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독후중생계 (441)화 (441/449)
  • 외전 구염상 2-64

    구염상은 세 가지 과일을 한입에 먹어치웠다. 입안에 과일 향이 퍼져 나가자 기분이 매우 좋았다.

    “어마마마, 실은 오라버니가 혼인하는 게 아쉬워 재촉하지 않으시는 거죠? 역시 딸보다 아들을 아끼시네요.”

    장서열이 딸의 이마를 콕콕 찔렀다.

    “이 양심 없는 것, 아바마마께서 널 위해 얼마나 동분서주하셨는데.”

    구염상이 달콤하게 빙긋 웃었다.

    “아바마마께서는 우리를 빨리 황궁에서 멀리 떨어뜨려 놓고 어마마마와 단둘이 오붓한 시간을 보내려고 그러신 거예요.”

    장서열이 소리 없이 한숨을 내쉬었다.

    “너는 도무지 누굴 닮았는지 모르겠구나. 이렇게 허튼소리나 하고 말이다.”

    구염상은 순간 식은땀이 나는 걸 느꼈다. 입안의 과일 향기도 갑자기 비위가 상했다. 그녀는 줄곧 품행이 방정하고 살뜰한 딸이었다. 그런데 언제부터 허튼소리나 하는 딸이 된 걸까.

    “어마마마, 오라버니에게 좋아하는 사람이 생긴 것 같아요.”

    장서열은 즉시 정신이 드는 걸 느꼈다.

    “어느 집 아가씨니?”

    “모르겠어요. 오라버니가 거기까지는 말하지 않았어요.”

    구염상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자애롭고 따듯한 목소리가 그녀의 말을 이어받았다.

    “누구긴 누구겠어. 류씨 가문의 계집이겠지. 적녀 신분도 보장받지 못하는.”

    “아바마마, 오라버니가 좋아하는 사람을 그렇게 말씀하시면 안 되죠!”

    그러나 구염상이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이어 물었다.

    “헌데 류씨 가문이요? 그 엄청 재미있는 류 대인의 그 류씨 가문 말이에요?”

    장서열이 증거를 요구하듯 구염락을 쳐다보았다. 구염황의 혼사로 장서열이 어찌 애를 태우지 않았겠는가. 너무 애를 태운 덕분에 이제 아들의 혼사를 생각하는 것조차 귀찮아졌을 뿐이다.

    장서열의 곁에 앉은 구염락은 황후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딸의 쟁반 위에 있는 과일을 한입 먹었다.

    “그래. 녀석이 어쩐지 어제 허겁지겁 돌아오더니 그 아이를 위해 나섰더구나.”

    구염락은 아직 어떻게 될지 모르는 구염황의 사랑을 팔아 버렸다. 장서열이 참지 못하고 물었다.

    “그 아이는…….”

    구염락이 혹평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좀 기다리려고. 두 사람은 반드시 헤어져야 해. 그 혼사는 결국 좋은 말로를 맞이하지 못할 테니까.”

    구염상과 장서열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 이런 식으로 아들을 저주하는 아버지가 어디 있을까. 마치 아들을 비웃을 순간만 기다리는 사람 같았다.

    장서열은 참지 못하고 아들을 위해 변론하기 시작했다.

    “황아는 정도를 지킬 줄 아는 아이예요. 전 황아가 태자비에게 잘할 거라 믿어요.”

    구염상은 과일도 먹지 않고 의아한 눈으로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아바마마, 어찌 그렇게 말씀하세요?”

    구염락은 전혀 사심이 없었다. 그는 단지 방관자의 입장에서 두 사람의 관계를 깊이 생각해봤을 뿐이다.

    “설마 두 사람이 평생 사이좋게 지낼 만한 공통점이 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구염락은 두 여인의 생각을 전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말을 이었다.

    “적녀인 류정헌은 어렸을 때부터 장자에서 일하며 자랐고 네 오라버니는 매일 멍하니 시간을 보냈지. 상아 넌 그 아이가 사람으로서 도리에 맞지 않는 정신을 가진 네 오라버니를 이해할 거라 생각하느냐? 아니면 네 오라버니가 그 아이의 궁색함을 이해할 수 있을까?

    그 아이는 네 오라버니를 이해하지 못하는 데다 웬만해서는 억울해 하지 않는 성격을 갖고 있지. 반면에 네 오라버니는 ‘신’과 같은 사고방식을 갖고 있고. 이렇게 다른 두 사람이 어떻게 서로를 아끼고 사랑하는 부부가 될 수 있을까.”

    ‘신’이라는 단어를 말할 때 구염락은 비꼬는 듯했다. 그는 아들의 정신 없는 사고방식에 동의할 수 없었다.

    장서열의 안색이 순간 나빠졌다. 공통점이 없다니? 기품은 길러 내는 거였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감화된 결과라고!

    장서열이 싱글벙글 얼굴에 미소를 띠고 말했다.

    “폐하께서는 참으로 영명하십니다. 당신의 아들은 높은 자리에서 교양 있고 탁월한 능력을 갖추었는데, 류씨 아가씨는 농촌에서 자라 식견이 천박하니 물론 어울리지 않지요. 생각해 보니 신첩도 그만 황후 자리에서 내려와야겠습니다. 문밖 출입도 못 하는 일자무식이 폐하의 미움을 사지 않도록 말입니다!”

    장서열은 마지막 말을 뱉으며 이를 꽉 깨물었다. 구염상은 경악했지만 순간 웃음이 나왔다. 틀린 말도 아니지 않은가. 어머니는 궁에서 오랜 세월 매일 창극을 듣거나 자수를 놓았고, 궁을 나선 것도 몇 번 되지 않았다. 이는 창해를 바라보는 매처럼 힘찬 아버지와는 확실히 거리가 멀었다.

    순간 당황한 구염락은 속으로 몹시 흐뭇해 하면서도 황급히 부인을 달랬다.

    “그게 무슨 말이야. 난 그저 비유를 한 거야. 똑똑하지 않더라도 짐은 당신을 사랑해.”

    장서열의 안색이 더욱 나빠졌다.

    구염락은 자신이 말실수를 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장서열의 식견이 한정된 건 사실이었으니 구태여 양심을 속이면서까지 칭찬할 필요는 없었다. 이건 그가 힘들게 장서열을 길러 낸 결과였고, 자신의 서열이가 영원히 처음처럼 순수하고 사랑스러운 모습으로 살게 하기 위함이었다. 스스로 박식한 지식을 갖췄다고 자만하는 사람은 사실 불쌍한 사람이니까.

    하지만 구염락은 이러한 생각을 장서열에게 영원히 말하지 않을 생각이었고, 그녀에게 인생에서 느낄 수 있는 더 많은 의미를 깨닫게 하여 자신을 떠나게 만들지 않을 터였다.

    “그냥 생각없이 말을 뱉은 거야. 화내지 마. 우리 황후만큼 온화하고 자상하고 선량하고 부드러운 사람이 또 어디 있겠어? 당신을 아내로 맞이한 건 인생의 복이야.”

    구염상은 아무래도 자리를 뜰 때가 됐다고 생각했다. 구염락이 돌연 딸을 쳐다보며 말했다.

    “네 오라버니에게는 짐이 뭐라고 말했는지 알려 주지 말거라. 두 사람이 맞고 안 맞고는 전적으로 그 아이들의 문제니까.”

    구염락이 아내의 머리를 문지르며 말했다.

    “내가 실수로 한 말을 붙잡고 늘어지지 마. 내가 무슨 뜻으로 그런 말을 했는지 당신도 알잖아. 황아와 류정헌은 사물을 보는 관점이 다르니 모순이 생길 수밖에 없어. 예를 들어, 당신 아들은 큰일에서는 아무런 거리낌 없이 살육을 벌이지만 작은 일에서는 오히려 소심하지. 황아야 그런 일이 사소하다고 생각하겠지만 류정헌은 아마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거야.

    특히 당신 아들이 고아나 과부를 괴롭히면 류정헌은 아마 그런 것들에 신경 쓰지 않는 황아를 이해하지 못할 테지. 이건 어쩔 수 없는 사실일 뿐, 일부러 누구를 깎아내리려는 의도는 없었어.”

    구염상은 아버지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처음에는 그녀 역시 이해할 수 없었다. 구염상 역시 오라버니의 자리에 서서 세상을 바라본 적이 없었으니까. 그녀는 언제나 조심스럽게 사람의 도리를 지키며 살 생각을 했고, 약자를 동정하려 했고, 오라버니가 남의 것을 손에 얻고 득의양양해 하는 행동을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건 큰 문제가 아니에요. 오래되면 오히려 익숙해지지 않을까요?”

    말을 하는 구염상 자신도 새로운 환경에 적응한 사람 중 하나였다. 부족한 것은 노력해서 메꾸면 된다. 태어날 때부터 남보다 한 수 아래인 사람은 없었다.

    구염락이 싸늘한 시선으로 딸을 힐끔 바라보았다. 그는 딸의 말에 토를 달지 않고 간단하게 답했다.

    “그 아이 이야기는 그만하자. 어차피 부인이 한 명 더 늘어난다고 해서 별 차이는 없을 테니 말이다. 그저 후궁 중 하나일 뿐이겠지.”

    구염상은 놀라고 의아한 눈으로 아버지를 쳐다보았다.

    ‘오라버니가 부인을 여러 명 두게 될 거라는 건가?’

    구염락은 태연하게 돌아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설마 네 오라버니에게 나처럼 이 강산을 홀로 떠맡을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이 국토는 이미 예전의 모습이 아니야. 특히 나 같은 제왕이 나온 뒤부터는 더더욱. 설령 황아에게 그러한 능력이 있다 해도 쉽게 도박을 할 수는 없을 게다.

    아들이 하나뿐인 후폭풍은 내가 죽은 후 비로소 나타나게 될 테고, 그 과정에서 나라를 다스리는 황아가 짊어져야 할 부담과 중임은 더욱 커지겠지. 류정헌이 아들을 낳지 못하는 건 고사하고, 서너 명의 여인과 몇 년을 함께 지내 겨우 아들 한 명을 얻을 수도 있어. 변수가 이렇게 많은데 황아에게 비빈이 한 명만 있을 리 없지. 황제가 단 한 명의 여인을 두는 일이 어디 쉬운 줄 아느냐?’

    구염락의 시대는 이전과 달랐지만 또 비슷하기도 했다. 후궁을 들이는 일은 입궁하는 여인의 가문에 권력을 분산시키기 위한 방법이자, 그들이 완곡한 방식으로 황제를 알현할 수 있게 해 주는 길이었다.

    그래서 구염락은 구염황이 어떤 여인과 사랑에 빠지든 걱정하지 않았고, 설령 몇 명 더 생긴다 할지라도 상관없었으며, 애정 문제에서 몇 번 넘어져도 그러려니 생각했다. 그는 단지 딸이 구염황의 새 여인에 대해 말하기에 몇 마디 언급했을 뿐, 두 사람이 잘 될지, 조화로운 사이가 될지는 사실상 그와 상관없는 문제였다.

    구염락은 얼른 간절하게 아내를 쳐다보았다.

    “새로운 곡을 하나 배워 왔는데, 한 번 들어 보지 않겠어?”

    “관심 없어요.”

    “그러지 마. 화를 내면 쉽게 늙는대. 아니면 예악사禮樂司를 시켜 당신을 위한 금음극琴音劇을 준비하라고 할게.”

    “들어도 못 알아들을 텐데요, 뭐. 식견이 부족하고 비천한 몸이라.”

    구염락이 벌컥 화냈다.

    “감히 누가 그런 말을 해? 당장 그자를 끌어내 목을 베겠어!”

    구염상은 자리를 뜨기로 했다. 아버지가 어머니를 진저리 나게 만드는 걸 보기가 힘들었다. 그러나 그보다 더 견디기 힘든 건 어머니가 아버지를 단단히 혼내 주고 싶어하다가도 또 너스레를 떠는 아버지를 몹시 사랑한다는 사실이었다.

    사랑은 언제나 불공평했다. 세월이 흐를수록 너무 쉽게 새로운 사람을 받아들이고 너무 쉽게 상대의 진심을 알아보게 만들었다.

    조로전 밖에 선 구염상은 바람을 따라 빠르게 흘러가는 구름과 청명한 하늘을 바라보며 약간 싸늘해진 공기를 들이마셨다. 겨울이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또 다른 혼례를 무사히 끝마칠 수 있을까?’

    궁을 나오던 구염상은 마차 한 대가 문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누군가 휘장을 걷고 마차에서 뛰어내렸다.

    “공주 전하, 여깁니다.”

    구염상이 담담하게 싱긋 웃었다.

    “봉 대인.”

    봉익이 자연스럽게 웃으며 얘기했다.

    “궁에서 당신이 입궁했다는 걸 알려 줘서 데리러 왔습니다. 나가서 바람을 쐴까요? 아니면 태자부로 데려다 드릴까요?”

    “바람 쐬러 가요.”

    장래의 부군이 될 이 남자는 최소한 그녀에게 매우 잘하는 남자가 될 터였다. 구염상은 그에게 좋은 아내가 되어 주지 못할까 걱정됐지만 봉익이 그녀에게 좋은 남편이 되어 줄 거라는 건 확실했다.

    “우리 어디 가요?”

    “온차방溫茶坊이요. 요즘 날씨가 점점 추워지고 있으니 아마 곧 눈이 올 겁니다. 가서 따뜻한 차와 탕을 마시면서 몸을 녹이시죠.”

    구염상이 봉익의 손바닥에 손을 올리며 부드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두 사람이 막 마차에서 내려 온차방 안으로 들어가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안에서 황급히 뛰쳐나온 헌원사사가 급히 마차에 올랐다. 그를 본 봉익의 안색이 순간 진지해졌다.

    “무슨 일인가?”

    눈시울이 붉어진 헌원사사는 최대한 감정을 억제하고 있었다. 그는 봉익의 뒤에 선 상 공주를 보며 차분하게 답했다.

    “집안에 급한 일이 생겨 먼저 가려고 합니다.”

    봉익이 말했다.

    “도움이 필요하면 말하도록 해.”

    헌원사사는 허둥지둥 자리를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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