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구염상 2-68
구염상은 아버지의 사랑 방식에 동의할 수 없었지만 또 어머니에게 문 밖을 나가 세상을 구경하려는 마음이 없다는 것 또한 사실이었다. 어머니는 심각할 정도로 요구하는 게 없었다.
“어마마마.”
구염상은 손에 여의如意(길상을 상징하는 장식품)를 놓아주는 어머니의 손을 꼭 잡고 촉촉이 젖은 눈을 깜박였다.
“저 말 잘 들을게요. 부마를 괴롭히지 않고, 아바마마께 폐를 끼치지도 않을 거예요.”
장서열이 딸의 코를 톡톡 건드렸다. 명치가 시큰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녀 역시 전생에서 딸을 시집보낸 경험이 있는 건 똑같았다. 비록 지금처럼 화려하진 않았지만, 그때도 딸을 위하는 마음은 같았다. 누군가 딸을 아껴 주고 사랑해 주길 바랐고, 언젠가 자신이 세상을 떠나도 부마가 보물처럼 소중한 딸을 잘 돌봐 주기를 바랐다.
그러나 지금 장서열은 부마에게 어떠한 기대도 없었다. 그녀는 딸에게 오라버니가 있으므로, 언젠가 자신이 세상을 뜨더라도 황아가 죽을 때까지 누이동생을 돌볼 거라는 걸 믿어 의심치 않았다. 덕분에 설령 부마가 신뢰할 수 없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상관없었다. 황아는 상아가 억울한 일을 당하는 걸 보고만 있지 않을 테니까.
장서열은 딸을 못 믿는 게 아니었다. 다만 그녀는 사람의 불순한 마음을 제압할 수 있는 권력을 더욱 신뢰했다. 구염락은 오랜 세월동안 그 능력을 이용해 이 점을 증명해 왔다.
장서열은 가지런하고 단정한 자태로 화려한 붉은 예복을 차려입은 딸을 바라보았다. 어찌 봐도 곱고 예쁜 딸의 얼굴을 보면서 장서열은 속으로 자긍심이 솟아오르는 걸 느꼈다.
문득 어머니가 과거에 했던 말이 떠올랐다. 조옥언은 장서열을 입궁시키는 건, 장차 딸의 자녀들이 더는 자신처럼 선택과 포기의 아픔을 겪지 않고 높은 자리에 앉길 바라서라고 했다. 또한 자신들의 운명을 결정했던 사람들처럼 딸이 다른 사람의 운명을 결정하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문득 장서열은 어쩌면 당시 자신이 어머니의 뜻을 이해했던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그때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았다. 장서열은 세상 모든 어머니와 마찬가지로 아들딸을 평생의 자랑으로 여겼고, 자식들을 자유롭게 해 줄 수 있다는 사실에 기뻐했다. 심지어 그녀의 자식들은 제멋대로 살지도 않았다.
슬픔에 잠긴 어머니를 보며 구염상이 앵두 같은 입술을 삐쭉 내밀었다.
“어마마마, 무슨 생각을 그리 하세요? 조금 전에는 저보고 웃으라고 하셔 놓고.”
“그래, 네 말이 맞다. 우리 상아가 이렇게 예쁜데 어떻게 웃지 않을 수 있겠니.”
같은 시각, 봉씨 가문은 아수라장이었다. 봉 부인은 홍주绸(신랑의 몸에 두르는 붉은 비단으로 만든 꽃모양 장식)를 찾지 못해 허둥대고 있었다.
붉은 신랑복을 차려입은 봉익은 늠름한 자태로 여기저기를 샅샅이 뒤지는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봉익이 빙글 웃으며 물었다.
“어머니, 혹시 홍주를 마작 패와 같이 치우신 건 아니고요?”
봉 부인이 번뜩 깨달았다.
“맞아! 내가 왜 그걸 잊었지?”
봉 부인은 재빨리 침실 장롱 안에서 홍주를 가져오라고 하인에게 분부했다. 잠시 후, 새빨간 비단으로 만든 큰 꽃장식이 선명한 빛깔을 뽐내며 봉익의 몸에 둘러졌다.
봉익의 아우가 감탄하며 형님을 쳐다보았다.
“어머님을 아는 사람은 역시 형님밖에 없군요!”
봉익은 머리가 아팠다. 어머니는 아들의 혼례 직전까지도 마작을 즐길 정도로 취미 활동에 심취해 있었다.
“앞으로 어머님께 좀 자제하며 노시라고 해라.”
“알았어요. 이제 공주부로 장가가시면 형님도 높은 신분이 되실 텐데 우리 같은 하찮은 이들을 돌볼 시간이 없으시겠지요. 하하, 장난이에요, 형님. 장난!”
귀여운 아우를 내보낸 봉익은 자신을 조롱하는 말을 마음에 담아 두지 않았다. 그가 신경 쓰는 건 오로지 마지막 결과였다. 그 과정에 무엇이 놓여 있는지는 상관없었다.
곧이어 섭영진과 이치 등이 짝을 지어 우르르 들어왔다. 떠들썩하게 봉익을 아래 깔아 뭉갠 이들은 질투와 부러움을 담아 그를 마구 주무르고 못살게 굴다가 만족할 만큼 괴롭힌 후에야 흐뭇하게 손을 거뒀다. 만인의 연인이었던 공주가 혼례를 올리는데 부마가 자신이 아니라니. 그들은 분풀이를 하기 위해 무엇이라도 해야 했다.
“공주 전하께 잘해.”
도도가 형제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 한 남자가 한 여자에게 잘하지 못한다면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손봐 주는 방법은 여러 가지였다.
봉익은 여유롭게 도도를 힐끔 쳐다보며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자네 걱정은 필요 없어. 평생.”
도도가 별안간 봉익의 귓가에 다가가 속삭였다.
“약속 지키게. 안 그러면 공주는 이 몸이 채 갈 테니.”
이 말에 봉익이 순식간에 도도를 바닥에 깔아뭉개자 또다시 한바탕 웃고 떠드는 소리가 울렸다.
좋은 날씨와 아름다운 경치가 펼쳐진 가운데 경사를 알리는 징과 북소리가 하늘을 울렸다. 구성진 가락이 혼례 행렬의 서막을 열었다. 높이 뜬 태양 아래 노래와 춤의 바다가 펼쳐졌다.
부모님께 작별인사를 올린 구염상은 오라버니의 안내 아래 백성들의 축복을 받으며 거대한 의장 행렬과 혼수를 이끌고 자신의 삶으로 향했다.
구염황은 왠지 모르게 몹시 울고 싶어졌다. 누이동생이 이제 시집을 가 다른 사내의 여인이 된다니. 그가 힘들게 키운 누이동생을, 똑똑하고 영민한 그의 누이동생을 웬 운 좋은 놈에게 보내야 한다고 생각하자 구염황은 아이처럼 울고 싶어졌다.
지금 구염황은 태자도, 장래의 군주도 아닌 한 명의 오라버니일 뿐이었다. 어린 시절 누이동생과 함께 닭과 개를 훔치고 새를 찾고 알을 만지던 오라버니. 엊그제까지만 해도 함께 나무에 올라가 벌집을 들쑤시던 누이동생은 순식간에 어엿한 소녀로 자라 시집을 가고 있었다.
순간 구염황은 부마를 한 방 갈겨주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봉익에게 운이 나쁜 것이 어떤 느낌인지 알려 주고 싶었다. 덕분에 출궁할 때만 해도 누이동생의 혼례로 기뻐하던 구염황은 돌연 얼굴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살벌한 기운을 드러냈다.
하지만 구염황이 어떠한 이유로 패왕의 기운을 내뿜고 있는지 모르는 백성들은 그저 주국의 영토를 지키고 제압하는 태자는 마땅히 그래야 한다고 생각할 따름이었다. 백성들은 오히려 구염황의 차가운 모습에 사로잡혔다. 위엄이 넘치고 진중한 태자는 언젠가 위대한 업적을 쌓을 것이다!
동시에 백성들이 가진 가장 큰 의문은 태자가 뚱뚱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태자의 외모에 대하여 귀족들로부터 전해들은 바가 없는 백성들은 감히 구염황의 외모에 대해 정의를 내릴 수 없었다. 이는 처음부터 끝까지 감히 태자를 똑바로 쳐다본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건 목이 날아갈 대역죄였으니까.
하지만 백성들 사이에는 이미 태자가 천자의 용모와 의젓한 풍채를 갖고 있다는 소문이 은근하게 퍼져 있었다. 소문이 구염락의 귀에까지 흘러들어갔을 때, 구염락은 그저 어이가 없었다. 아직 황제가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살아 있는데 누군가 벌써부터 아들더러 ‘천자의 용모’를 지녔다고 소문을 내다니.
다행히 자신이 대의를 알고 도량이 넓은 탓에 아들과 똑같이 굴지 않는 게 다행이었다.
“안 그래, 서열아?”
구염락에게 눈을 부라린 장서열은 언제나처럼 대꾸하지 않았다.
공주와 부마의 혼례는 공주부에서 치러졌다. 저택에는 등롱과 오색 비단이 장식되었다. 황실의 경사에 십 리 밖까지 향을 피웠으며 연경에 있는 모든 이가 하객이 되었다. 황실은 공주의 혼례를 축원하기 위해 집집마다 잔칫상을 내리고 백성들과 함께 경사를 즐겼다.
만세와 천세 소리가 뒤엉켜 연경 하늘 위로 울려 퍼졌다. 열기가 하늘을 찔렀다.
한편, 관씨 가문에서는 황제가 하사한 잔칫상을 받은 관몽득이 기뻐하며 무한한 긍지를 느끼고 있었다. 비록 모두가 받은 상이었지만 품계에 따라 여러 등급의 잔칫상으로 나뉘어졌기에 거지의 손에 쥐여지는 것은 아마 닭다리 한 개 정도일 것이었다.
관씨 가문은 야단이 났다. 뜻밖에도 그들이 받은 상은 3품에 준하는 잔칫상이었다. 이는 황제가 딸을 얼마나 중히 여기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폐하는 일개 청산지기의 체면까지 세워 줄 정도로 기분이 좋으신 게 분명했다.
관몽득은 매우 기뻐하며 온 가족에게 상을 내렸다. 한 달 생활비로 주는 은자를 올려 준 것은 물론 모든 식솔들을 불러 사 대가 함께 잔칫상을 즐기며 황실의 경사를 누리기로 했다.
잠시 뒤, 가문의 아들 손주까지 모두 도착해 관몽득을 치켜세우는 말들을 늘어놓았다. 이들은 인사치레에 익숙한 관몽득을 흐뭇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관몽득은 아직 연회를 시작할 뜻이 조금도 없었다. 그는 가장 아끼는 손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이를 모를 리 없었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나타나야 할 사람이 오지 않자 관몽득의 편애를 알고 있는 이들조차 관사소에게 불만을 품기 시작했다.
형제자매와 조카들이 불만을 품고 있다는 걸 관노십이 어찌 모르겠는가. 그는 다시 곁에 있는 사람을 재촉하며 모진 말을 덧붙이는 걸 잊지 않았다.
“사소에게 전하거라! 계속 안 오면 그런 아들은 없는 셈 치겠다고!”
그러나 십오 분 뒤, 하인은 처량한 얼굴로 돌아왔고 그의 뒤에는 아무도 없었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관노십의 얼굴이 빨개졌다. 그는 거의 큰소리로 욕을 퍼부을 뻔했다.
“무례한 놈, 갈수록 방자해지는구나!”
하지만 결국 내뱉은 건 이 한 마디뿐이었다. 어찌됐든 관사소는 관노십에게 만족을 주는 귀한 아들이었기에 지나친 책망은 차마 입에서 나오지 않았다.
물론 관사소가 미치지 않고서야 잔칫상을 받으러 갈 리 없었다. 그 시각 관사소는 술병을 손에 든 채 긴 복도의 기둥에 몸을 기대 있었다. 정원에 가득한 매화를 바라보는 마음은 텅 비고 쓸쓸했다. 온 백성이 기뻐하고 폭죽이 하늘을 뒤덮은 날이었다. 공주의 혼례를 축하하기 위해, 공주와 부마의 화목을 기원하기 위해서였다.
관사소는 실수로 꽃송이 위에 앉았던 파리라고 할 수 있었다. 불어오는 바람에 꽃송이에서 떨어진 뒤,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하면서 오히려 역겹게 달라붙는 파리.
관사소는 그날 격렬한 싸움 아래 보았던 그녀의 침착한 눈빛과, 여유로우면서도 거절을 용납하지 않던 말투를 떠올렸다. 과연 자신이 미친 것 같았다. 남의 눈에는 아무 의미도 없을 장면이 계속해서 떠오르다니.
관사소는 갑자기 마음이 답답해져 검을 뽑아 들었다. 차가운 기운을 발산하며 날고 있는 검에서는 강렬한 살기와 가슴 속 말 못 할 한이 서려 있었다.
결국 손자들의 갈구하는 눈빛을 이기지 못한 관몽득은 식솔들에게 먼저 식사를 들게 하고 직접 사랑하는 손자를 찾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