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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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았다, 라는 걸 알게 된 건 삼주 후였습니다.

‘강도하 이 새끼야! 야근 많이 안 한다더니!’

정신 차려! 이 각박한 세상 속에서!

나는 타블렛 위에 곧 죽을 듯이 엎어졌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각박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을 많이 주는 건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첫날부터 안 이래도 될 텐데 앉자마자 일거리가 떨어졌고 나는 ‘간단한 일러스트 작업’이라는 것을 하루에 점심 시간을 제외하고 약 열 두세 시간 동안 하게 되었습니다. 곧 나는 무엇이 메인 잡이고 무엇이 서브 잡인지 알 수 없어졌습니다.

‘그러게 내가 과연 웹툰 작가인가 직장인인가…….’

그럼에도 내가 일을 그만두지 않은 건 세 가지 이유로 압축되었습니다.

‘월급만 받아봐. 내가 월급만 받으면…… 크흡, 타블렛도 바꾸고 거기에서 초밥도 먹고 또…….’

첫 번째는 야근을 하면 하는 대로 돈이 들어오잖아요. 그리고 둘째 이유는 바로 소재 고갈 때문이었습니다.

네. 슬슬 소재가 떨어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내가 연재하고 있는 웹툰은 약 20대, 30대 여성이 공감 갈 만한 이야기를 다루는 일상 웹툰이었습니다. 방대한 스토리를 먼저 짜고 한 편 분량으로 조각 내 그리는 게 아니다보니 손이 빠른 것보다는 일상 속 소재를 어떻게 끄집어내고 잘 엮는지가 더 중요했습니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웹툰이 잘되어 연재 계약을 맺고 직장 생활을 그만두다보니, 집 밖에 나갈 일이 적어지고 소재가 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매일매일 똑같은 일상에서 탈피해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는 일이 절실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 일은 내게 어쨌든 방대한 소재를 주었습니다.

예를 들면 사람 여럿 갈아 넣어 만드는 광고 촬영 비하인드 스토리라든가 갑이라든가 을이라든가 병이라든가 또 사장의 악행이라든가…….

‘야근하는 대가로 다 써버릴 거야.’

여기서 내가 웹툰 작가라는 걸 아는 건 사장님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빠가 뭐 내 웹툰 볼 시간이 있겠어요?

‘다! 다 써버릴 거야!’

웹툰 작가로서의 이름은 어차피 가명이었고 나는 이곳에서 신분을 속이고 있었으므로 업체명과 이름만 살짝 바꿔 여기서 일어나는 일들을 르포 수준으로 쓸 생각이었습니다.

‘어쨌든 이것만 하고 집에 가야지.’

그래서 에너지드링크를 옆에 쌓아두고 하품을 하며 모니터 27인치 맥에 머리를 박는 것이 새로운 일상이 되었습니다.

‘이것까지만, 내일은 안 오니까 다른 사람한테 일 안 넘기려면 이건 마무리하고 가야 하는, 하는데…….’

“김포도. 컴퓨터에 머리 그만 박아. 이거 비싼 거야. 인마.”

그렇다고 해도 매일 자정을 넘기는 건 아니고 보통은 수요일, 밀린 일을 끝내려 야근을 하다 꾸벅꾸벅 졸다보면 동네 오빠 겸 사장님이 이렇게 머리를 헝클어뜨리는 것입니다.

“어?”

고개를 들어보니 내 이마를 자신의 손으로 덮은 오빠가 말했습니다.

“포도야. 집에 가자.”

그리고 셋째……. 이 마지막 이유는 구름 뒤 달처럼 처음엔 그냥 내 마음 속 깊숙한 곳에 숨겨져 있었습니다. 어둠 속 노랗고 희미한 빛을 뿜으면서도요. 지금 생각해 보면 나는 내 마음에 예민하지 않았던 게 아니라 갑자기 둥실 떠오른 이 마음 속 빛을 별로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때 나를 찔렀던 마음 속 바늘은 그냥 그대로 그렇게 있었습니다.

그리곤 가끔 나를 쿡 하고 찔러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냈습니다.

“포도 씨. 이거 있잖아요. 먼저 해줄 수 있을까요?”

예를 들면 이런 때에요. 실장님이 갑자기 등 뒤에서 스윽 다가와 책상을 짚으며 내 이름을 부를 때 있잖아요.

“포도 씨. 이리 와 봐요.”

쿡.

도대체 그게 뭐라고 촉촉한 목소리에 내 심장은 뛰었습니다.

쿡.

생각해 보면 도대체 그게 뭐라고…… 그 잘생긴 얼굴에, 몸에 착 달라붙는 듯한 차콜 그레이 색 양복 차림에, 흰 와이셔츠 소매 밖으로 쭉 뻗은 잘생긴 손등과 길쭉길쭉한 손가락에, 단정한 손톱에, 가끔 던지는 장난스러운 말, 점심시간 구내식당에서 툭 하고 그냥 건넨 듯한 요구르트에 나는 어찌할 바 모르고 찔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잘 먹어서 어떡해? 내 것도 줘야겠다.”

언젠가 실장님에게서 다시 전달받은 서류 끝에 검은 볼펜으로 포도송이가 그려진 것만으로도 나는 홧홧해졌고,

‘이게 뭐지?’

왜인지 모르게 점점 장난삼아 던진 돌에 맞는 개구리가 된 것만 같았습니다.

‘무슨 뜻이지?’

쿡.

그 와중에 확인한 실장님의 왼손 약지엔 반지가 없었습니다.

서류에 포도송이가 그려져 있고 식당에 나온 요구르트 좀 줬다고 저 사람이 날 좋아하는 게 아닐까 하는 착각에 빠질 정도로 어린애는 아니었습니다. 그랬습니다만 나는 그를 처음 보았을 때부터 낚싯바늘에 꿴 물고기마냥 무엇엔가 찔렸고 또 사소한 행동과 말에 쿡쿡 건드려졌고 또 나를 꿴 그 바늘이 은근히 달아오르는 것까지 느껴졌습니다.

‘겨우 이런 걸 가지고 나 왜 이러는 거야?’

이런 일이 그동안 너무 없어서, 내가 이런 상황을 기대해서 그럴까? 내가 혹시 외모나 조건만 보고 이러는 건 아닐까? 나는 내게서 일어나는 반응이 너무 당황스러워 애써 고개를 돌리고 무심해져 보려고도 했지만 그게 잘 되지 않았습니다.

‘아, 안 되는데…….’

내 마음인데 브레이크를 쥔 건 내가 아닌 모양이었습니다.

‘이런 걸 기대는 했지만 이러려고 온 건 아닌데.’

나는 혼란스러웠습니다. 내 마음인데도 한참이나 갈피를 잡지 못했습니다.

설마 이렇게 사랑이 찾아온 건가?

‘사랑인가? 이게? 사랑? 사랑인 건가?’

정말 이렇게 간단히? 그 사람에 대해서라곤 아무것도 모르는데도?

……

“포도야. 김포도.”

야심한 밤, 도하 오빠가 운전을 하다 말고 내 이름을 불렀습니다. 차에 타자마자 늘 기절을 하던 내가 오늘은 눈을 말똥말똥 뜬 채로 깨어 있었거든요.

“응.”

“크흠.”

빨간불이 켜져 횡단보도 앞에 차가 섰고 오빠는 내 이름만 부르더니 헛기침을 했습니다. 걷어 올린 셔츠 아래 드러난 단단한 팔뚝. 갈라진 근육과 실핏줄.

“크흠. 큼. 회사…… 적응은 잘 돼?”

오빠는 말을 하다 말고 자신의 머리칼을 헝클어뜨렸습니다.

“응.”

“너 편하라고 한 일인데 이러다 몸 상하겠다. 너무 힘들면 빼 달라고 그래. 거기 누구 너 괴롭히는 사람은 없고?”

“…….”

나는 두 입술이 딱 달라붙었습니다.

‘오빠 사실은, 실장님이 날 괴롭혀. 요즘. 아니, 그냥 괴롭히는 건 아니고 괴로운 건 나 혼자만인 것 같아.’

그러게요. 실장님은 편하게 입고 오라는데 나는 그러지도 못하고 주말마다 옷을 사들였습니다. 그런데 마네킹을 보고 사들인 옷이 내가 입으면 그렇게 막 예쁜 것도 아니었어요. 나는 어쩐지 자존감이 많이 깎였습니다.

“…….”

나는 말없이 멍하니 있다가 백미러 속 오빠의 얼굴과 마주쳤습니다. 나를 바라보던 오빠는 시선을 돌렸습니다. 백미러 속 내 얼굴이 어쩐지 어둑해져 있던 모양입니다. 나는 웃었습니다.

“응. 아무도 없지.”

날 괴롭히는 사람은 없지. 나 혼자 괴로운 거지. 나 또 혼자 헛고생을 시작했나봐.

그날 밤 나는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컨펌한 서류에 도대체 포도송이는 왜 그려놓은 걸까? 왜?’

아닌 줄 알면서도 나는 짝사랑하는 사람들이 으레 그렇듯 과대망상을 시작했습니다.

“나 좋으라고?”

그러다 나는 나도 모르게 말을 내뱉고 말았습니다.

“나 좋으라고 그런 걸까? 나 좋으라고?”

그런데 그러면 안 됐습니다. 말에는 힘이 있다고, 그 다음부터 저울추는 완전히 기울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호감에서 짝사랑으로 말이에요.

푸쉬시시시시―

그런데 금방 바늘에 찔린 풍선마냥 부풀어 오른 짝사랑에 김이 샐 만한 이야기가 바람에 실려 내 귀에 들려왔습니다.

“아. 그렇구나.”

딱히 들으려고 했던 것도 아닌데.

별것 아닌 이야기를 듣는 것마냥 평이함을 가장해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나는 꽤 실망했고 겁을 집어먹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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