 책갈피처럼 끼워놓고 있었다. 접어둔 자신의 마음처럼.

    ‘적어도 부끄럽지 않게.’

    도하는 자신의 정체를 알리지 않고 포도의 블로그에 재미있다고, 당신의 작업물이 내게 위로가 된다고 댓글을 달았다.

    ―감사합니다! 열심히 할게요!

    그리고 답댓글이 달리면, 얼굴이 붉어지고 심장이 다 뛰었다.

    ‘이게 귀여워서, 진짜.’

    * * *

    그렇게 한 달이 가고 두 달이 가고…….

    “나 살쪘지?”

    “살?”

    “응. 나 지금 최대 몸무게다? 이 살 대학 가면 빠질까?”

    “안 쪘어. 귀여워.”

    “자기 얘기 아니라고 영혼 없이 말하지 마.”

    “진짜야. 안 쪘어. 안 빼도 돼. 지금도 보기 좋은데 왜 살을 빼려고 그래.”

    “…….”

    “그러니까 그런 걱정 말고 공부나 해.”

    시답잖은 얘기를 하면서 일주일에 세 번 두 시간 과외를 하는 게 전부였지만 도하는 점점 그 시간이 애타게 기다려질 만큼 좋아졌다. 포도의 성적은 쑥쑥 올라서 전교 17등이 되었다. 동네에 그 일로 소문이 났는지 여기저기에서 과외를 더 해줄 수 없느냐는 문의가 들어왔지만,

    “제가 하고 있는 일이 있어서요.”

    도하는 거절했다. 핑계가 아니라 정말로 하고 있는 일이 있었다. 도하도 결과를 기다리고 있는 시험이 있었다. 승낙이든 거절이든 빨리 결과를 알았으면 싶었다. 그런데도,

    ‘이대로 시간이 멈췄으면.’

    문득 깨달아보면 그렇게 생각하는 자신이 있었다. 예를 들면 포도가 싫어하는데도 그 애의 풍성한 머리칼을 헝클어뜨릴 때. 바로 그럴 때.

    ‘그냥 여기서 시간이 멈춰버렸으면.’

    행복하다고,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어딘가에 매어둘 수 없이 시간은 흐르고 흘러서, 포도의 수능 날이 다가왔다. 도하는 새벽에 깨어 포도네 어머니와 함께 수능장으로 들어가는 포도를 배웅하고, 또 여섯 시에는 귀와 코가 빨개져서 그녀를 기다렸다.

    솔직히 직접 수능 칠 때보다 그녀를 기다리는 순간이 훨씬 더 긴장되었다. 멀쩡한 얼굴은 했지만 너무 속이 울렁거려서 토할 것만 같았다.

    “나!”

    포도는 시험이 끝나자마자 저 운동장을 가로질러 그를 향해 다다다닥 달려왔다. 멀리서 봐도 시험을 어떻게 쳤는지 알 수 있었다.

    “나 서울대 가면 어떡하지?!”

    포도 어머니도 있는데 포도는 웃으면서 도하에게 총알처럼 달려와 박치기하듯 안겼다. 그리곤 자신의 머리를 가슴팍에 대고 마구 비볐다. 도하는 포도 어머니의 눈치를 보다 어쩔 수 없어 대충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포도가 도하의 등을 두 손으로 꽉 끌어안았다.

    “오빠! 다 오빠 덕분이야!”

    그때였다.

    포도의 두 손이 닿은 등이 갑자기 화악 하고 녹아내리듯이 따뜻해지는 것을 도하는 느꼈다. 그 순간 도하도 와락 그녀를 끌어안고 싶었다.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이마에 입 맞추고 싶었다. 우리 포도 잘했다고 말하며 토실해진 볼을 주욱 잡아당기고 엉덩이를 토닥토닥해 주고 싶었다.

    ―우리 포도, 최고다!

    헹가래도 해주고 싶었고 따뜻해 보이는 그녀의 입술에 차가운 자신의 입술도 부딪치고 싶었다.

    그런데 그럴 수가 없었다. 당연하지. 그럴 수 없다. 자신은 그냥 동네 오빠였으니까.

    충분하지 않다.

    ‘아.’

    도하는 그 순간 깨달았다. 전혀 충분치 않다.

    ‘이 정도로 충분하던 게 아니구나.’

    내가 이 꼬맹이를 어찌할 바 없이 사랑한다는 사실을.

    * * *

    WELCOME TO SVA

    그가 뉴욕비주얼아트스쿨, SVA(School of Visual Art)에 입학 합격 통지를 받은 것은 이듬해 2월, 겨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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