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독후중생계 (446)화 (446/449)

외전 구염상 2-69

관몽득은 꽃밭 속에서 번뜩이는 검 그림자를 발견했다. 검은 옷자락이 펄럭이며 살기를 억누르고 있었다.

관몽득은 더는 자신이 노쇠했다는 걸 숨길 수 없었다. 하지만 그의 눈빛은 여전히 매섭고 예리했다. 손자 관사소에게 걱정거리가 있다. 류 후부가 혼담을 없었던 일로 하자고 태도를 바꾼 것보다 더욱 손자를 힘들게 하는 고민거리가 있는 것이다.

관몽득은 여러 사람에게 물어봤지만 관사소가 왜 그러는지 아는 사람은 없었다. 관몽득은 늙었다는 걸 실감했다. 그는 자식들이 마음 내키는 대로 영웅처럼 기를 펴고 살기를 바랐지, 지금처럼 앞길이 막막하고 희망이 없다고 생각하며 살기를 바라지 않았다.

관몽득은 떨어지는 꽃잎이 날리는 매화 사이에 서있었다. 검에 조각조각 난 매화가 영웅의 실의를 지닌 채 바닥에 가득했다.

관몽득의 연로한 목소리가 울렸다.

“사소야, 이 할아비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 주련?”

관씨 가문은 비록 나라와 대적할 만큼 부를 쌓았다고 할 수는 없었지만, 경제적 기반만큼은 그 못지않게 굳건했다. 관몽득은 대체 어떤 문제가 손자를 이토록 주저하게 만들고,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만드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일전에 관몽득은 자손들에게 말한 적이 있었다. 그는 국구부國舅府와 긴밀한 사이일 뿐더러 황후와도 여러 번 만난 인연이 있다고. 비록 관계가 좋다고 할 수는 없어도 자신이 입을 열면 황후께서는 분명 자신의 체면을 봐서라도 부탁을 들어줄 거라고.

‘이런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사소는 대체 무슨 일로 가슴에 응어리가 맺혀 있는 게지?’

관사소는 막힘없는 검술을 펼쳐 보였다. 바닥은 떨어진 꽃잎으로 이내 흙투성이가 되었지만 아무도 애석해하지 않았다.

관몽득은 말없이 한숨을 내쉬었다. 손자의 냉정함에 더욱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관사소가 고민을 털어놓지 않는다는 건 자신이 나서도 해결할 수 없는 일이라는 걸 뜻했다. 그 사실에 관몽득은 애가 탔다.

“사소야,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겠으나 모든 일은 다 지나간다고 말해 주고 싶구나.”

말을 마친 관몽득은 검에 잘려 끊임없이 떨어지는 꽃잎들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 그는 자리를 떠나기 위해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동시에 관사소가 갑자기 검을 거두었다. 할아버지가 쓸쓸하게 퇴장하는 걸 견딜 수 없던 그가 입을 열어 말했다.

“할아버님, 제 개인적인 일 때문입니다. 제가 마음을 넓게 가지지 못해서요. 우리 관씨 가문과는 관계없는 일이니 걱정하지 마세요.”

그러나 그 말에 관몽득의 마음은 더욱 편치 않았다. 그가 이토록 큰 가업을 일으키고 조상의 재산을 지켜온 이유는 자신의 후손들이 대대손손 영원히 잘살기를 바랐기 때문이었다.

물론 여전히 미련은 남아 있었다. 관씨 가문은 관직에 뜻을 두었지만 왜인지 줄곧 이루지 못해 아쉽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관몽득은 손자가 자신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관사소는 모든 사람이 미련을 갖고 산다고 생각했다. 어떠한 성취를 이뤘는지와 관계없이 그저 마음이 내키지 않으면 미련으로 남는 것이다. 그러니 만일 손자가 잊는다면, 만일 손자가 자신의 것이 아닌 한 줄기 그림자를 더는 쫓지 않는다면 결국은 미련도 사라지게 될 터였다.

어떤 아름다움은 본래 보통 사람이 넘보아야 할 것이 못 되었다. 예를 들어 천하를 눈부시게 한 상 공주가 그러했다. 그녀를 얻지 못한 건 관사소뿐만이 아닌, 연경의 수많은 고관대작 자제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관사소는 그들 중 한 명일 뿐이었다. 심지어 상 공주의 귀에 닿지 못할 정도로 하찮고 평범하면서 어두운 사람.

검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하자 온 사방에 떨어진 꽃잎들이 놀라서 붉은 물결을 일으키며 날아올랐다.

* * *

이건 불공평했다. 홍촉과 여의가 복잡하게 뒤엉켜 있었다.

구염상은 봉익에게 미안했다. 그들은 제비뽑기를 통해 얻은 부마는 인정할 수 없다며 문밖에서 부마를 붙잡은 채 금기서화琴棋書畫(악기를 연주하고 바둑을 두고,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는 등의 문예 특기)와 시사가부詩詞歌賦(시와 가곡 등의 글을 쓰는 것) 대결을 펼치자며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 구염상은 심지어 문밖에서 어렴풋이 들려오는 말소리도 들을 수 있었다.

“봉익이랑 곡 짓기 대결은 하지 마요. 그건 그의 특기니까. 주량을 겨뤄서 똑바로 걷지 못하게 만들어요. 신방에 들어가서 아무것도 못하게!”

순간 바깥이 왁자지껄해졌다. 대략 대여섯 명 정도가 봉익을 붙잡고 주량을 겨루려는 것 같았다. 가장 높은 함성을 지른 사람은 이미 술 단지를 통째로 마신 고원이었다.

구염상은 의아했다. 가장 떠들썩한 소리를 지르는 사람이 뜻밖에도 오라버니라니. 아마 오라버니는 문밖에서 봉익을 제압하고 밖에 붙잡아 둔 것 같았다.

오라버니의 만행을 가슴에 새기며 구염상은 화가 나 발을 동동 굴렀다. 저렇게 많은 사람을 상대로 주량 대결을 해야 한다니, 이것이야말로 봉익을 괴롭히는 게 아닌가.

방 안에 있던 유모와 마마嬤嬤들은 공주가 초조해 하는 것을 보고는 이미 입을 가리고 웃고 있었다. 이들은 공주와 사이가 좋은 이들로, 웃음의 의미는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구염상은 얼굴을 붉히며 더는 감히 감정을 표출하지 못했다.

팔뚝만 한 촛불이 어느덧 절반으로 줄어 있었다. 그러나 바깥의 소란은 여전했고, 오라버니와 봉익은 모두 과음을 한 것 같았다. 바깥에는 이미 제대로 서 있는 사람이 하나도 없어 보였다. 그런데도 ‘마셔라, 마셔라!’라는 소리는 여전히 들려왔다.

구염상은 화가 나 죽을 지경이었다. 머리에 쓴 붉은 비단을 홱 잡아당겨 벗은 그녀는 마마嬤嬤들이 깜짝 놀라 소리치기도 전, 이미 문가에 도착해 호통을 쳤다.

“다들 집에 돌아가고 싶지 않은 거야? 오라버니! 감히 앞장을 서요? 이걸 정말!”

구염상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갑자기 밖에서 우당탕탕 소리가 울려 퍼졌다. 술 단지가 계단에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머리가 부딪히는 소리가 울렸다.

잠시 후, 바깥에 있던 사람들은 깨끗이 사라져 있었다. 곧이어 혼자 남은 봉익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방으로 들어오려는 듯했다.

순식간에 침대로 돌아온 구염상은 다시 머리 위에 새빨간 비단을 뒤집어썼다. 두 손을 배배 꼬는 그녀는 이상하게 긴장해 있었다.

유쾌하고 대담한 마마嬤嬤들은 공주에게 부마를 안쓰러워할 때는 언제고 이제는 쑥쓰러워 하냐고 웃으며 말했다. 구염상은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 숨고 싶었지만 마마嬤嬤들의 말은 엄연한 사실이었다.

삐걱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며 부마가 들어왔다. 취해서 고주망태가 되었거나, 최악의 경우 누군가의 부축을 받으며 들어오는 신랑을 보게 될 줄 알았지만 그렇지 않았다. 붉은 신랑복을 걸친 부마는 숙연하고 단정했다. 그는 정확한 자세와 흔들림 없는 발걸음으로 공주를 향해 다가왔다.

그의 눈빛은 청명했다. 안색은 약간 붉었지만 취했다고 볼 수 없었다.

여러 마마嬤嬤와 궁녀들은 왠지 모르게 돌연 조용해졌다. 부마의 긴장된 분위기에 그녀들도

덩달아 이유 없이 긴장했다.

봉익은 복을 노래하는 마마嬤嬤의 안내를 받으며 숙연한 표정으로 합환주를 마시고 동심결同心結(사랑을 상징하는 매듭)을 맺었다. 마지막에 그는 이상한 자세로 구염상의 머리에 덮인 붉은 천을 걷어 혼을 쏙 빼놓는 용모와 마주했다.

다음의 과정은 괴이할 정도로 더욱 조용했다. 심지어 부마는 공주의 입에 넣어 주어야 할 음식을 몇 번이나 놓칠 뻔했지만 조용한 얼굴을 하고 있었기에 모든 절차가 차분히 진행되고 있다는 느낌을 주었다.

매우 희한한 분위기 속에서 사람들은 어딘가 잘못되었다고 느꼈다. 하지만 부마와 공주는 분명 잘못한 것이 없었고, 두 사람 모두 혼례를 올린 사람이 마땅히 가질 법한 긴장과 불안감을 갖고 있었다.

방 안에 있던 잡다한 하인들이 물러갔다. 마지막으로 소로小路와 소상小象이 주인을 위해 침상과 술자리 정리한 후, 기린노麒麟爐에 향을 태우고 천천히 물러간 뒤에야 비로소 구염상은 무엇이 잘못됐는지 알 수 있었다.

봉익은 지금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는 정신이 멀쩡한 것도, 취하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그는 분명 술에 취해 있었다. 그것도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봉익은 여전히 정숙하고 엄숙한 얼굴로 옷고름을 풀며 밤은 짧고 참기 힘들다는 둥, 공주와 하고 싶은 게 있다는 둥의 말을 주절거렸다. 게다가 그가 풀고 있는 건 자신의 옷고름이 아닌, 공주의 옷고름이었다.

침대에서 엎치락뒤치락을 반복하던 봉익은 또 정색하며 공주를 칭찬했다. 피부가 정말 부드럽다. 공주의 눈은 참 예쁘다. 공주의 허리가 정말 가늘다. 공주는 참 열정적이다……. 그는 마지막에 참을 수 없다는 듯 한마디를 토해 냈다. 정말 황홀하다!

침대에서 이렇게 체통을 잃은 사람을 본 적이 없던 구염상의 얼굴이 붉어졌다. 당장이라도 발로 걷어차 정신이 들게 하고 싶었다.

하지만 두 사람은 이제 부부였고, 그는 자신의 남자였기에 순간 마음이 약해진 구염상은 봉익을 그대로 두었다. 그 결과 확인한 건 봉익이 순전히 짐승이라는 사실이었다. 이성적이고 온화한 겉모습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짐승!

다음날 아침, 문안인사를 드릴 시부모님도, 차를 바쳐야 할 사람도 없는 구염상은 해가 중천에 뜰 때까지 늘어지게 자기로 결정했다. 사실 이건 결정할 필요도 없었다. 그녀는 날이 밝을 때까지도 잠에서 깨지 못했다.

그와 달리 밤새 술에 취해 날뛰던 봉익은 일찍 잠에서 깨어 단련을 마치고 다시 신방으로 돌아와 구염상의 뺨에 입을 맞추었다. 그는 어젯밤의 숙취에서 이제 막 깨어난 태자와 실력을 겨루러 나갔다.

물론 이는 당연히 봉익이 원해서 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바보가 아니었다. 그러나 형님이 부르시니 어찌 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설령 가서 모진 고초를 당할지라도 그는 가야만 했다.

* * *

새벽녘의 연경은 면사로 덮인 것처럼 안개가 자욱하여 코앞이 보일 듯 말 듯 흐릿했다.

술을 한 잔 따라 놓은 현천기는 정원에 앉아 바람을 맞고 있었다. 차가운 액체가 그의 목구멍을 적셨다. 눈 깜짝 할 새 스무 번의 봄가을이 지나갔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치욕을 참으며 살아왔던가.

드디어 모두 죽었다. 어제 저녁, 외지에서 떠돌던 현씨 가문의 마지막 자손이 죽음을 맞이함으로써 현씨 가문의 자손은 모두 남김없이 죽었다. 현천기는 과거 가문의 자손이 비참한 죽음을 맞이하게 만들겠다고, 그렇게 가문의 대를 끊겠다고 다짐했었다. 그리고 부친 현일玄一에게 자손이 고통 속에 사는 것을 보여 주겠다고 결심했었다.

지금 현일은 지하실에 있었다. 그의 오만한 부친은 마침내 무너져 내렸다. 노쇠한 얼굴은 바람에 말린 소가죽처럼 주름투성이였다.

현일은 자신에게 대체 왜 이러느냐고 물었다. 그 무기력한 으름장 속에서 과거 대권을 손에 쥐고 생사를 관장하던 모습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현천기는 원수를 갚았다는 쾌감을 느끼지 못했다. 그는 그저 재미가 없다고 느꼈다. 현일은 아들이 왜 자신을 죽이려 하는지도 이해하지 못했다.

정말 모순적이었다. 현일은 억지로 빼앗아 온 주제에 죽을 때까지 괴롭혔던 그 여인을 잊고 있었다. 어린 현천기를 보호했던 여인, 강요에 못 이겨 얼굴을 조금씩 망가뜨려 비로소 아들에게 경쟁의 기회를 줄 수 있었던 여인, 현일이 뱀굴에 집어 던졌던 여인. 그 여인을 현일은 잊고 있었다.

현일이 그런 짓을 벌인 건 단지 아들에게 ‘인간은 죽을 고비 앞에서 용기가 생긴다’라는 걸 가르치기 위해서였고, 현천기에게 무한한 힘을 깨닫게 하기 위해였다. 결국 현천기의 어머니는 짐승의 반복되는 실험 속에서 사경에 이르렀고, 짐승은 유일무이한 후계자를 길러 냈다고 자화자찬했다.

이 얼마나 모순적인가! 이 빌어먹을 가문은, 어둠 속 쥐새끼 같은 현씨 일족은 진작에 살 필요 없이 죽었어야 했다. 자랑스러운 사명감으로 무고한 이들을 수도 없이 죽인 가문은 그토록 타락했으니 어차피 더 살아야 할 의미가 없었다.

‘차라리 죽는 게 낫다. 죽는 게…….’

현천기는 통쾌하게 술잔을 들이켰다. 천천히 내리는 눈송이가 정말 하얗고 순결해 보였다. 내리는 눈은 다시 한 번 세상의 역겨움과 사악함을 감추어 주었고, 사람들의 죄악을 씻어내려 또 하나의 빛이 비추는 상서로운 세상을 만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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