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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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

아무리 생각해도 동그란 안경테를 낮은 코에 얹어 쓴 포도는 여러모로 봐도 그냥 귀여운 여고생이었다. 아무리 봐도 그렇다. 입는 옷도 그렇고 화장기 없는 얼굴도 그렇고 키만 멀끔하게 컸지 그냥 애다. 애.

포도는 강도하가 지금까지 사귀었던 여자들과는 하늘과 땅 정도로 차이가 났다. 도하는 갑자기 들이닥친 사랑에 꼼짝 못하고 쩔쩔맸다.

지금까지 이런 적이 없었다.

그러니까 도대체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는 게 강도하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원래대로라면 강도하는 스윽 포도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을 것이다.

포도야. 못 본 새 정말 예뻐졌네. 우리 밥 한번 먹을까? 하고.

그도 그럴 게 강도하는 지금껏 살아오면서 무엇인가, 또 누군가가 마음에 드는 일이 별로 없던 남자였다. 그래서 반대로 마음에 드는 것이 생기면 꼭 손에 넣어야 했다. 그게 사람이라면 더했다. 왜냐하면 그건 공장에서 수없이 찍어내는 흔하디흔한 게 아니라 이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것이지 않은가?

한 번 뿐인 인생인데 왜 ‘그때 고백해볼걸’ 하고 후회를 해야 하는가?

그러니까 강도하는 일단 누군가 그의 마음에 시동만 걸면 노력을 해서 어떻게든 그녀의 옆자리를 쟁취하는 연애 스타일을 지녀왔던 것이다.

근데 이번엔 아니었다.

그런데 이번엔 어딘가 단단히 고장 난 듯 강도하의 뻔뻔스러움은 전혀 작동되질 않았다. 게다가 포도는 불도저처럼 돌진하기엔 정말이지 정신이 아득해질 만큼 수많은 문제를 떠안고 있었다.

“너 힘들지는 않겠니?”

“괜찮습니다. 그냥 잠깐 공부 봐주는 건데요. 뭘.”

걱정스러운 안색을 한 부모님에게는 멀끔한 얼굴로 웃고는 방으로 들어왔지만 강도하는 그날 참고서를 사 들고 들어와 침대에 누워 끙끙 앓았다.

‘걔가 벌써 그렇게 컸던가?’

정말이지 이건 좋아한다고 인정하면 될 문제가 아니었다. 굳이 머릿속을 뒤지지 않아도 선명하게 추억이 떠올랐다. 포도, 포도, 포도…….

‘도둑 잡기 놀이에 안 껴준다고 울던 기억이 선명한데. 어?’

추억 속 포도는 말간 얼굴을 한 어린아이일 뿐이다. 강도하는 자신이 변태가 아닌가 하고 많이 고민했다.

‘나 그거 아니냐? 롤리타 콤플렉스, 페도…… 그거?’

내가 혹시 페도필리아인가 아닌가.

소아성애자.

교양으로 들었던 심리학 및 문학 작품 수업이 스멀스멀 강도하의 머리에 떠올랐다. <연인> <롤리타>…….

그는 침대에 누웠다 식은땀을 흘리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냐!’

그에겐 세 번쯤의 연애 경력이 있었지만 그 중 연하조차 없었다. 도하는 벌떡 일어나 책장 서랍 세 번째 칸을 열었다. 거기엔 옛날 옛적 사진을 모아놓은 앨범들이 시기별로 주욱 꽂혀 있었다.

파라라락.

도하는 자기 것엔 집착하는 성격이라 어릴 적 상장이며 일기장이며 사진이며 받은 편지 등 온갖 것을 모아두고 있었고 거기엔 포도의 어릴 적 모습이 찍힌 사진도 몇 장인가 있었다. 앨범을 한참 뒤져 포도의 사진을 찾아낸 도하는 그 사진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부모님끼리 친해서 어디 같이 여행을 갔는지 두 가족이 같이 찍은 사진이었는데, 한 갈래로 머리를 길게 딴 포도는 뭐가 서러운지 얼굴이 눈물범벅이었고 달래주기 위함인지 그는 그런 포도를 목마 태워주고 있었다.

포도는 그의 머리에 반쯤 자신의 얼굴을 묻고는 카메라 렌즈를 빤히 바라보고 있다.

“…….”

도하는 인상을 쓰고 그 사진을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하!”

그리고 기가 차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그도 그럴 것이다.

전혀, 전혀 매력이 없었다!

‘하…… 당연하지.’

그제야 안심한 도하는 앨범을 다시 꽂아 넣고 침대 위에 다시 올라가 잠이 들었다.

‘당연해.’

새근새근, 그는 그제야 잠이 들었다.

* * *

나한텐 그냥 애일 뿐이라고. 애.

갑자기 어? 훌쩍 커가지고, 내가 순간 좀 당황한 거지.

내가 원하는 건 그런 스타일이 아니야. 내가 원하는 건 좀 더…….

* * *

과외경험? 당연히 있었다. 돈을 받는 건 아니었지만 도하는 대학생끼리 재능기부 형식으로 저소득층 학생들을 가르치는 동아리에 가입해 활동했다. 도하는 성적이 낮은 학생을 끈기 있게 또 사근사근 잘 가르쳐서 중상위권까지 잘 끌어올렸다. 가르치는 데 재능이 있구나 하고도 생각했다.

아무튼 과외 경험이 처음도 아니다. 그리고 뭐 공대 수업도 아니고 수능이지 않은가.

‘한 삼사 개월 공부하는 방식만 잡아주고 자율학습으로 돌리게 하면…….’

감정의 교통사고가 난 이튿날 도하는 그 모든 감각이 자신의 착각이라고 생각하며 포도의 방 문고리를 쥐었다.

꿀꺽.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똑똑.

“나 들어간다.”

‘그냥 하던 대로 하면 된다. 전처럼 꿀리면 안 된다. 꿀리면 안 돼.’

도하는 자신도 모르게 마음을 단단히 먹으며 들어갔는데 방문을 여니 포도가 조그만 나무 책상에 앉아 있었다. 풍성한 머리를 굵게 땋아 왼쪽 어깨로 늘어뜨린, 여전히 헐렁한 후드티 차림의 모습이었다.

“오빠. 왔어?”

포도는 전보다는 어색함이 덜해졌는지 책상 위에 손을 얹고는 도하를 향해서 방긋 웃었는데 도하는 순간,

훅…… 하는 느낌을 받았다.

그는 마치 다른 세계로 향하는 문을 연 느낌이었다. 포도에게서 뻗어나온 분홍색 작은 꽃잎 폭풍이 그를 휩싸고 우수수 스쳐지나가는 느낌이었다.

‘와.’

순간 강도하는 문고리를 놓고 도망치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와악!’

사진 속과는 전혀 달랐던 것이다. 사진 속과는.

“도하야. 뭐 더 필요한 거 있으면 말하고, 알겠지?”

잠시 후 포도의 어머니가 들어와 다과를 가져다 놓고 난 뒤 웃으며 문을 닫았다. 도하는 문이 닫히자마자 팔짱을 끼고 인상을 팍 썼다.

“너 성적표 가져와 봐.”

“성적표? 언제 거?”

“가장 최근 거.”

“어. 그게 작년 거밖에 없는데.”

갑자기 달라진 도하의 분위기에 포도는 머뭇머뭇하더니 책상 서랍을 열었다. 펄이 들어간 학종이와 색색깔의 마카, 마스킹 테이프, 여고생다운 필기구들이 가득한 책상.

“이게 점수야?”

혼자서만 숨 막히는 분위기를 참을 수 없었던 강도하는 성적표를 받아들자마자 포도를 구박하기 시작했다.

“이게 점수냐고.”

그는 어떻게든 이 분위기를 환기시켜야 했다. 그건 과외 학생 기선 제압이 아니라 갑자기 다가온 사랑에 대한 도하의 반항이자 덫에서 풀려나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어? 너 이 점수로 대학 어떻게 갈 건데.”

“나, 나 그래도 반에서 10등은 했는데…….”

도하의 말에 포도가 당황스럽다는 듯 웅얼거렸다.

“반 10등? 너 반 애들이랑 경쟁해? 니 경쟁 상대는 전국이야. 아니 전국도 아니지. 지금 강남에서 엉덩이 열두 시간 의자에 붙이고 공부하는 애들이라고. 너 서울에 있는 대학 안 갈 거야?”

“음? 나 서울에 있는 대학 가야 돼? 내가?”

그런데 그게 짝사랑에서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이라는 건 하늘과 땅, 그리고 도하만이 안다.

나중 생각해보니 당시 포도로서는 날벼락이었을 것이다.

“이거 미친 소리 하네. 야. 난 모의고사고 수능이고 내신이고 내 등급에 1미만은 본 적이 없어. 너 이 성적이면 지금부터 하루에 세 시간 자야 돼. 알아?”

때는 1월이었다.

* * *

망했다.

“안 돼.”

그날 채 100m도 떨어지지 않은 포도 집에서 자신의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도하는 침대에 풀썩 엎어졌다.

“안 된다고. 이 미친놈아.”

그리고 자신의 커다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중얼거렸다.

“이 페도필리아야…….”

그들이 교정에서 마주친 스물, 스물여섯이었다면 상황은 아주 나았을 것이다. 만약 그랬다면 강도하는 자신이 도둑놈이라고 생각은 했을지언정 벌써 손을 뻗을 궁리를 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포도는 현재 열아홉이었고 강도하는 포도가 옛날 옛적에 도둑 잡기 하다가 긴장감에 못 이겨 오줌 싼 것까지 아는 동네 오빠였다.

“이 변태 새끼야!”

‘몇 년 못 봤을 뿐인데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그런데 도무지 인정할 수 없는 짝사랑이 시작되려 하고 있다. 그는 괴로움에 못 이겨 마구마구 몸부림쳤다.

출렁.

집을 떠나있는 동안 작아져버린 침대가 출렁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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