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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중생계 (443)화 (443/449)

외전 구염상 2-66

폭설이 내리는 엄동설한이 찾아왔다. 다른 나라를 침략할지언정 국경을 침략 당하지 않는 태평성세의 백성들에게 있어 겨울은 단지 옷을 조금 더 두껍게 입고 장화를 단단히 싸매는 정도의 계절에 불과했다. 형편이 곤란한 사람도 노동을 하면 겨울을 날 수 있는 식량을 얻을 수 있었다.

보송보송한 털옷을 따뜻하게 두른 구염상은 마치 겨울을 나는 어린 판다처럼 보였다. 구염황은 누이동생이 단장한 모습을 아무리 많이 보아도 매번 볼 때마다 재미있었기에 동생을 콕콕 찌르고 잡아끌면서 이렇게 절묘하게 겨울을 나는 법을 생각해 내다니, 정말 뭘 좀 안다고 치켜세워 주었다.

구염상은 보송보송한 털옷을 보호하며 구염황을 노려봤다.

“잡아당기지 말아요. 바람이 다 들어오잖아요! 당기지 말라니까요! 알았어요, 알았어! 오라버니에게도 한 벌 줄게요. 몸을 따뜻하게 하는 데 아주 좋아요……. 어휴, 가져가요! 가서 미래의 아내를 기쁘게 해 주세요!”

구염상이 오라버니를 노려보았다. 기분이 몹시 언짢았다. 혼자 공주부에 머무는 게 싫어서 태자부에 눌러앉아 있는 거였다. 그런데 오라버니는 누이동생의 물건을 가져가 남의 비위나 맞추려 하다니, 역시 형제도 믿을 바가 못 되었다.

목표를 달성한 구염황은 매우 기분이 좋은 듯 누이동생의 보송보송한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래야 내 착한 동생이지.”

구염황은 살이 빠져 있었다. 비록 한순간에 표준에 이른 건 아니었지만 지금은 살덩이에 덮여있던 눈이 보일 정도가 되었다. 다만 금빛으로 빛나는 눈빛과 뚜렷한 이목구비는 상냥함이 부족해 보는 이를 두려움에 떨게 했다.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외모는 웃지 않으면 위압감과 위엄이 느껴졌다. 어쩌면 유전으로 물려받은 게 아니라 높은 자리에 오래 앉아 있으면 천성적으로 그리 되는 건지도 모른다.

이러한 것들을 제외하면 오라버니는 확실히 미남이라고 구염상은 생각했다. 지금도 어렴풋이 천하의 규수들을 쓰러지게 만들 윤곽을 드러내고 있는 데다가 높은 신분까지 겸비했으니, 모든 여인들을 자진해서 입궁하게 하고도 남았다.

구염황은 누이동생에게 만족을 표했다. 갈수록 상황 판단이 빨라지는 착한 누이동생이었다.

“네 혼사 때 이 오라버니가 반드시 어마어마한 선물을 해 줄게. 난 오늘밤 일이 있으니까 얌전히 집에 있어. 함부로 나다니지 말고. 곧 있으면 혼례를 치를 사람이니 안전이 우선이야. 알았지?”

“알았어요, 알았어. 어서 가 봐요. 올케가 들어오지 못하게 하기 전에.”

구염황은 흐뭇한 표정을 지으며 자리를 떠났다. 사실 그 역시 자신이 지금 류정헌과 어떤 관계라고 확신할 수 없었고, 류정헌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도 몰랐다. 그는 최근 한 달 동안 누이동생의 말대로 열심히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는 중이었다.

심지어 구염황은 류정헌에게 내세울 만한 신분을 만들어 냈다. 그는 류정헌에게 무과 시험을 봐서 장원으로 급제하겠다고 말했다. 류정헌이 그를 사랑해도 될만한 사람으로 봐 주기를 기대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류정헌은 단지 미소를 머금으며 그를 응원할 뿐, 평소처럼 그에게 용기를 불어넣어 주고 자신 역시 겉보기에는 약해 보여도 힘이 세다며 농담을 했다. 모든 건 장자에 있을 때와 같았고 달라진 점은 없었다.

구염황이 무엇을 하든 그를 바라보는 류정헌의 시선에는 한계가 있었다. 비록 후부에 있는 다른 하인에 비해 눈에 띄게 잘해 주긴 했지만 단지 가족을 대하듯 잘해 주는 것일 뿐 관계가 발전할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구염황은 기쁘고 안심이 되는 동시에 두려웠다. 그는 대다수의 남자와 같았다. 그리고 대다수의 남자보다 자만심이 컸다. 구염황 역시 자신의 신분을 드러내고 그녀를 아내로 맞이하고픈 생각이 없는 건 아니었다. 그도 태자의 입장에 서서 그녀의 온 마음을 다한 사랑을 받고 싶었다.

그러나 구염황의 마음 한편에서는 관사소가 그녀의 시선을 빼앗은 것처럼 자신도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있었다.

‘가능하지 않을까……? 이 요구가 과한 것도 아니잖아. 과하지 않잖아…….’

아주 조금이라도, 아주 아주 조금이라도 그녀가 자신을 다른 눈으로 봐 준다면 구염황은 더는 그녀가 자신에게 반하기를 바라지 않을 것이다. 그는 즉시 태자 신분을 밝히고 정혼자로서 그녀에게 구애할 생각이었다. 정정당당한 사랑으로서 그녀에게 어떤 심리적 부담도 느끼지 않게 하리라.

그러나, 구염황이 누이동생에게 얻어온 값비싼 백호 모피를 선물했을 때, 모피를 본 류정헌은 눈을 반짝이며 기쁜 듯 물었다.

“어디서 얻어왔어요? 팔면 적지 않은 돈을 받을 거예요! 정말 예쁘네요.”

류정헌은 기쁜 듯 눈처럼 새하얀 모피옷을 쓰다듬었다. 모피에 장식된 붉은 테두리는 하얀 모피털을 더욱 눈처럼 새하얗게 보이게 했다. 그녀는 구염황을 남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처럼 그의 손에서 모피를 가져와 웃으며 말했다.

“제가 한 번 입어 볼 테니 이따가 가져가서 파세요. 은자로 바꾸면 누이동생의 병을 고칠 수 있을 거예요.”

구염황은 그런 류정헌의 모습을 부끄러운 듯 바라보면서 차마 그녀에게 선물로 주는 거라고 말할 수가 없었다.

류정헌은 매우 기뻤다. 비록 지금 그녀의 신분은 예전에 비할 바가 아니었지만 그녀는 여전히 눈부신 일출을 좋아했고 해가 지면 귀가하는 나날을 좋아했다. 마음가짐도 예전과 다름없었다.

“정말 예쁘네요. 저 어때요?”

구염황은 누이동생의 잘못을 저주했다.

“잘 어울려요.”

류정헌이 더욱 찬란하게 웃었다. 그녀는 걸쳤던 겉옷을 벗어 조심스럽게 갠 다음 손으로 톡톡 쳤다.

“얻는 게 쉽지 않았겠네요. 분명 좋은 가격에 팔 수 있을 거예요.”

구염황은 류정헌이 걱정하는 모습에 돌연 참을 수 없는 감정을 느꼈다. 그는 류정헌에게 진실을 알 기회를 주지 않고 오로지 그녀가 금기를 깨고 자신을 좋아해 주기만을 바랐다.

‘어째서 정헌의 명성이 훼손되는 건 생각하지 않았을까? 그런 내가 무슨 자격으로 그녀가 선물을 받아 주지 않는다고 불쾌해 할 수 있을까.’

구염황은 순간 머리가 환해지는 걸 느꼈다. 더는 이럴 수 없었다. 그녀에게 모든 것을 공개하고, 그녀의 느낌과 생각을 묻고, 자신의 마음을 받아들일 건지 물어보아야 했다.

“정헌…….”

하얀 모피에서 시선을 뗀 류정헌이 의아한 눈길로 반구를 바라보았다. 상대가 경칭하지 않고 자신의 이름을 부른 것에 불쾌해 하는 기색은 없었다.

구염황은 갑자기 긴장했다. 바깥에는 눈이 펑펑 쏟아지고 있었고, 방 안은 그윽한 향기로 가득했다. 눈앞의 소녀는 세상에서 가장 중요하고 또 중요한 사람이었다. 구염황은 감히 경솔하게 굴 수 없었다.

“할… 할 말이 있어요…….”

류정헌이 살짝 긴장했다.

“무슨 일인데요? 설마 누이동생에게 무슨 일이라도…….”

“아니, 아닙니다.”

‘상아, 미안하다. 오라버니가 널 허약한 병자로 만들었구나.’

“저에 관한 이야깁니다.”

류정헌이 더욱 놀랐다.

“당신이 왜요? 설마 집안에 유전병이라도 있는 거예요? 어쩐지 뚱뚱하더라니 그게 다…….”

구염황은 순간 밖으로 뛰쳐나가고 싶었지만 그에게는 떳떳하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요조숙녀는 군자의 좋은 배필이라고 아버지께서도 말씀하시지 않던가.

“나, 나와 혼인해 주세요.”

구염황은 재빨리 분명한 의사를 밝혔다.

“오해하지 말아요! 난 당신을 모욕하는 게 아닙니다. 사실 내 누이동생은 아프지 않고, 나는 당신을 아내로 맞이할 만한 신분을 갖고 있어요. 다만…….”

구염황이 고개를 떨어뜨렸다. 그는 약간 자신이 없었다. 이런 기분은 본래 태자인 그에게 나타나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백만이 넘는 익사체를 마주하고도 눈 하나 깜작하지 않던 그가 갑자기 자신감을 잃고 약간 주춤거렸다.

“당신이 내 청혼에 동의하는지 알고 싶어요. 난 두렵습니다. 내가 어른들께 당신을 아내로 맞이하고 싶다고 이야기하면 괜히 당신이 원하지 않는 혼사를 마지못해 받아들일까 봐…….”

말을 마치고 고개를 든 구염황은 형형한 눈빛으로 류정헌의 답을 기다렸다. 그에게 매우 중요한 하나의 답을.

류정헌은 약간 의아한 눈으로 반구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 속에는 어떠한 장난기도, 사람을 우롱하는 기색도 없었다. 왜인지 몰라도 그녀는 구염황의 말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믿었다. 아마 그의 눈이 너무 맑고 진지해서일 것이다. 그리고 그가 최근에 보여준 행동들은 그가 평범한 머슴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 주고 있었다.

하지만 류정헌은 단지 옅은 미소만 지을 뿐, 손으로 하얀 모피를 어루만지며 부드럽고 의연하게 말했다.

“혼인은 부모님의 의사와 매파의 말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죠. 저는 그저 아버지의 뜻을 따를 거예요.”

구염황은 가슴 속에 일렁이던 물보라가 순식간에 바닥으로 떨어져 오장육부를 치는 듯한 아픔을 느꼈다.

“난… 난 당신의 대답이 듣고 싶습니다.”

류정헌의 말투는 담담했고, 어떤 흔들림도 없었다.

“제가 무슨 대답을 할 수 있겠어요. 혹시 당신은 내가 마땅히 어떤 대답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나요? 그건 강요나 마찬가지예요.”

“하지만 자기만의 생각이 있을 게 아닙니까. 당신은 내가 청혼한 걸 어떻게 생각해요?”

“아까와 같은 말을 할 수밖에요. 혼인은 부모님의 의사와 매파의 말에 의해 결정되는 거예요.”

류정헌은 딱히 생각하지 않았다. 자신이 혼사를 좌지우지할 수 있는 것도 아닌데 뭐하러 쓸데없는 말썽을 만들겠는가. 그저 혼인을 하는 일일 뿐이었다. 그녀는 류씨 가문의 적녀 신분으로 혼인을 하는 것이니 만큼 다른 일은 걱정하지 않았다.

구염황은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수년이 흐른 후, 구염황은 이 날을 회상하며 당시 자신이 너무 어렸고 자신감이 과했음을 인정했다. 그의 신분과 지위는 당시 그가 마땅히 꿰뚫어 보았어야 할 본질과 류정헌의 어쩔 수 없는 처지를 보지 못하게 했다.

하지만 지금의 구염황은 이 사실을 알지 못했다. 현재 그는 젊고 오만하며 불같은 열정을 쏟을 수도, 동시에 응답받지 못하는 것은 포기할 수도 있었다. 그의 오만함은 그에게 쟁취할 가치가 없다고, 어떤 것도 구할 필요가 없다고 여기게 했다. ‘얻을 수 없는 것이야말로 가장 아름답다’는 말은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에게 적합하지 않았다. 그는 이미 쟁취했지만 미인은 이에 응하지 않았다.

구염황은 속으로 이미 마음을 굳혔다. 그의 눈빛은 자조의 빛을 띠고 있었지만 자신을 연민하지는 않았다.

“알겠습니다. 앞으로는 절대 아가씨를 찾아와 폐를 끼치지 않겠습니다. 이 옷은 아가씨께 드리는 거니 받아주세요. 부디 잘 지내세요. 앞으로 화목하고 행복한 혼인을 하시길 바라겠습니다.”

하늘 가득 눈발이 날리는 가운데 구염황은 원하는 답을 얻지 못하고 떠났다. 소중하게 간직한 마음을 바쳤지만 결국 얻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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