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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중생계 (447)화 (447/449)

외전 구염황 1

혼례 후 셋째 날은 풍습에 따라 친정으로 돌아가는 날이었다. 전생의 구염상은 돌아가지 못했지만, 이번 생의 구염상은 궁에서 언제 오냐고 몹시도 재촉하는 통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한쪽에 앉아있던 봉익은 매우 긴장한 부인을 바라보며 웃었다. 구염상이 늘 자리를 잡고 앉아 책을 보던 의자에 앉은 그는 매혹적이면서도 몹시 한가해 보였다.

구염상은 돌연 토라졌다.

“당신은 긴장도 안 되나요?”

“내가 매일 폐하를 알현한다는 걸 잊었군요.”

“이게 알현과 같나요?”

구염상은 매우 불쾌해하며 말했다. 단정하게 차려 입고 느긋하게 앉아 있는 그의 모습을 보자 갑자기 오라버니와 봉익을 다시 겨루게 만들고 싶어졌다.

‘그래, 진작부터 이렇게 교활한 작자일 줄 알았어! 겉으로 점잖은 척하더니 드디어 본색을 드러내는군!’

상황을 눈치챈 봉익은 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구염상의 머리에 꽂힌 각양각색의 비녀를 정성껏 매만져 주었다. 그녀의 옷매무새가 완벽하고 자태가 아름답다는 것을 확인한 그는 온갖 비유를 들어 가며 그녀를 여러 차례 칭송했다. 마침내 구염상의 얼굴에 웃음꽃이 활짝 피자 봉익은 그녀의 손을 잡고 황제를 알현하기 위해 입궁했다.

* * *

눈 깜짝할 새 일 년이 지나 봄이 왔다. 푸르른 자연 아래 만물이 소생하고 강물이 흘렀다. 마치 하룻밤 새 대지가 바뀐 계절로 단장한 것 같았다.

연경에서 황권의 뿌리 아래 산다는 것은 세간에서 가장 큰 부귀를 지니는 것과 동시에 예측할 수 없는 황명을 받들어야 한다는 것을 뜻했다. 이미 중년에 가까운 나이가 된 권서함은 밀서를 잡은 손을 꽉 움켜쥐었다.

언제나 온화한 그가 이렇게 화가 난 건 태어나서 두 번째였다. 권서함은 너무 화가 난 나머지 당장이라도 황궁에 뛰어 들어가 구염락을 황위에서 끌어내리고, 한 대 쥐어 패기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권서함의 딸 권염아는 이제 겨우 열두 살이었다. 열둘! 그런데 입궁을 해 태자비 간택에 참여라고? 구염황이 이를 역겹게 생각할 게 두렵지도 않은 건가?

삼을 넣은 탕을 들고 들어오던 백구아白丘兒는 남편의 얼굴에 먹구름이 잔뜩 드리워져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상공, 왜… 왜 그러세요? 무슨 일이에요?”

“아니오.”

고개를 돌린 권서함이 밀서를 꽉 움켜쥐었다. 그는 이 일을 부인에게 알리지 않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아랫사람이 모른 척한다고 해서 윗사람이 신하의 마음을 헤아려 주는 것은 아니다. 특히 구염락이 그랬다. 그가 마음에 드는 귀족 중 하나인 권씨 가문의 딸을 쉽게 놓아 줄 리 없었다. 누가 구염황의 진정한 인연인지 모르니 일단 모두 입궁시키자는 심산이었다.

한 달 뒤, 입궁을 앞둔 삼백여 명의 수녀 명단을 살펴 보던 구염락은 그 중 권씨 가문이 명단에 없는 것을 보고는 아무렇지도 않게 추가로 권염아의 이름을 덧붙여 적었다.

태자비 간택 업무를 맡은 관원이 명단 대조를 위해 물러가자 어두운 표정으로 붉으락푸르락하던 권서함은 결국 아끼던 벼루를 내던져 깨뜨린 뒤 소매를 뿌리치고 황궁으로 돌진했다.

이 상황은 과거와 매우 흡사했다. 과거에도 권서함은 이곳에 난입해 구염락과 싸웠다. 비록 패하고 말았지만, 그는 절대 후회하지 않았다.

그리고 오늘, 권서함은 다시 한 번 이곳을 박살 내고 싶었다.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자신을 숨 막히게 만드는 이 황궁을 부숴 버리고 싶었다.

구염락은 이를 전혀 알지 못하는 양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를 황위에 앉힌 건 말한 바를 반드시 지키는 태도가 아닌, 상황을 통제할 줄 아는 능력이었다.

권서함은 자신을 이상하게 쳐다보는 주위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성큼성큼 황제의 집무실로 들어갔다. 그는 높은 자리에서 날이 갈수록 위엄이 더해가는 남자를 노려보며 한 자 한 자 힘주어 말했다.

“폐하, 사람을 우습게 보지 마십시오!”

마침 집무실에서 국무를 보고하던 대신들은 상황이 심상치 않은 것을 보고 황급히 자리를 피했다.

엄숙한 자세로 붓을 내려놓은 구염락이 수년간 화난 모습을 보이지 않던 애경을 바라보았다. 언제나 담담하고 온화하던 신하가 격분해 있자 구염락은 문득 피가 역류하는 듯한 흥분을 느꼈다.

“무슨 일이지?”

권서함은 그를 갈기갈기 찢지 못하는 게 한스러웠다. 구염락은 어렸을 때부터 줄곧 태도가 불경했다.

“폐하! 제 여식은 이제 겨우 열두 살입니다. 어찌 태자비 간택에 들라 하십니까! 지금 이 궁 안에 소신의 누이동생도 있다는 걸 잊으셨습니까? 이러면 소신의 심정이 어떻겠습니까!”

권서함을 한참 동안 바라보던 구염락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허면 그대의 누이동생을 돌려줄 테니 네 여식을 입궁시켜라.”

이런 대답을 들을 줄 몰랐던 권서함은 순간 정신이 멍해졌다. 누이동생 권여아는 오랜 세월 자신의 신념을 지키며 궁에서 조용하게 지내 왔다. 권서함은 오라버니로서 누이동생의 뜻대로 살게 해 준 적이 단 하루도 없었다. 그는 그게 못내 한스러웠다.

그런데 오늘, 구염락이 이런 뻔뻔한 이유를 들어 누이동생을 출궁시켜주겠다고?

권서함은 이 모순된 상황에 어이가 없어 외치고 싶었다.

‘무슨 근거로! 너희들 마음대로 여아를 입궁시키더니, 이제는 출궁을 시키겠다? 구염락이 정녕 여아의 심정을 생각해 본 적이 있단 말인가! 정심전에 있는 여아가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걸 신경 쓰기나 하는 거냐고!

권서함은 구염락이 얼마나 무정한 사람인지 다시금 깨달았다. 높은 자리는 춥고 외로운 법이지만, 구염락은 권세를 얻는 대신 일생을 바쳐도 사랑을 얻지 못하는 비극적 숙명을 운 좋게 피해갔다. 하지만 무슨 근거로 그의 아들까지 그런 행운을 누려야 한단 말인가!

권서함은 구염락을 훤히 꿰뚫고 있다고 할 수 있었다. 구염락은 여아를 신경 쓰지 않았으며, 그의 고모였던 태후 또한 아랑곳하지 않았다. 구염락은 무정한 사람이었다. 너무 무정해서 살려 두면 안 되는 인간처럼 느껴졌다.

‘잊지 마라. 권씨 가문도 절대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사실을!’

“소신,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염아는 아직 어리니 입궁시킬 수 없습니다! 만일 폐하께서 기어코 소신의 말을 무시하려 하신다면 소신도 가만있지 않을 겁니다!”

말을 마친 권서함은 소매를 뿌리치고 방을 나서다가 마침 황제를 알현하러 들어오던 서풍엽을 마주쳤다. 참다못한 권서함이 말했다.

“그때 우리가 서열이를 빼앗았어야 했어! 그가 평생을 고통 속에 살도록 말이야!”

권서함은 성큼성큼 방을 나갔다.

서풍엽은 제자리에 서서 뒷짐을 진 채 생각에 잠겼다. 하지만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어차피 처음으로 돌아갈 수도 없는데…….

권서함은 구염락을 말릴 수 없었지만 그렇다고 그의 결정을 받아들일 수도 없었다. 권서함은 자신의 권력을 이용해 이번 일을 황후에게 넘기기로 했다. 그는 이 세상에 이치가 통하지 않는 곳은 없다고 믿었다.

밤이 되자 구염락은 평소처럼 집에 돌아와 밥을 구걸했다. 평소처럼 연극을 보고 노래를 듣던 장서열은 구염락이 돌아오자 고개를 돌려 힐끔 쳐다보았다.

“바빴나요?”

구염락은 평소와 다른 점을 느끼지 못했다.

“응.”

소리자에게 겉옷을 건넨 그는 장서열의 곁으로 가까이 다가가려 했다. 구염락이 고개를 숙이고 장서열의 귓가에 맴도는 따뜻한 숨을 들이마시려 할 때, 갑자기 장서열이 그를 밀어냈다.

극본을 내려놓은 장서열이 냉랭하게 그를 바라보았다.

“당신이 그렇게 대단한가요? 황위에 오래 있다 보니 좋으신가 봅니다. 딸을 당신 마음대로 혼인시키는 것도 모자라 이젠 아들의 혼사에도 관여하려 하시다니요. 아무도 당신을 막을 수 없을 거라 생각하는군요?”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느낀 구염락이 얼른 부자연스럽게 웃었다.

“그게 무슨 말이야……. 누가 뭐라고 해?”

장서열이 비아냥거리며 웃었다.

“돌아오기 전 암위에게 오늘 누가 찾아왔었는지 묻는 걸 잊으셨나 봅니다.”

장서열은 한 마디로 정곡을 찔렀다. 심지어 구염락은 정말로 묻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지만 여전히 총명함을 잃지 않았다.

“권서함이 찾아왔었군.”

“아주 멍청해진 건 아니군요. 어째서 그런 어처구니없는 일을 저질렀어요? 권염아가 몇 살인데요! 그 아이를 입궁시켜 뭘 하시려고요. 권서함 대신 키워 주기라도 할 건가요?

그런 건 우리가 신경 쓸 필요가 없어요. 남의 집 귀한 딸을 내팽개친 건 차라리 작은 일에 속하죠. 하지만 당신이 권씨 가문의 여식을 2대에 거쳐 황궁에서 썩게 만들려고 하니, 그의 기분인들 좋겠어요? 태후와 권여아의 일이 아주 좋은 사례지요. 권씨 가문이 당신의 행동을 언제까지나 용납해 줄 거라고, 끝까지 불공평한 처사를 모른 척할 거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장서열은 구염락이 입을 떼지 못하게 이어서 그의 말을 잘랐다.

“당신의 뜻은 알고 있어요. 하지만 권염아는 정말로 너무 어려요. 그 아이가 뛰어난 건 사실이고 그 아이가 우리 아들에게 잘 어울리는 배필이 될 거라는 당신의 생각도 옳아요. 저도 그 아이를 아주 좋아해요. 하지만 이런 식으로 권서함의 뜻에 반하는 일을 해서는 안 돼요. 아직 열두 살밖에 되지 않은 아이를 다급하게 집에서 데려와서도 안 되고요. 그게 무슨 추태예요.”

구염락의 안색이 조금 나아졌다. 최소한 자신이 아들을 위해 그런 결정을 내렸다는 걸을 장서열이 알아 줬기 때문이다.

“난 그 아이가 마음씨가 곱고 착하기 때문에 우리와 권씨 가문의 관계를 완화시킬 수 있을 거라 생각했어. 권서함은 절대로 자기 딸을 수녀로 보내지 않을 거야.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래. 즉, 내가 이런 방법을 쓰지 않으면 황아가 권염아를 아내로 맞아들일 수 없을 거란 뜻이야.”

장서열은 강경했다.

“맞이하지 못하면 못하는 거죠. 세상에는 참한 여인들이 많아요. 억지로 얻은 열매는 달지 않은 법인데, 굳이 그럴 필요가 있나요?”

구염락은 고분고분하게 말을 잘 들었다. 어차피 자신이 부인을 맞이하는 것도 아니었고 모처럼 장서열이 입을 열었으니 한 사람 모자라면 모자란 대로 간택을 진행해도 괜찮을 것 같았다.

“좋아. 내일 그 아이의 이름을 명단에서 지우지.”

장서열이 말했다.

“그리고 류정헌도 제외하세요.”

그 말에 구염락이 의아하다는 눈으로 장서열을 살짝 쳐다보았다. 장서열은 평소와 같은 태도로 말했다.

“이미 지난 일이잖아요. 황아와 또 만나게 해서 괜한 소란을 만들 필요 없어요. 그 아이가 여전히 우리 황아를 좋아하지 않는다면 당신이 뭘 어찌할 수 있겠어요? 억지로 혼인이라도 시키시게요? 애초에 그 아이가 황아를 좋아했다면 두 사람의 관계가 이 지경으로 치닫지는 않았을 거예요.

우리는 권세를 써서 다른 사람을 억압할 권리가 없어요. 이번 일은 이렇게 끝내기로 해요. 류정헌은 과거의 반구가 누구인지 알 필요가 없어요. 우리 아들의 뚱뚱했던 과거가 남에게 계속 상기되는 건 좋지 않다고요.”

구염락은 이상하리만치 고분고분하게 말을 잘 들었다.

“당신 뜻대로 할게.”

구염락은 아까와 같이 장서열의 말에 동의했다. 그 일은 이미 구염락의 관심에서 멀어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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