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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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 돈이야 있었어요. 돈이야 있었지만요.

    그렇지만 있으면 있을수록 좋은 게 돈이잖아요. 게다가 나는 요즘 평일 오전에 아르바이트라도 해야 하는 것 아닌가 생각할 정도로 사람이 고팠습니다. 원래 사람 만나는 것보단 집에서 혼자 노는 걸 그 누구보다도 편해했는데도 새벽에 혼자 작업을 하다보면 가끔은 외로워 나도 모르게 눈물이 주륵 흐르기도 하고 왕왕 울부짖고 싶기도 했습니다.

    ‘나 이렇게 살아도 괜찮나?’

    프리랜서 2년 차.

    ‘오늘도 사람과 대화를 한 마디도 못했는데 이렇게 살아도 괜찮나?’

    나는 고질적인 직업병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혹시 나 이 방에서 생을 마감하는 거 아닐까? 도대체 이러다 고독사하면 시신은 누가 치워주는 거지? 지금이라도 가사 도우미 아주머니라도 만나게 청소 서비스에 등록해야 하는 걸까?’

    외로움 병 말입니다.

    정기적으로 사람이 보고 싶기도 했고 직업이 적어도 세 번은 바뀐다는 백 세 시대이니 바리스타 자격증을 따서 지금부터라도 투잡 준비를 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던 와중이었으니 동네 오빠가 한 제안은 몇 번 뻗대기는 했어도 굉장히 매력적이었습니다. 또 알아요. 어쩌면 거기에서 좋은 사람을 만날 수 있을지?

    ‘괜찮은 사람이 있을까? 아. 처음부터 이런 기대를 하면 안 되는데.’

    그래서 들뜬 나는 그 주 주말을 전신 거울 앞에서 새로 산 블라우스에 스커트를 여러 벌 맞춰 보기도 하며 인형 놀이 하듯 보냈던 것입니다.

    아. 그런데 동네 오빠 회사가 뭐 하는 회사냐고요?

    “이 시간에 왜 전화했니?”

    “오빠.”

    “어.”

    “오빠 회사가 뭐 하는 회사더라?”

    “이거 진짜, 너 바보야?”

    전화를 끊자마자 오빠의 회사 홈페이지 링크 및 약력이 첨부된 긴긴 문서가 메일로 전달되었습니다.

    ‘아.’

    넵. 광고 회사였습니다.

    회사 규모는 생각보다 탄탄한 모양이었습니다. 구글링을 해보니 꽤 유명한 광고 기획사라고 합니다. 잘 다니던 공대 때려 치고 미국으로 가 뉴욕비주얼아트스쿨인가 뭔가 하는 곳에서 수학한 오빠가 차린 회사는 외국에서부터 시작된 모양인데 그곳에서도 한국에서도 여러 개의 상을 받으며 큰 기업 광고를 잇달아 성공시켰다고 합니다.

    그러고 보니 사업이 잘되어서 얼마 전 우리 다니던 중학교에 기부도 했다고 하던가?

    웨하스 과자 사이에 바른 크림의 맛처럼 오빠의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애매모호하게 떠올랐습니다. 이걸 왜 이리도 모호하게 기억하고 있느냐면 올해 새해 집에서 전을 부치다 귓등으로 들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오빠가 만들어낸 전설은 오빠가 과학 고등학교에 들어갔을 때부터 매년 구전설화 듣듯 듣곤 했습니다. 오빠는 전설 속 해태같이, 보이진 않지만 엄마들 사이에서 입말로 떠돈다는 엄친아 뭐 그런 것인 모양이었습니다.

    아무튼 그냥 하는 일마다 다 잘되는 뭐 그런 사람 있잖아요. 오빠의 오만한 이마, 높다란 콧대 위에는 늘 성공의 별이 빛나고 있는 듯했습니다.

    반짝반짝.

    그래서인지 어릴 때부터 오빠가 날 그렇게 괴롭혔는데도 아무도 믿어주질 않고 호소하면 나만 나쁜 아이 취급받곤 했습니다.

    ―넌 오빠가 잘 보살펴 주는데 도대체 왜 그러니.

    진짜진짜 그 사람 어릴 때부터 좀 밥맛이었습니다.

    ―친오빠도 그렇게는 못해주겠다. 야.

    * * *

    나는 구글링을 멈췄습니다.

    ‘그렇구나. 광고 회사구나. 꽤 크구나. 월급 제때 못 받을 일은 없겠구나.’

    그렇다고 합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내가 할 일은 무엇일까요? 디자이너라고 해도 완구 패키지 디자인 뭐 그런 것밖엔 해본 적이 없는데?

    “예. 안녕하세요.”

    나는 어쨌든 오빠 말대로 월요일 30분 일찍 회사 앞에 가 섰습니다. 서울숲 근처에 위치한 커다란 콘크리트 건물이었습니다. 인터폰을 찾아 누르고 머뭇머뭇 ‘강도하 사장님 소개로 왔습니다’ 하자 철컥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어쩐지 그 소리에 나는 바짝 긴장했습니다. 계단 위를 올라가려는데 계단과 마주한 엘리베이터가 열렸고 거기서 나오는 사람과 마주쳤습니다. 긴 머리에 안경을 쓰고 바지 정장을 입은 분이었습니다.

    “대표님 소개로 오신 분 맞으시죠?”

    그분이 절 오빠의 방으로 안내해 주었습니다. 감각적인 건물이었습니다. 삼 층으로 올라가자 탁 트인 정방형의 공간이 눈앞에 펼쳐졌습니다. 파티션 없이 어찌 보면 무질서하게 놓인 책상들, 앉을 수 있도록 창가 쪽에 마련된 알록달록한 빈백들. 회의실로 보이는 몇 개의 공간들. 한 층만 봤는데도 생각보다도 커다란 곳이었습니다.

    ‘이 건물을 다 쓰는 건가?’

    “아. 포도 씨 왔어요?”

    사장실도 생각보다 훨씬 호화스러웠고요. 그곳에 들어서고 나서야 나는 책상에 앉아 있던 오빠가 젊고 능력 있는 사장님으로 보였습니다. 오른쪽 벽면에는 검은 가죽 소파 세트, 몸통이 물결치듯 굽어진 원목 책상 위엔 몇 권의 두꺼운 책과 경제전문지, 그 뒤에 벽 한 면을 다 짜 넣은 서가에는 책 대신 주르륵 상패가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오빠는 사원이 문을 닫고 나가자마자 책상에 두 손을 짚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습니다.

    “왜 이렇게 늦게 왔어? 얌마, 일찍 오라니까. 기다렸잖아.”

    “…….”

    “자자. 이리 와 봐. 어서.”

    그리고 곧바로 동네 오빠로 돌아왔습니다. 머뭇거리던 내가 책상 가까이 다가가자 오빠가 피식거렸습니다.

    “전에 만난 것보단 사람 됐네. 평소에도 이렇게 하고 다녀.”

    “아!”

    “알았어. 알았어. 음료수 먹을래? 웬만한 건 다 있는데.”

    오빠는 양 볼에 보조개가 팰 정도로 흐뭇하게 웃으며 내 머리를 쓰다듬으려다 멈췄습니다.

    “나 일요일 마감이라 목금토는 안 돼.”

    “알았어. 월화수만 나와. 그런데 야근은 되지?”

    “야근? 야근 수당 있어?”

    “그럼, 당연히 있지. 오빠 회사 야근 수당도 안 주는 그런 회사 아니야.”

    오빠는 주도면밀하게 내 거절을 가로막았습니다.

    “응. 그럼 때에…… 따라서는.”

    “너 야근하면 내가 저녁도 사주고 집에 데려다도 줄게.”

    ‘이거! 밥 먹듯 야근하라는 뜻인가!’

    오빠의 해맑은 웃음에서 어떤 의도가 느껴졌습니다. 나는 지금이라도 벌떡 일어나 이 자리를 벗어나야 하는 건 아닌지 걱정됐습니다. 내 얼굴에서 핏기가 가시자 오빠는 다급하게 손사래를 쳤습니다.

    “일 쉬워. 쉽다니까? 야근도 기획 마감 때나 있고, 내 말은 그냥 내 옆에서 얼굴이나 좀 비추고 돈이나 받으라는 거지. 안 그래도 저번에 내려갔을 때 너네 어머니가 어찌나 걱정을 하던지.”

    “…….”

    나는 할 말이 없어졌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엄마한테 작년부터 계속 고향에 내려오라는 말을 듣고 있었거든요. 혼자서 해도 되는 일이면 왜 서울에 있는지 모르겠다, 여기에 무슨 호랑이가 사는 것도 아닌데 나쁜 놈이 나타나 물어 가면 어쩌나 하고, 어찌나 동네방네 말하고 다녔는지 그게 오빠 귀에도 들어간 모양이었습니다. 오빠가 물었습니다.

    “왜? 아예 내려가 살게?”

    “아니! 아니이~! 내가 왜? 나 서울 좋아! 계약도 미팅도 다 여기서 하는데? 나 여기서 살 거야!”

    이번에 다급해진 건 나였습니다. 동네에 아직도 제대로 된 카페 하나 없는 거기요? 엄마랑요? 말도 안 되는 일이었습니다.

    “그럼 오늘부터 일하는 거다. 알았지?”

    내가 할 일은 단순 디자인 작업과 일러스트 보조였습니다. 오빠는 간단한 일러스트가 가능한 디자이너 보조를 뽑고 싶었던 모양입니다. 일에 대한 브리핑이 끝나니 오전 9시 10분이 되었습니다. 오빠는 싱글벙글한 표정으로 책상에 놓인 전화를 들었습니다.

    “어. 이 실장. 내가 저번에 말한 애 말인데 오늘부터 출근할 예정이거든. 지금 들어와 봐.”

    전화가 끝나고 나서 몇 분 후 남자가 한 명 사장실로 들어왔습니다.

    “…….”

    그 순간이었습니다.

    “여기는 이동원 실장. 그리고 여기는 아르바이트로 일하게 된 김포도 씨. 포도 씨는 오늘부터 제1기획실에서 일하게 될 거예요.”

    “아. 안녕하세요.”

    “포도 씨 팀원들한테 소개시켜주고 일 있으면 지금 당장 주고, 시키면 뭐든지 하고 또 잘하니까 마음대로 부려. 알았지?”

    “예. 포도 씨? 안녕하세요.”

    쿡 하고 남자는 웃었습니다.

    “이름이 참 독특하네요.”

    그가 쿡쿡 웃는데 내 가슴은 마치 바늘에 찔린 것처럼 따끔한 감각을 느꼈습니다. 나는 잠깐 내가 목석처럼 굳어 있던 걸 깨닫고 황급히 고개를 꾸벅 숙였습니다.

    “아……. 예. 안녕하세요.”

    그리고 찔린 듯한 부위에서 무엇인가가 천천히 번져 나왔는데 나는 처음엔 그 감각을 알아채지도 못했습니다.

    “포도 씨, 어릴 때 힘들었죠? 다른 사람들이 이름 가지고 많이 놀렸겠어요.”

    실장님은 나를 자리로 안내하다가 문득 내려다보며 말했습니다.

    “그리고 내일부터는 여기 이렇게 차려입고 오지 않아도 돼요.”

    나는 흰색 블라우스에 검은 바지, 그리고 운동화 차림이었습니다.

    “네?”

    “우리 같은 관리직이나 외근직은 몰라도 포도 씨 같은 내근직은 사람 만날 필요 없잖아요? 그냥 평소처럼 편하게 하고 다녀요.”

    나는 나도 모르게 홀린 듯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래요. 그런데도 처음엔 몰랐습니다.

    그게 왜냐하면…… 그 감각은, 너무 오랜만이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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