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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중생계 (449)화 (449/449)
  • 외전 구염황 3

    봉씨 가문은 자신들만큼 억울한 시댁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가문에 어렵사리 아이가 생겼다. 봉씨 일가는 조상에게 제를 지내고, 절에서 아이의 명복을 빌며 조촐한 연회를 열고 싶어 했다. 무심을 가장해 자신들이 곧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될 것이라는 아름다운 소식을 알릴 계획이었다.

    그러나 황실에서 선수를 쳤다. 황실에서는 공주의 회임을 축하하기 위해 나라의 모든 경작지를 대상으로 일 년간 조세를 받지 않을 예정이며, 대사면을 실시하겠다고 공포했다. 온 나라가 기쁨과 흥분으로 들썩였다.

    봉 어사禦史는 마음이 답답했다. 준비하던 조촐한 의식들과 그의 의기양양함은 순식간에 황실의 위풍당당한 위세에 밀려 하찮은 것이 되고 말았다. 하지만 무슨 소용이 있으랴. 아들이 맞이한 사람은 이 나라의 공주였다. 그것도 유일한 공주. 공주 전하의 일거수일투족에 그들은 관여할 수 없었다.

    사실 봉 부인은 이 상황이 너무나 좋았다. 시간을 절약해 마작패를 몇 번이나 더 만질 수 있다는 사실에 그녀는 생기가 넘쳤다. 그녀는 본래 접대하는 걸 싫어했고, 조상을 위해 지내는 제사는 더욱 싫어했다. 적게는 사흘에서 길게는 보름까지 이어지는 행사를 치르고 나면 녹초가 되어 거의 죽을 지경이 되기 때문이다.

    구염상 또한 부모님을 먼저 챙기고 시부모님을 잊는 며느리는 아니었다. 그녀는 입궁했다 돌아오는 길에 바로 봉씨 가문에서 사흘을 묵었다.

    봉씨 가문에서는 다시 공주부로 돌아가는 구염상에게 감히 누구도 시집에서 더 머물러야 한다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 미쳤다고 감히 황제와 황후께서 공주부에 하사한 태의, 의녀와 경쟁하겠는가. 만일 태아가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그들은 황제에게 목을 바쳐야 할 터였다. 아무리 손자가 소중해도 신분을 생각하면 공주는 그냥 공주부에 머무르는 것이 나았다.

    비록 시집에 가서 살 생각은 하지 않았지만 구염상은 이렇게 쫓겨나듯 공주부에 돌아오는 것이 서운했다.

    “상공, 다들 너무해요.”

    “그러게나 말이오. 오로지 당신의 남편인 나만 너무한 구석이 없소.”

    구염상은 약간 경악했다. 이게 무슨 대답이란 말인가.

    ‘내가 한 말에 맞는 대답인가? 내 말뜻을 제대로 알아듣긴 한 거야?’

    총애를 받고 응석을 부리던 구염상은 혼인 후에는 가족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고 곧장 봉익에게 화풀이를 했다. 그녀는 조금이라도 마음이 언짢으면 곧장 성질을 부렸고, 꼭 봉익이 달래 주어야만 그제야 화를 풀었다.

    봉익은 구염상이 어렵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혼인 후 한 달 뒤부터 그녀는 저녁 시간을 제외하면 그를 상대해 주지 않았다. 지금 이 상황은 봉익이 구염상과 시간을 보내기 위해 심혈을 기울인 끝에 겨우 얻어 낸 결과였다. 그러니 봉익이 어찌 공주를 귀찮다고 생각하겠는가.

    깍듯이 예를 갖춰 대하는 사이를 제외하면 어떤 부부에게 남는 건 그저 모시기 힘든 관계일 뿐이었다.

    * * *

    어떤 이는 기뻐하고 어떤 이는 근심했다.

    딸이 회임한 지 벌써 두 달이 지났다. 그런데도 구염황은 지금까지도 마음에 들어 하는 여인이 없어 장서열을 고민하게 했다.

    장서열은 조례가 끝난 시간을 틈타 아들을 불러 생각을 물었다.

    “후궁으로 선발할 아이들 중 몇 명이 꽤 괜찮은 것 같더구나. 외모는 제쳐 두고라도 네 아버지께서 요구하는 아이가 아예 없는 것도 아닌 것 같아. 너와 비슷한 견해를 가진 아이들 말이다. 정사에 관해 쓴 글을 읽어보니 제법 식견이 있어 보이기에 그 글들을 네 책상에 놓아두라 일렀는데, 넌 어째서 아무런 관심도 없는 것이냐?”

    비슷한 말을 하도 많이 들은 탓에 구염황은 이런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법을 배우게 되었다.

    “어마마마, 별것도 아닌 일로 저를 자꾸 부르시는군요. 모두 좋은 규수들이고, 어마마마와 아바마마께서 그리 조급하시다면 상아 때처럼 제비뽑기를 하시면 됩니다.”

    순간 장서열은 사레가 들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녀는 얼른 아들을 내쫓아 버렸다.

    구염황은 정말 아무 생각이 없었고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다. 비록 가끔 참지 못하고 그녀가 깊이 잠든 방의 창밖에 서서 밤을 지새우기도 했지만 그녀의 마음에 그가 없다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았다.

    구염락은 아들 일에 크게 상관하지 않았다. 딸이 회임을 했으니 설령 구염황이 자식을 못 낳는다 해도 후계를 이을 상속자가 있는 셈이었다. 이제 아들의 혼사는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당연하게도 구염락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그게 아니었다면 천하에 대란이 일어났을 일이었다. 중신들은 태자의 대혼大婚을 재촉하는 상소를 올렸고, 나날이 그 내용은 절박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자는 여전히 모르는 척했고, 황제 또한 이에 대한 별다른 언급이 없었다. 대신들의 말은 솜방망이처럼 조금도 효력이 없었다.

    하지만 간언을 올리는 건 신하의 직무였다. 설령 몸이 가루가 되고 뼈가 부서지는 한이 있어도 의로운 일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게 마땅했다.

    듣다가 지겨워진 구염락은 신하들에게 직접 태자를 찾아가 귀찮게 굴라고 했다. 그는 태자만 입을 열면 즉시 대혼을 거행하겠다고 선포했다.

    구염황은 아버지보다 강한 저항력을 갖고 있었다. 간신들이 무슨 말을 하든 구염황은 끄떡도 하지 않았다. 그는 아무리 듣기 좋고 허황된 말에도 흔들리지 않은 채 나름의 생각을 견지했다.

    간신들이 태자를 공격해 온 봄부터 수녀 간택이 끝날 때까지, 회임한 공주가 소세자小世子를 낳을 때까지, 여름이 가고 서늘한 가을이 올 때까지, 그렇게 청산의 책임자가 바뀔 때까지도 구염황은 끝내 혼례를 올리지 않았다.

    * * *

    스물두 살의 구염황에게는 두 살짜리 조카가 있었다. 조카는 이제 막 사람을 무는 새로운 기술을 터득하여 만나는 누구나 기쁘게 한두 번씩 물었고, 그에게 물린 어린 궁녀들은 속으로는 매우 분했으나 감히 이를 표현하지는 못했다.

    구염황은 공주부에 머물렀다. 몸에 걸친 암황색 태자복은 곧고 우뚝한 몸을 돋보이게 했으며, 준수한 이목구비는 결코 아버지에 뒤지지 않았다. 비록 구염락이 지닌 진중함과 노련함이 부족한 모습이었지만, 구염락 역시 아들에 비해 활력과 초월적인 정신력은 부족했다.

    누이동생과 부마가 없는 틈을 타 슬그머니 발을 뻗은 구염황은 작은 엉덩이를 치켜든 채 화초를 만지작거리고 있는 어린 조카를 잔디 위로 걷어찼다.

    영문을 몰라 하던 꼬마는 외숙이 놀아 주자 돌연 신나서 바닥에서 이리저리 뒹굴었다. 더없이 신이 난 아이는 간지럼을 구걸하고 있었다.

    구염황은 조카의 사랑과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그 즉시 쭈그리고 앉아 좌우로 아이의 몸에 간지럼을 태우기 시작했다. 꼬마 녀석은 도전받은 어린 수탉처럼 땅바닥에서 억지를 부렸다.

    구염황은 바닥에서 뒹구는 귀여운 조카를 보면서 순간 가슴 속에 따뜻한 사랑이 넘쳐흐르는 걸 느꼈다. 그는 생각했다. 어쩌면 정말 어사禦史의 말처럼 혼례를 치를 때가 된 건지도 모르겠다고.

    * * *

    어쩌면 정말로 때가 된 건지도 몰랐다. 또 어쩌면 권염아가 구염황에게 ‘당신이 기다리는 사람은 영원히 오지 않을지도 몰라요. 하지만 난 언제나 당신을 기다릴 거예요.’라고 말했는지도. 아마도 그녀는 말을 마친 후 옅은 미소를 지어 보이며 돌아오지 않는 대답을, 권씨 가문 특유의 모습으로 의연하게 받아들였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당시 구염황은 권염아의 손을 잡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랬다면 그녀는 연말에 아버지가 건넨 혼담을 승낙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만약 그때 권염아가 최후의 승부를 걸지 않았다면, 구염황 역시 권씨 가문에 아직 시집가지 않은 어린 딸이 있다는 걸 기억해 내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세상일은 참으로 공교로웠다. 구염황이 혼인을 해야겠다고 결심했을 때, 때마침 권염아가 그의 곁에 나타났다. 옅은 미소와 찬란한 자신감을 갖고서. 마치 세심한 돌봄이 없어도 맹렬하게 잘 자라는 식물처럼, 구염황에게 딱 맞는 여인이 되어.

    구염황과 권염아의 혼사에 권서함은 이상할 정도로 침착했다. 구염락조차 이를 궁금하게 여기며 왜 발을 동동 구르지 않느냐고 물어볼 정도였다.

    구염락을 한 번 흘겨본 권서함은 구태여 황제를 상대하지 않았다. 하지만 권서함은 딸이 그날 밤 서재를 찾아와 했던 말을 떠올렸다.

    “제 인생은 본래 행운이었어요. 아버지 같은 분이 제 부모님인 덕분에 다른 여인들은 밟아 보지 못할 눈부신 세계를 배웠으니까요. 전 그 사람을 좋아해요. 아버지가 곤란해 하신다는 거 알아요. 다 제 잘못이에요.”

    말을 마친 딸은 장난스럽게 웃었다. 그토록 담담하게 웃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자신을 향해 아이처럼 웃는 모습이, 권서함은 몹시 애석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전 아버지의 책임이 아니에요. 저에게는 제가 걸어가야 할 길이 있어요. 저를 믿어 주실래요? 아버지가 가르치고 길러 낸 딸을 믿어 주세요. 실망시키지 않을게요.”

    권서함은 귀신에 홀린 듯 딸을 믿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당시에는 정신이 나갔던 것만 같았다.

    하지만 딸이 혼례복을 입고 짓던 미소와, 손을 뻗어 자신을 안아주고 위로하던 때를 떠올리면 권서함은 문득 정말로 재수가 없게 된 건 구염황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전무후무한 성대한 혼례식이 거행되었다. 이는 백성들에게 태자가 황제의 친아들이라는 걸 확실히 알려 주는 증명과도 같았다. 공주의 혼례와 비교해 결코 작지 않은 규모였다.

    한 남자의 아내이자 한 아이의 엄마인 구염상은 집으로 돌아가 남편을 몇 번 꼬집은 뒤에야 비로소 마음속 분노를 가라앉힐 수 있었다.

    “그래도 다행히 혼수는 저보다 많지 않았어요.”

    봉익이 태연하게 답했다.

    “뭘 모르는군. 태자 전하의 혼수는 나라 전체요.”

    구염상이 순간 발끈했다.

    “봉익, 죽고 싶어요?”

    봉익이 얼른 도망쳤다.

    “난 아이를 보러 가겠소!”

    “저녁에 두고 봐요!”

    * * *

    신혼 후 더 윤이 나고 편안한 나날을 보내는 사람은 태자가 아닌, 태자비였다.

    혼례를 치른 후에도 태자는 평소와 같이 일했다. 그는 혼인 후 휴가도 갖지 않고 해야 할 일을 했다. 패기가 넘치는 그는 이전보다 더 고상해 보였으며, 냉기가 덜어진 얼굴에는 혼인한 남성에게서 느껴지는 멋스러움이 더해졌다.

    권염아는 조용한 걸 좋아했다. 가장 좋아하는 건 하릴없이 서재에서 책을 읽는 일이었다. 그녀의 혼수는 백국百國의 고서적으로, 이는 문학적으로 진귀하여 황제가 줄곧 갖고 싶어 하던 귀한 소장품이었다.

    하지만 권염아는 책 읽는 장소를 바꾸기 위해 혼인한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일상에 정성을 다했다. 퇴청하여 돌아온 남편의 곁에 그녀는 항상 함께 있었다. 그에게 필요한 찻잔을 건네주고, 수건을 건네주고, 겉옷을 건네주는 건 언제나 그녀의 몫이었다.

    평소 권염아는 말수가 없었고, 구염황도 딱히 이것저것 묻지 않았다. 그러나 보통 입을 열지 않는 그녀도 침실에서만큼은 달랐다. 자신의 구역에서 권염아는 즉시 활기차게 변해 하루 종일 일어났던 자질구레한 일들을 이야기했다. 어떤 때는 조용히 촛불 아래 앉아 어설픈 솜씨로 구염황의 포말布襪을 만들어 주기도 했다.

    가끔 권염아는 이 망할 놈의 자수가 병법이나 역사서보다 더 어렵다고 푸념을 늘어놓기도 했다. 그럴 때면 구염황은 가까이 다가가 그녀의 손에 들린 일감을 바라보고는 그녀의 머리를 톡톡 치며 일깨워 주었다.

    “안 신을 거야.”

    하지만 다음날 그의 발에는 어김 없이 포말이 신겨졌다. 구염황은 꼭 한 마디씩 투덜거렸다.

    “언젠가 내가 임무를 수행하다 제대로 착지하지 못하면 그건 다 이 포말이 너무 거슬려서일 거야. 난 억울하게 죽기 싫어.”

    침대에 비스듬히 기댄 권염아가 긴 머리를 늘어뜨린 채 맑은 눈빛으로 구염황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절대 양보하지 않았다.

    “정말 그런 일이 생긴다면 그건 전하의 운이 나쁘거나 실력이 부족해서겠죠. 이런 하찮은 포말 때문에 목숨을 잃는다는 게 말이 되나요?”

    “권염아, 감히 내게 실력이 부족하다고 했겠다?”

    권염아가 몹시 억울해하며 눈을 깜빡였다.

    “지금 제가 깨어있는 게 바로 당신 실력이 부족하다는 걸 증명하는 게 아니겠어요?”

    그녀가 천진난만한 눈동자를 깜빡이자 온 세상이 환하게 빛나는 것 같았다. 구염황이 수치와 분노를 금치 못하며 외쳤다.

    “권염아, 기다려!”

    * * *

    처음에 구염황은 확실히 권염아를 좋아하지 않았다. 권염아를 백 번 만났을 때 느낀 감정은 류정헌을 다시 만났을 때 느낀 감정에 비하면 미미하기 그지없었다.

    구염황은 언제부터 권염아를 좋아하게 되었을까? 그에게 물어본다면 그도 정확히 말할 수 없었다. 다만 비가 내리던 평범한 어느 날, 두립을 쓴 권염아가 말리려고 내놓았던 책을 매우 낭패한 기색으로 거두는 모습을 본 구염황은 집으로 돌아가 그 모습을 떠올리며 매우 재미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는 정신없이 웃었다.

    어쩌면 그날 이후인지도 모른다. 구염황은 권염아와 조정 일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는 머리 아픈 나랏일에 대해 푸념을 늘어놓고, 관원들에 관한 재미있는 일화를 이야기했다. 수다를 떨기 시작하면 그는 몸만 커다란 어린아이 같았고 태자의 위엄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권염아는 가끔씩 그의 말에 참견을 하고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가끔씩 구염황은 옳고 그름을 떠나 그녀의 말을 귀담아들으며, 말의 속뜻을 생각했고, 규방에서 자란 그녀의 순진함과 얼토당토않은 말을 비웃기도 했다.

    하지만 권염아는 그의 말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녀는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할 뿐이었다. 옳고 그름을 누가 신경 쓰겠는가.

    * * *

    하루하루가 평탄하게 흘러갔다. 누군가 어떤 나날을 보내느냐는 그가 얼마나 윤택한 삶을 사느냐에 달려 있었다.

    다른 사람이 없을 때면 권염아는 매우 오만하게 굴었다. 사람들 앞에서 의젓하고 매혹적이던 자태는 온데간데없이, 밉보인 사람에게 그녀는 막무가내로 매운 맛을 보여 줬다.

    구염황은 권염아가 혹 고의로 자신을 속인 건 아닌지 하는 의심이 들었다. 소탈하고 온화해 보이던 그녀가 혼인 이후 온갖 복수를 일삼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지금처럼, 태자비가 앞에서 길거리를 한가로이 거닐며 구경할 때 태자인 그는 머슴처럼 그녀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화려한 비단옷을 입으면 너무 눈에 띄는 탓에 그녀는 좋은 마음으로 그에게 머슴옷을 빌려주었다.

    고개를 들어 작열하는 태양을 바라본 구염황이 여러 번 부탁했다.

    “우리 좀 쉬었다 가자.”

    “곤란해요.”

    고귀한 얼굴에 홍옥색 차림을 한 어린 부인은 남편의 말을 단칼에 거절했다.

    구염황은 얼굴을 찌푸리며 계속 뒤를 따랐다. 하지만 권염아가 향한 곳은 시원한 포의방이었다. 구염황은 순간 몸과 마음이 후련해지는 걸 느꼈다.

    ‘귀여운 것, 내 걱정이 되긴 하는구나?’

    “여보, 이 천에는 흠집이 있으니 다른 걸 고릅시다.”

    한 남자가 회임한 것이 분명한 여인을 감싸며 몸을 돌렸다. 뭐라 말하려던 여인은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싱긋 웃으며 남자의 보호 아래 가격을 확실히 명시한 가게로 갔다.

    순간 옷감을 고르던 권염아의 손길이 멈칫했다. 한쪽에 선 부부를 바라보던 권염아는 여인과 시선이 마주치자 빙그레 웃어 주었다.

    잠시 멍하니 서 있던 류정헌은 상대가 웃어보이자 마찬가지로 예의 바르게 미소를 지었다.

    아내에게 왜 웃냐고 묻던 남자가 아내와 눈길을 주고받은 홍옥색 복장의 부인을 바라보았다. 때마침 포의방 주인이 허겁지겁 뛰어내려와 부부를 2층으로 맞이하려 했다. 그러나 그 옆에서 부인의 뒤를 따르는 남자를 발견한 순간, 주인은 당황하여 허둥지둥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가 다시 일어나 두 다리를 벌벌 떨었다.

    남자가 품에 안은 아내에게 저들을 아느냐고 물어 보려 할 때였다. 머슴 복장을 한 남자를 보고 순간 멍해 있던 류정헌이 이내 빙그레 웃었다.

    “오랜만이에요.”

    구염황도 담담하게 씩 웃었다.

    “오랜만이오.”

    포의방 주인은 눈치가 빠른 사람이었다.

    “태자 전하께서는 마 대인과 마 부인을 아시는지요? 그럼 함께 가셔서 골라 보시는 게 어떠실는지요. 저희 상점의 영광으로 알겠습니다.”

    권염아가 구염황의 팔짱을 낀 채 웃으며 답했다.

    “좋다. 하지만 물건이 별로면 사지 않을 것이다.”

    포의방 주인이 즉시 고개를 끄덕이며 굽실거렸다.

    “태자비마마의 말씀이 옳습니다. 물건이 별로면 아예 상점을 헐어 버리셔도 됩니다요!”

    권염아는 입을 가리고 웃으며 사람들이 보지 않는 틈을 타 구염황의 허리를 세게 꼬집었다. 그녀는 잊지 않고 있었다. 과거 구염황이 류정헌을 감싸던 모습을.

    구염황은 꼬집는 부인의 손을 움켜쥐며 허허 웃었다.

    ‘그게 벌써 언제적 이야기인데 질투를 하는 거야?’

    시선을 거둔 류정헌이 남편과 함께 무릎을 꿇으며 태자전하 만세, 태자비마마 만세라는 말로 마침내 군주와 신하의 선을 그었다.

    과거 그녀 앞에서 수줍게 서 있던 남자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신분으로 인해 한 여자의 마음에서 영원히 잊을 수 없는 과거가 될 운명이었다.

    -외전 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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