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저 위 달콤한 포도.
잘 익은 포도를 올려다보며 나는……
‘도대체 어쩌다.’
어쩌다 이런 사람을 좋아하게 된 걸까 하고 생각했습니다.
올해 스물일곱이니 스물셋, 사 년 전에 마지막 짝사랑을 끝내며 나는 결심했습니다.
이제 다신 짝사랑은 하지 말자.
혼자 사랑을 한다는 건 정말로 괴로운 일이어서 신을 믿는 것도 아니었는데 나는 하늘에 대고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이름도 정체도 알 수 없지만 적어도 나보다는 더 크고 힘이 있을 무형의 존재에게 빌고 또 빌었습니다.
제게 다음이 있다면 이번엔 상대방이 나를 사랑하게 해주세요. 나를 엄청나게 사랑해서 내 음성과 말의 뜻과 말과 말 사이의 숨결과 한숨에도 하나하나 의미를 부여하며 괴로워하게 해주세요. 그리하여 다음번엔 내가 상처받을 일은 없게 해주세요.
좀 편하게, 마음 안 다치게 연애하게 해주세요.
그리고 오랜 시간이 지났습니다. 짝사랑이 할퀸 사랑의 상처도 기억도 잊혀져가고 드물지만 몇 번 연애할 기회도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나는 어쩐지 거기에 푹 빠지기 무서웠습니다. 상대방을 알지 못하고 또 상대방이 날 얼마나 좋아하게 될는지도 모르면서 나를 사랑에 내던질 수는 없었습니다. 내 마음이 더 커져버리면 괴로울 테니까요?
‘그래, 헛수고를 하느니 혼자 있는 게 낫지.’
나는 다가오는 기회를 계속해서 떠나보냈습니다. 더 좋은 사람이 있을 거야, 하고 생각하면서요.
그런데 덜컥, 덫에 걸린 듯이 이 꼴이 되었습니다.
사랑.
물론 사람은 그것이 둘이든 하나든 외로운 존재지만, 조금 더 있다간 어쩐지 목말라 죽어버릴 것 같고 앞으로 사랑을 할 기회가 영영 찾아오지 않으면 어쩌나 하던 때, 하고 있는 일의 재미도 어쩐지 시들시들해지고 더 이상 뭘 노력해야 하는지 알 수 없어진 때, 삶은 마치 이정표 없이 사막을 걷는 일 같다고 생각이 될 무렵 그것은 짠 하고 나타난 것입니다.
갑자기 베일을 벗고 모습을 드러낸 오아시스처럼요.
그런데 또 짝사랑.
처음엔 어 괜찮은 사람이네, 하고 생각했을 뿐인데 어쩌다 이렇게 된 거지?
‘내가 도대체…….’
달콤한 포도를 올려다보면서 나는 어쩌다 이런 사람을 좋아하게 된 걸까 하고 생각했습니다.
‘뭘 잘못한 거지?’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또 짝사랑이라니요. 나는 도무지 이유를 알 수 없었습니다.
* * *
여자가 더 사랑하면 안 되나 보다.
이렇게 말하면 주체적인 여성이 못된다고 할지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혼자 하는 사랑은 너무도 힘들고 자존감 뚝뚝 떨어지는 일이었어요. 나는 왜 사랑하는 사람보다는 나를 사랑하는 사람을 선택해야 한다고 사람들이 말하는지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오랫동안 기다렸는데, 이렇게 오래 수많은 기회를 놓쳐가며 목말라했는데,
도둑처럼 내 마음을 벌컥 열어젖히고 들어온 게 짝사랑이라니.
헉, 하고 생각했을 때 이미 마음은 내가 어찌할 수 없을 정도로 부풀어 있었습니다. 도대체 사랑이란 왜 이렇게 예고도 없이 들이닥치는 것일까요? 앞으로의 일을 생각하니 나는 덜컥 겁이 났는데 그러는 와중에도 마음은 부풀어 오르는 걸 멈출 줄 몰랐습니다.
점점 짙고 강렬하게 흘러드는 포도의 향.
나는 엄지와 집게손가락으로 코를 막고 입으로 하아 하고 숨을 내뿜었습니다.
맛있어 보이는데 손에 닿지 않을 곳에 떡하니 자리 잡은 포도.
‘저건 신포도일 거야. 아니 저건 독이야. 독이라고.’
차마 포기는 못하고 마치 굶주린 여우처럼 맴맴 도는 나날은 이렇게 시작된 것입니다.
‘독인데…… 또 짝사랑이라니. 크흐흑.’
* * *
제 이름은 김포도. 나이는 스물일곱, 직업은 웹툰 작가 겸 일러스트레이터였습니다. 원래부터 웹툰 작가였던 건 아니고 예전엔 완구 업체에서 패키지 디자이너로 일했는데 이런저런 일로 퇴사한 뒤 어쩌다 보니 이 신생 직업 전선에 뛰어들게 되었어요. 다행히 플랫폼에서 연재를 하고 있어 당장은 고정적인 수입이 나오고 있었고 간간이 외주도 들어오고 있었습니다. 앞으로야 어찌될지 모르지만 현재는 수입이 혼자 살 수 있을 만큼 짭짤했어요.
내 입으로 말하기는 뭐하지만 제 일상을 주제로 그린 웹툰이 인기가 좀 있었거든요.
그러니까 저는 좀 성공적인 프리랜서였습니다. 일에 있어선 상당히 주체적인 여성이었고 가끔은 잡지에서 인터뷰가 들어오기도 했고 저를 부러워하는 웹툰 지망생들도 많았는데, 그게 짝사랑 앞에선 그것도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아.
그런데 어쩌다 짝사랑을 하게 되었냐구요? 이 일의 시작을 살펴보자면 다섯 달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때는 봄, 나는 아주 오래간만에 집 밖을 나섰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반 강제적으로 끌려나왔다고 해야 옳지만 뭐 그렇습니다. 그래도 오랜만의 외출이었고 햇볕은 딱 알맞게 따스해서, 약속에 조금 일찍 나온 나는 들떴습니다.
일부러 조금 일찍 나와 카페테리아 테라스석에 자리 잡고 앉은 다음 가져온 책도 우아하게 읽고요. 나를 여기로 질질 끌어낸 동네 오빠는 약속 시간 십 분 전에 나타났습니다.
“언제부터 온 거야?”
“응? 금방.”
때는 책을 삼분의 일 정도 읽어가던 때였습니다. 헝클어진 듯 보이는 반곱슬머리, 아이보리색 캐시미어 스웨터에 진한 색 청바지, 팔에 찬 롤렉스시계, 훤칠한 키에 스웨터로도 가려지지 않는 실팍한 가슴팍과 널찍한 어깨, 오빠가 등장한 순간, 순간적으로 사람들의 시선이 오빠를 향한다는 걸 알 수 있었습니다.
“금방은 무슨.”
이미 주문을 마쳤는지 큼지막한 유리잔에 얼음 가득한 커피를 들고 들어온 동네 오빠는 내 맞은편 자리에 걸터앉아 읽던 책을 툭툭 쳤습니다.
“잘 지냈냐?”
정말로 오랜만이었습니다. 오빠 유학이랑 나 이것저것 계산해 보면 장장 칠 년, 칠 년이던가…….
“넌 무슨 세월이 이렇게 흘렀는데 변한 게 없냐?”
“오빠는?”
“내가 변한 게 없어?”
“그래, 변한 게 어디 있어.”
“그거…… 칭찬인가?”
오빠는 갑자기 얼굴이 불그스름해지더니 자신의 턱이며 뺨을 슥슥 쓸었습니다. 정말 말 그대로 어제 만난 것처럼 오빠는 변함없어 보였습니다. 아, 여기서 한 번 짚고 넘어가자면 이 동네 오빠에게 폴인 러브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업무 미팅 차 이곳에서 만났으니까요.
“그런데 너 요즘 한 달에 몇 번 집에 나서냐?”
오빠는 칠 년 만에 봐놓고 시비였습니다.
“한 번?”
“…….”
“두 번?”
“뭐…… 동호회라도 하지 그래?”
“일이 바빠서 못해. 아, 아니 외주할 생각은 있고, 있어서 여기 온 거고!”
“외주할 시간에 나가서 운동이라도 하라고. 밥은 제때 먹는 거지?”
“오빠가 내 엄마야?”
“죽는다.”
몇 번 시답잖은 잔소리 후에 오빠가 두툼한 팔목에 걸린 시계를 바라보며 말했습니다.
“시간 없어서 본론만 말하는데 너 파트타임으로 우리 회사 일 좀 해라. 옆에 두고 일 시키면서 죽었는지 살았는지 보게.”
“뭐?”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습니다. 왜냐하면 무슨 업체 사장님이 되었다는 오빠는 나를 직원이 아니라 외주하라며 불러낸 것이었으니까요.
“내가 왜? 프리랜서에게 회사 안 가는 게 얼마나 큰 메리트인데?”
나는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습니다. 오빠가 인상을 썼습니다.
“왜? 너 하는 일 때문에 그래? 이거 매일 안 나와도 되는 일이야. 그냥 나와서 바깥바람 쐬고 사람 좀 만난다 생각해.”
“그래도 그건 싫어.”
“쓰읍.”
오빠의 미간에 주름이 깊어졌습니다.
“이게 하라면 하지 뭔 말이 많아?”
나는 순간 쫄았습니다.
“어, 얼마 줄 건데?”
“…….”
“아니 일 시킬 거라며. 오빠 돈 많이 벌잖아. 많이 주면…… 할게. 많이 주면.”
“이게 벌써부터 돈독이 올라가지고.. 그냥 주는 대로 받아.”
오빠는 도대체 언제 가져왔는지 모르게 갈색 서류 가죽 가방에서 파일에 철한 계약서를 꺼내며 말했습니다. 저놈의 계약서. 사장의 피를 타고난 건지 어쨌는지 참으로 주도면밀한 인간이었습니다.
“……언제.”
어쨌든 나는 계약서를 읽었습니다.
“언제부터 출근할까요? 사장님?”
그리고 말했습니다.
“다음 주 월요일부터.”
아니. 나도 돈 벌기는 하는데 수입이 일정치 않은 게 큰 문제니까 만약에 웹툰 업계가 시들해지면 경력 단절이 될 수도 있고……. 나는 내 머릿속 자기합리화 기계를 돌렸습니다.
“9시 출근이야. 첫날은 30분 전에 들러서 나한테 인사하고.”
오빠가 비죽비죽 음산하게 웃는 것도 모르고 말입니다.
“그럼 난 간다.”
“아!”
오빠가 내 머리칼을 확 하고 헝클어뜨리며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진짜 이러지 말랬지!”
내가 그의 등 뒤에 대고 외쳤습니다.
* * *
‘와. 고정 수입이다! 와!’
그날 나는 한 치 앞도 모르고 희희낙락하며 머리를 하고 화장품을 잔뜩 사 돌아왔습니다. 집 근처에는 화장품 가게가 별로 없거든요. 그나저나 정말이지 오랜만의 출근이었습니다. 나는 출근 때 신을 운동화와 블라우스도 몇 벌 샀습니다.
‘그런데 거긴 괜찮은 사람 없으려나?’
아. 그런 생각으로 두근거리기도 하며 말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그 일을 냉큼 수락하는 게 아니었는데.
나는 그렇게 기나긴 짝사랑의 수렁에 나도 모르게 한 발을 내딛었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