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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 (5/28)

05

오늘날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심경 된 동네 오빠 강도하는 한때 꼬맹이 꼬맹이 부르며 나름 귀여워하던 김포도와 딱 여섯 살 차이가 났다. 그러니까 강도하 중학교 1학년 때 김포도는 초등학교 1학년, 고등학교 1학년 때 김포도는 초등학교 4학년이다. 이때부터 강도하가 마음을 집어먹었느냐고? 아니 이때부터 마음을 먹었으면 강도하가 페도필리아에 개새끼인 거고 진짜.

부모님 등쌀에 못 이겨 반 장난 반 괴롭힘 삼아 놀아주던 포도가 쑥쑥 커 갑자기 사람들의 시선을 끌기 시작하고, 도하가……

‘어휴, 빨리 커라.’

하는 심정을 갖게 된 건 포도가 고등학교 3학년, 즉 열아홉 살이 되고 나서였다.

‘빨리 커.’

그러니까 스물다섯, 그 시기에 그는 난데없이 동네 동생 김포도를 좋아하게 된 것이다.

물론 강도하에게도 포도를 부정하던 배고픈 여우 시절이 있었다. 강도하는 혼자서 끙끙 앓았다.

‘그런데 이게 말이 되냐고. 저 코찔찔이를.’

내가 쟤를 좋아하다니. 쟨 진짜 내 친동생 같은 애인데. 게다가 지금 고등학생 아닌가. 지금도 핏덩이 같고 이보다 더 핏덩이였던 시절을 기억하지 않는가. 게다가 쟤 어머니가 내 어머니고 내 어머니가 쟤 어머니고…….

그가 김포도를 좋아한다는 걸 인정하는 과정은 실로 힘겨웠다. 자기부정만 해도 몇 년이 걸렸고, 그가 그녀를 좋아한다는 것을 겨우 인정했을 땐 이미 많은 것들이 달라져 있었다.

짝사랑.

함정 같은 사랑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몇 년이었다.

강도하에게 김포도가 마음속 계절이 바뀌어도 지지 않는 꽃나무가 되기 전에, 그러니까 포도가 말 그대로 콧물 흘리며 다니던 시절에 그의 집은 동네 아이들 놀이터나 다름없었다. 그러니까 그때 강도하에게 포도는 특별한 아이가 아니었다. 원하면 이층집 앞마당의 그네를 빌려주었고 허구한 날 열쇠를 잃어버려 울면서 집 초인종을 누르면 공부를 하다 말고 밖으로 나가 문을 열어주었고 가끔 배고프다 하면 계란프라이를 구워주긴 했지만, 강도하는 십 년쯤 후 이 이름 이상한 양갈래머리 여자아이가 자신의 마음을 앓다 문드러지게 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거 건드리면 죽는다.”

그랬다면 좀 더 잘해줬겠지. 뭣 모를 시절부터 입 안의 혀처럼 어르고 구슬려서 한 입에 꿀꺽 집어삼켰겠지.

“이거 나 빌려주면 안 돼?”

“안 돼.”

그 시절 김포도는 그저 그가 조립해 놓은 건담이나 닌텐도 같은 장난감들보다 광고 그래픽 디자인 책을 더 많이 건드리는 꼬맹이일 뿐이었다.

“…….”

“왜, 심심해?”

“아니……. 응. 아니, 아닝.”

“야. 오빠가 자전거 태워 줄까?”

“나 자전거 못 타는데.”

“그럼 너 오빠랑 부르마블 할래?”

“부르마블이 뭔데?”

“넌 부르마블도 모르냐?”

아니 귀찮아 죽겠어 하면서도 포도가 시무룩해하면 만사 제쳐두고 그렇게나 잘 놀아줬던 건 혹시 훗날 눈을 뜰 이 감정에 대한 복선이었나? 모르겠다. 나중에 이 시절의 일을 떠올리면 도하는 눈과 귀가 홧홧하고 목 뒤의 솜털이 섰다.

‘정말이지…… 이럴 줄 알았으면 그때, 그때, 또 그때 말이라도 상냥하게 해서 점수 좀 따는 거였는데!’

생각해 보면 기회가 백사장 모래알처럼 널려 있었다.

어쨌든 그 시절 포도는 그냥 포도였고 강도하는 공부를 잘하는 학생이었다. 포도가 학원을 다닌답시고 슬슬 자신의 집에 발길 끊었을 무렵 도하 또한 도내에 있는 과학고등학교에 진학했다. 기숙사 생활을 하는 학교다. 새로운 곳에서 공부를 하느라 도하는 금방 포도를 선반 위에 두고 까먹은 과일처럼 까맣게 잊었다. 그 시절 그가 하던 고민은 대부분 진로에 관한 것이었다.

‘재미는 있지만 이 일이 과연 내 적성에 맞는 걸까? 내가 하고 싶은 일이 정말로 이건가?’

차라리 공부나 못하면 나았을 텐데 성적은 수재들 가운데서도 항상 톱이었다. 어느새 도하는 자신도 모르는 레일 위에 탑승해 있었다. 심지어 레일 위를 쌩쌩 달려 도하는 조기 졸업을 했고 남들보다 일 년 일찍 대학에 합격했다.

대학 생활 일 년 끝에 군대를 가고 또 복학을 하고 마지막 학기를 앞둘 때까지 포도는 그의 머릿속 선반 위였다. 그는 마지막 학기를 앞두고 휴학했다. 그리고 고향으로 내려왔다.

“너 휴학 했다면서. 쉬는 동안 이 애 과외 도와줄 생각 없니?”

그리고 그곳에서 포도는 도하의 심장을 쿵!

“…….”

아주 쿠―웅, 소리 나게 떨어뜨렸다.

“포도야 인사해야지.”

“어. 안녕하세요.”

집 앞마당에서 포도는 어색해하며 꾸벅 인사하고는 포도 어머니 뒤로 몸을 숨겼다.

“오랜만에 봤다고 오빠한테 수줍음을 타네.”

오빠가 너한테 얼마나 잘해줬는데, 하는 포도 어머니의 말에 그녀의 등 뒤에서 청바지에 노란 병아리 캐릭터가 그려진 남색 후드티를 입은 포도가 빼꼼 하고 고개를 내밀었다. 커다랗고 동그란 안경테 뒤 검은 유리구슬처럼 투명한 눈, 조금은 낮다 싶은 작은 코, 분홍빛 입술. 학생답게 화장기도 없는데다 분명 그냥 평상복 차림인데도 도하는 머리를 치렁치렁 늘어뜨린 포도에게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강도하는 당황스러워 한참을 입도 떼지 못했다.

‘얘가 내가 알던 김포도라고?’

오랜 공백기에 업데이트가 쉽게 되지 않았던 것이다.

‘진짜?’

게다가 아무런 전조도 예감도 이유도 없었다.

빠앙― 쿵! 부아아아앙―

강렬한 감정이 브레이크 없는 덤프트럭처럼 그를 치고 지나갔다. 뺑소니 수준이었다.

“도하야.”

“아. 아. 예. 도와드려야죠. 아무렴요.”

도하가 한참이나 말이 없자 포도의 어머니와 이야기하던 그의 어머니가 도하의 등을 밀듯이 툭 건드렸다.

“아무렴요.”

도하는 자신도 모르게 말이 툭 하고 튀어나왔다. 분명히 기숙사를 벗어나 집으로 돌아왔을 땐 어린애 과외 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는데 말이다.

* * *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김포도라니.

짝사랑의 시작은 그도 모르게 마음을 콕 하고 찌른 바늘 수준이 아니었다. 갑자기 신호도 무시하고 시속 180km로 달려든 1톤 트럭이었다.

와장창!

강도하의 자존심이라든가 뭐 사랑에 대한 그 나름대로의 고찰이라든가 하는 것은 포도를 마주한 순간 완전히 박살났다. 도하는 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알을 깨고 세상에 나온 새끼 새가 된 기분이었다.

“…….”

새로운 세상이 펼쳐졌다. 교통사고에 가까운 강렬한 감정을 겪었는데 모를 수가 없다. 그건 첫눈에 반하는 그런 게 사랑이냐고, 어떻게 그 사람도 모르면서 그 사람을 좋아할 수 있냐고 그동안 비웃었던 자신이 얼뜨기 천치 같아지는 경험이었다.

그런데 다만 그 상대가 김포도일 뿐이다.

“그런데 그게 김포도라고?”

난데없이 동네 서점에서 수능 교재를 고르게 된 강도하는 어이가 없어져서 혼잣말을 웅얼거렸다.

“내가 업어 키운 코찔찔이 꼬맹이라고?”

또, 또 자신도 모르게 몇 번이고 되물었다.

“정말로?”

* * *

포도가 못났다는 게 아니라 사람에겐 이상형(理想型)이라는 게 있잖은가.

강도하는 그가 운명처럼 첫눈에 반하게 된 여자가 있다면 어느 면모로나 성숙한 여인일 줄로만 알았다. 심히 지적이거나 혹은 팜므파탈, 그 누구라도 앞에선 무릎을 꿇을 만큼 매력 넘치는 여자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당연하지, 내가 어떤 놈인데, 라고 생각했다.

내가 어떤 놈인데 별것 아닌 여자한테 넘어가겠어.

“야, 이 등신아!”

그런데 그게 이 공부도 더럽게 못하는데다, 어릴 때 볼 꼴 못 볼 꼴 다 봤던 여섯 살 연하의 꼬맹이라니.

딱!

도하는 플라스틱 자로 포도의 머리를 때렸다.

“아, 아파!”

“너 이래서 대학 어떻게 갈 거야? 어?”

“어, 엄마한테 이를 거야! 이 이중인격자야!”

플라스틱 자에 이마를 맞은 고등학교 3학년생 포도는 왕왕 자신에게 울부짖으며 외쳤다.

“이르든가. 일러 봐 어디. 나 과외 때려 치고 너 대학 못 가고 어? 아이고, 니네 어머니가 퍽이나 좋아하시겠다.”

공대생 강도하는 빈정거렸다.

말이 되질 않는다. 그럴 리 없다.

그래서 그 다음 이어진 육 개월간의 과외 중 한 삼 개월 동안 도하는 그 마음을 억누르기 위한 반작용으로 훨씬 더 포도에게 거칠게 굴었고, 그 일을 나중에 아주아주 많이 후회했다.

‘잘할걸.’

그러니까 닭 쫓던 개 지붕 올려다보는 꼴 된 다음에 말이다.

‘그때부터 잘할걸. 그때부터라도 잘해서 침이라도 발라 놨어야 했는데.’

경쟁자 없이 호감도를 올릴 절호의 기회였는데 강도하는 포도에게 잘 보이진 못할망정, 좋아하는 애 괴롭히는 초등학생처럼 굴었다. 나중에 도하는 이 일을 생각하며 피눈물을 흘렸다.

아무튼, 실은 원했으면서도, 그런 일이 정말로 있는가 문학 작품을 읽으며 궁금해했으면서도, 막상 찾아온 운명적인 사랑에 도하는 아주 서툴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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