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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중생계 (444)화 (444/449)
  • 외전 구염상 2-67

    며칠 동안 밖에서 광기를 부린 후, 활력이 가득한 모습으로 저택에 돌아온 구염황은 아무도 자신의 변화를 눈치채지 못하게 했다. 구염황은 류정헌을 미리 부모님과 누이동생에게 소개하지 않아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안 그랬으면 그들은 이번 일을 끈덕지게 물고 늘어지며 그의 실패를 비웃었을 테니까.

    구염황은 예전과 달라진 게 없었다. 그는 여전히 철없이 굴었고 병적으로 살을 찌우기 시작했다. 그러나 살을 뺄 당시 위장이 상해서인지 폭식의 효과는 그리 좋지 않았고 오히려 살이 빠졌다.

    구염상은 오라버니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챘지만 딱히 말하지도 묻지도 않았다. 오라버니가 체면을 구길까 염려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도와 공주부에 들어갈 혼수를 준비해 줄 사람이 한 명 줄게 되는 것이 마음 아파서였다. 그러나 묻지 않는다고 해서 오라버니에게 관심이 없는 건 아니었다.

    며칠 후, 구염상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아버지를 찾아갔다. 구염락에게 자초지종을 전해 들은 구염상은 모든 과정에서 오라버니가 잘못한 게 없다는 걸 확인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오라버니에게 바쁜 일을 끝낸 뒤 쉬지 말고 자신의 혼수를 준비해 달라는 임무를 맡겼다.

    구염락은 비정상적으로 근면해진 아들 덕분에 작은 휴가를 얻게 되었다. 그는 사랑하는 아내와 둘만의 시간을 가졌다. 물론 황위를 버려두고 황궁을 나가 대자연의 경치를 감상하는 형태의 한가로운 휴식은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그는 장서열을 사랑하듯 나라를 사랑했다. 어느 것 하나 포기할 수 없는 야심가인 구염락은 이 두 가지만큼은 아들에게도 양보하지 않았다.

    구염락은 아들의 고급 노동력을 최대한 쥐어짜 내면서도 아들의 관직은 올려 주지 않았다. 이보다 더 수지가 맞는 장사가 어디 있을까. 심지어 구염락은 아들이 여인에게 몇 번 더 걷어차이는 것도 괜찮겠다고 생각했다.

    * * *

    구염황이 포기한 뒤에도 류씨 가문은 감히 류정헌을 어찌하지 못했다. 류씨 가문은 여전히 그녀를 받들었고, 오히려 전보다 더욱 조심스럽게 그녀를 대했다. 어느 날 갑자기 류정헌을 들여다 본 태자가 만에 하나 억울한 그녀를 보게 된다면 류씨 가문을 찢어발길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또한 이들은 태자가 왜 요즘 후부로 하인 노릇을 하러 오지 않는지 의아해 할 뿐 자세한 내막은 알지 못했다.

    황제는 공주가 혼례를 마친 후 태자비를 간택하겠다고 공포했다. 이렇게 운수대통한 일이 생겼으니 류씨 가문이 딸을 잘 보호하다 궁으로 들여보내려는 것도 당연했다.

    그러나 구염황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입궁을 명하여 류정헌을 얻는 것과, 청혼에 고개를 끄덕인 그녀를 얻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라는 것을. 만일 그 날 류정헌이 고개를 끄덕였더라면 태자비 간택은 없었을 것이다.

    구염황은 뼛속부터 자신감이 넘쳤고 오히려 그 점은 구염락보다 더했다. 구염락은 먹을 것을 구하기 위해 고개 숙이던 시절을 경험했지만 구염황은 그렇지 않았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태자였고 자신감 넘치는 아버지를 보며 자랐다. 구염황은 아버지가 할 수 있는 일은 자신도 해낼 수 있다고, 심지어 그보다 더 잘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또한 구염황은 자신이 아버지처럼 첩을 들이지 않는 2대 영덕대제가 되어 오직 한 여인만을 총애하고, 마찬가지로 태평성세를 누리는 거대한 국가를 이룩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구염황의 자신감을 구염락은 진지하게 바라보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구염황에게 그럴 마음이 없는 건 아니었다.

    그리하여 부모님이 자신을 위해 태자비를 간택하겠다고 했을 때 구염황은 매우 불쾌했다. 누이동생에게 줄 장자莊子를 고르던 구염황은 손에 든 일을 내팽개치고 곧장 궁에 들어가 어머니에게 싫은 내색을 했다.

    “왜 제게 물어보지도 않고 그러세요! 전 태자비를 들이지 않을 거예요!”

    구염락은 아들을 발로 차버리고 싶은 충동을 참으면서 냉정하게 장서열을 두둔했다.

    “어디서 소리를 지르느냐! 누가 너보고 태자비를 들이라고 했느냐? 우린 수녀秀女를 선발한다고 했지, 태자비를 들이겠다고는 하지 않았다. 네 머리에 물만 가득찬 걸 남들이 모를까 걱정이 되어 그리 소리를 지르느냐?”

    장서열이 얼른 아들을 감싸며 말했다.

    “왜 그리 야단을 치십니까! 할 말이 있으면 부드럽게 얘기를 해야지요. 요즘 황아가 얼마나 바쁘고 피곤하겠어요. 능력 있으면 폐하께서 바쁘게 일을 하시든지요!”

    구염락이 즉시 눈웃음을 쳤다.

    “여보, 내가 잘못했어. 하지만 다 아들을 위해 그러는 거야. 이렇게 다 큰 녀석이 아직 태자비도 정하지 못하고 있잖아. 나는 저 나이에 황아에게 아바마마라는 소리를 들었다고. 내 말이 틀려?”

    물론 장서열은 그 말이 옳다고 생각했다. 황아는 어리지 않았고, 혼례를 올려야 할 나이였다. 아무리 좋아하는 사람이 없어도 자주 만나다 보면 좋아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을까.

    장서열은 아들을 끌고 자리에 앉았다. 그녀는 아들을 빨리 혼인시켜 황손을 안고자 하는 뜻은 없었다. 단지 이번 류씨 가문의 일을 통해 아들이 서로 알고 지내며 정이 든 상대를 확인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을 뿐이다.

    그러나 아들의 이러한 성격은 결코 규방 아가씨들에게 좋은 일이 아니었다. 자칫 잘못하면 명성이 훼손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방면에서는 다행히 부정행위가 가능했다. 모든 귀족 아가씨들을 입궁시켜 재주를 보고, 주관과 인식, 사물을 보는 관점 등을 적게 하면 어찌 됐든 아들을 놀라게 만들 만한 여인 한 명쯤은 나올 것이다.

    장서열은 많이 뛰어난 여인은 바라지도 않았다. 그저 아들의 마음을 자극할 수만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아바마마께선 당장 네게 태자비를 들이라는 게 아니야. 태자비 선발이야 형식상 하는 것일 뿐, 대부분은 돌려보낼 거란다. 그러니 그렇게 기겁하지 말거라.”

    구염황은 속으로 생각했다.

    ‘제가 바보인 줄 아세요?’

    세상 사람들은 겨우 하룻밤 새 이번 비 간택이 모두 태자인 자신을 위한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이 일에 황제를 거론하며 신경을 거슬리게 하는 자는 모두 아버지의 손에 죽었다.

    장서열은 자상하게 아들의 손을 톡톡 치며 온화한 목소리로 위로했다.

    “어미 말을 듣거라. 혼례를 재촉하지 않을 거라고 맹세하마.”

    어머니의 부드러운 눈빛을 보던 구염황은 다시 한쪽에서 냉랭한 표정을 짓고 있는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행여나 어머니의 기분을 불쾌하게 할 만한 말을 한 마디라도 하면 바로 자신을 쪼갤 기세였다.

    구염황은 얼른 고개를 숙이며 네 하고 답했다. 장서열이 웃었다.

    “착하지. 어미는 널 재촉할 뜻이 없단다. 그러니 부담 갖지 말고. 됐다. 이제 태자비 이야기는 그만하자. 아무리 빨라도 내년 봄까지는 기다려야 하니까. 이제 사흘만 지나면 네 누이동생의 혼례일이구나. 네 예복도 미리 준비해 놨단다. 가서 한 번 입어 보렴. 우리 아들도 제대로 갖춰 입어서 사람들의 눈을 밝게 해 줘야지 않겠니? 잠깐만, 또 살이 빠진 것 같구나?”

    “어마마마, 눈썰미가 없으시네요. 전 매우 잘 먹고 있어요.”

    순간 아들을 발로 퍽 걷어찬 구염락이 얼음처럼 차가운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감히 누구보고 눈썰미가 없다는 게냐! 사는 게 지긋지긋하더냐?”

    구염황은 곧 부러질 것 같은 다리를 움켜쥐며 속으로 아버지를 욕했다. 다행히 그에게는 자상한 어머니가 있었다. 안 그랬으면 틀림없이 아버지에게 학대를 당하다 죽었을 것이다.

    과연 장서열은 분노했다. 그녀는 아들이 보는 앞에서 구염락의 귀를 잡아당기며 놓아주지 않았다.

    “살기 싫어요? 내 아들을 발로 차다니! 당신이 배 아파 낳은 자식이 아니니 마음 아프지 않다 이거예요? 그렇죠?”

    “일부러 그런 게 아니야! 악! 서열아, 살살 좀! 고의가 아니래도!”

    “일부러 그랬잖아요! 구염락, 내가 경고하는데, 살기 싫으면 똑똑히 말해요! 걸핏하면 자식에게 화풀이하지 말고!”

    귀를 부여잡은 구염락은 마치 늦게 사죄하면 큰일이라도 나는 것처럼 장서열에게 사죄하기 시작했다.

    구염황은 속으로 당해도 싸다고 생각했다. 아들을 걷어차다니! 어머니가 아버지를 걷어찰 수 있도록 도와주기 위해 구염황은 눈치껏 방 안 가득한 궁인들을 데리고 방을 나왔다. 구타하기 좋은 환경을 만들어 준 셈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구염황이 막 문을 닫자마자 안에서 벼락이 치는 소리가 울렸다.

    구염황은 두 분의 사이가 참 좋다고 생각했다. 감히 황제의 위엄에 도전하는 어머니, 황제에게 머리를 숙일 기회를 주는 어머니. 단순히 경외하고 조심스럽게 대하지 않기에 오히려 서로가 서로의 장점을 보고 있었다.

    어두컴컴해진 하늘을 바라보는 구염황의 날카로운 눈매에 알아채기 힘든 쓸쓸함이 어렸다. 그는 그동안 류정헌에게 자신을 믿게 할 만한 충분한 신뢰를 쌓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결과는…….

    * * *

    폭설이 내린 후, 마침내 날씨가 개고 푸른 하늘이 모습을 드러냈다. 찬바람이 불어 마른 가지에 장식된 가짜 이파리가 바스락 소리를 내는 이른 아침, 사람들은 두꺼운 솜옷을 입고 길가에 질서정연하게 선 채 곧 지나갈 황실의 혼례 행렬을 기다렸다.

    운 좋게 길가에 선 사람들은 모두 한 달 전 엄격한 심사와 조사를 받은 이들이었다. 위로 삼 대까지 주국의 백성이며 불량한 행실을 보인 자가 없다는 것을 확인받은 이들만이 공주의 가마에 절을 할 수 있었다.

    태양이 막 떠올랐을 때 조로전은 이미 매우 분주했다. 온갖 악기의 연주 소리가 황궁에 울려 퍼졌고, 궁인들은 질서정연하게 움직였다. 가끔 빠진 물건이 있거나 촛불이 부족하면 사람들은 얼음물이 기름 솥에 들어간 것처럼 야단법석을 떨었다.

    붉은색으로 가득 채워진 전각 안, 미소를 머금고 앉아 있던 구염상은 쉴 새 없이 바쁘게 움직이는 마마嬤嬤와 혼수를 챙기고 있는 어머니를 바라보며 한층 더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구염상에게 혼인은 낯선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딸의 혼례를 위해 다시금 바쁘게 움직이는 어머니의 모습에 그녀는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눈가를 촉촉이 적셨다. 그녀는 또 혼인을 하게 됐다. 어머니의 축복과 아버지의 사랑을 받는 그녀는 부마와 자신의 저택, 그리고 모든 것을 얻게 됐다.

    만약 이번 혼인에서도 잘 살지 못하면 그건 남편에게 문제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녀 자신이 천성적으로 차갑고 무정해서 봉익을 실망시켰기 때문일 터였다.

    아무런 대가도 없는 사랑은 없었다. 심지어 아버지조차도 어머니의 호응이 필요했다. 구염상은 봉익이 자신에게 잘한다는 걸 충분히 확인했다. 타락한 영혼을 가진 자신이 무슨 권리로 봉익의 사랑을 그저 받기만 하겠는가.

    장서열은 딸이 울자 서둘러 다가와 엄격한 얼굴로 딸을 질책했다.

    “또 제멋대로 구는구나. 오늘은 너의 경사가 있는 날이지 기뻐해야지. 울어야 할 사람은 부마란다. 부마가 공주부로 장가를 오는 거니까.”

    울던 구염상이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

    “맞아요. 앞으로 부마에게 매일 아침 어마마마께 문안인사를 드리라고 하겠어요.”

    장서열도 웃었다.

    “그래선 안 되지. 아바마마께서 아시는 날엔 부마는 살아서 돌아가지 못할 거야.”

    두 사람은 지난 세월 후궁에 수컷인 생물은 오직 구염황뿐이었으며 태감조차 없었다는 것을 떠올렸다. 고개를 설레설레 저은 두 사람은 웃음을 터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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