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그날. 마음속 말을 함부로 입 밖으로 뱉은 그날부터인가.
짝사랑을 자각한 그날부터인가. 내 머리 위 안테나가 불쑥 솟아올랐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에 대한 정보란 정보를 모두 빨아들였습니다. 나는 내가 천리안을 가진 것 같았고 또 소머즈라도 된 것 같았습니다.
‘도대체 실장님은 왜 이렇게 잘생겼을까.’
연예인도 아닌데, 연예인같이 실장님은 참으로 잘생겼습니다. 나는 흰 셔츠가 저렇게 잘 어울리는 사람은 처음 봤어요.
그게 내 눈에 콩깍지가 씐 건 아닌 게 다른 사람들의 눈에도 마찬가지인 모양이었습니다.
“대표님과 같은 유학파잖아? 능력도 있지. 또 사교성도 좋아서 대내외적으로 얼굴도 잘 비추고, 우리 대표님 참 능력 있는 사람이긴 한데 뭐랄까 좀…… 죽어도 일터에서 죽으라는 미친, 큼, 크음, 그렇잖아? 실장님이 엄마처럼 중간 관리를 잘 하지. 실장님 없었으면 우리 회사 직원 삼분의 일은 과로사했어.”
구내식당에서 대리님이 들려준 말은 이러했습니다.
“미친놈! 아니 왜 미친놈한테 미친놈이라고 말을 못 해! 대표 진짜 미친놈이야. 어떻게 일을 그렇게 줘? 아주 다 지 같은 줄 안다고!”
바로 반대편 자리에 앉아 있던 옆 팀 대리님이 분통을 터뜨렸습니다.
“…….”
아. 나는 참고로 대표님과는 전혀 관계없는, 대학 교수님 추천 파견 인력으로 치부되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오빠야, 포도야, 하고 서로를 부른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그녀들은 참으로 놀랄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실장님 미혼이시죠? 애인은…… 있대요?”
흠칫!
나는 그게 내가 한 말인 줄 알고 놀라 입을 틀어막았다가 고개를 돌려 맞은쪽 오른편을 바라보았습니다. 익히 아는 얼굴. 영업지원팀 직원이었습니다.
“있으시겠죠?”
“아서라.”
그런데 그 말에 우리 팀 대리님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습니다.
“상사로는 좋지만 연애 상대로는……. 죄 많은 남자라니까.”
나는 입에 젓가락을 문 채 마른 침을 꼴깍 삼켰습니다.
“잘생겼지. 성격 좋지. 또 사근사근하게 사람 잘 챙기지. 흑심 품는 여직원들이 어디 한둘이었겠어? 그런데 말이야.”
대리님은 고개를 앞으로 기울인 채 속삭거렸습니다.
“그게 문제야. 실장님은 아무렇지도 않게 여자에게 잘해줘서 모두한테 상처를 준다고. 예를 들면 저번 실장님이 소개팅한 얘기를 내가 들었는데 말이야.”
이야기인 즉 이러했습니다. 실장님이 아는 분 소개로 소개팅을 나섰는데 상대방이 실장님을 정말 마음에 들어 한 모양이었습니다. 하지만 실장님은 그게 아니었는지 한 번의 만남 뒤 일은 흐지부지되었습니다. 상대방은 그러자 주선자를 통해 한 번 더 보고 싶다고 마음을 전해왔습니다.
그래서 성사된 한 번의 만남, 실장님은 상대를 위해 분홍빛 작약 한 다발을 사들고 데이트를 갔다고 합니다.
“아.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분이 마음에 들었대요?”
“아니이?”
대리님은 두 눈을 커다랗게 뜨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습니다.
“그냥 상대방 좋으라고 꽃이 주고 싶었다잖아. 어? 마음에도 없는데? 꽃 받고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냐면서. 그리고 나가서 꽃 주고 밥이랑 커피 잘 마신 다음에 제대로 찼다는 거지. 누가 대표님 동문 아니랄까봐 아주 또라이야. 또라이.”
그 말을 듣는데 요구르트와 포도송이 생각이 나면서 나는 어쩐지 오싹해졌습니다.
아니 뭐 꽃을 줄 수도 있지만요. 자신에게 마음이 있는 걸 아는 상대한테, 자기는 마음이 없는데도 그걸 가지고 가서 착각하게 뻔히…….
비슷한 에피소드들이 대리님의 입에서 줄줄이 흘러나왔습니다. 실장님의 착각할 만한 사소한 친절에 감동받은 사원들이 오해하고 고백했다 차인 사건들 말입니다.
“…….”
나는 입을 다물었습니다. 내 요구르트와 포도송이는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사람이 친절하고 싹싹해도 선이 있어야 말이지. 사람 괜히 착각하게 만들고 곤란해 그거.”
“…….”
“그래서 룰도 생겼다고. 사내연애 금지 룰. 너 괜히 흑심 생겼으면 접어. 저 사람 남녀 안 가리고 저러는 사람이야. 진짜.”
“아……. 헐.”
“그런데 누구 대표님은 관심 없어? 우리 대표님도 잘생기고 능력 있는데.”
“대리님. 아무리 그래도? 네?”
“아니 생각해 봐. 저거 결혼해야 사람 되지. 어디 호랑이가 안 물어가나.”
그 이야기를 듣는데 나는 어쩐지 내 마음을 들킨 듯이 얼굴이 붉어지면서 푸시시시시― 하고 김이 빠졌습니다.
‘아.’
자리로 돌아와 나는 컴퓨터를 한참 빤히 바라보았습니다.
‘에이. 아. 그렇구나.’
아. 뭐. 사실 무슨 일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나한테는 심지어 어떤 착각할 만한 사건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나는 지레 겁을 먹었습니다.
‘그냥 호감 단계였잖아. 담그면 안 되는 거 알았으니까 얼른 발 빼자.’
그래서 이솝 우화 속 배고픈 여우가 손에 닿지 않는 곳에 매달린 포도를 바라보며 ‘저 포도는 분명 시었을 거야’ 하고 바라보는 단계로 나는 또 접어든 것입니다.
“…….”
뭐, 포도는 그저 여우의 속마음도 모르고 달콤한 냄새를 풍길 뿐이었습니다. 물론 달콤한 냄새를 풍기는 게 포도의 잘못은 아니었습니다. 사과는 그냥 사과고 포도는 그냥 포도니까요.
그리고 웹툰 작가인 여우는 온종일 포도 생각을 했습니다.
‘포도. 포도오…….’
웹툰 작가, 그것도 일상물을 그리는 웹툰 작가는 가장 남들에게 공감 받거나 재미있을 만한 소재를 자신의 경험 안에서 끄집어 내 각색시키는 게 일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적어도 일주일에 주 일 회는 자신의 삶을 이리저리 반추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안 돼.”
그 주 콘티를 짜던 나는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습니다. 그도 그럴 게 그의 생각밖에 떠오르지 않았던 것입니다.
“나 역시 좋아하나 봐.”
‘신포도인데 먹으면 실 게 분명한데, 그래도 깨물고 싶나 봐.’
나는 나도 모르게 내 머리를 움켜쥐었습니다.
* * *
‘내일은 일도 일찍 끝날 텐데…….’
도하의 커다란 손이 휴대전화를 만지작거렸다.
‘전화를 걸까? 전화 걸어서 나오라고 그럴까? 마감 끝이라 상태가 좀 그러려나? 그래도 나오라고 그럴까? 밥이나 먹자고 그러고 그 김에 옷이나 사줄까? 그런데 안 나오겠다고 하면 어떻게 꼬시지?’
만지작 만지작 만지작
포도가 난데없이 시작된 짝사랑으로 괴로워하던 그때 샤워를 하고 널찍한 침대에 벌렁 드러누운 강도하는 휴대전화를 만지작거리며 어떻게 하면 포도를 집 밖으로 끌어낼 수 있는지 궁리 중이었다. 어찌저찌 주3일 회사에서 일하게 만드는 건 성공했는데, 그 이후로 영 진정이 되지 않았다. 사내연애의 꽃이라는 카풀도 해주는데 차 안에서는 아주 여기가 지 집인 것마냥 침 흘리면서 자기만 하고…….
“하…….”
‘내가 남자론 느껴지지 않나?’
도하는 자신도 모르게 푹푹 한숨을 뱉었다. 동네 오빠라는 포지션으로 시작해서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아, 정말 모르겠다!
“옛날엔 가문끼리 합만 맞으면 얼굴 안 보고도 결혼했다는데…….”
포도를 설득하는 것보다 포도 어머니를 설득하는 게 더 쉽겠다. 그는 되도 않는 생각을 하며 침대에서 이리저리 뒤척였다. 열한 시 십칠 분이었다. 포도의 웹툰이 올라올 때였다. 그는 휴대전화로 웹툰 사이트에 접속했다.
“또또 출근하기 싫다는 이야기랑 요즘 뭐가 맛있다는 이야기나 하고 있겠지.”
말이야 그렇게 했지만 그는 투덜거리면서도 마치 이 순간만을 위해 살아온 사람처럼 그녀의 웹툰을 정독했다. 그리고 또 정독했다.
“이게. 이게 뭐야?”
강도하는 두 눈을 부릅떴다.
“뭐야. 이게 뭐냐고!”
그의 입에서 육성으로 괴성이 터져 나왔다. 그럴 만도 했다.
그는 포도를 짝사랑하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웹툰은 회사에서 새로 만난 사람을 짝사랑하고 있단 내용이었다.
아. 그런데 도하가 도대체 왜, 언제부터 그녀를 짝사랑했느냐고?
“이게 뭐냔 말이야!”
강도하가 닭 쫓다 지붕 위를 바라보게 된 전말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아주 한참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했다. 정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