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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중생계 (440)화 (440/449)
  • 외전 구염상 2-63

    류소양은 황급히 고개를 숙이고 허리를 굽히며 잘못을 인정했다. 그는 속으로 감격하고 또 두려움을 느끼면서도 이 상황이 믿겨지지가 않았다.

    ‘태자께서 정말로 정헌이를 마음에 들어 하신단 말인가?’

    류소양은 어안이 벙벙하다가도 사람이 없을 때면 참지 못하고 득의양양한 미소를 지었다. 그의 딸은 과연 굉장했다. 태자의 눈에 들다니!

    ‘관씨 가문이 대수인가? 버리면 그만이지!’

    돌아온 류소양은 류소경보다도 더욱 딸에게 잘해 주었다. 순식간에 자애로운 아버지로 변한 그는 좋은 물건이 생기면 모두 딸의 거처로 보냈다. 그는 류정헌을 물에 빠뜨렸을 가능성이 있는 사람이라면 조사도 하지 않은 채 모두 사당에 가둔 뒤, 채찍질을 한 후 그날 밤 내내 사당에 버려뒀다. 또한 낮에 류정헌과 관사소가 백년해로하기를 바란 사람들을 모아 모두 한 번씩 손을 봤다.

    류소양은 독하게 일을 처리하면서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는 아직 예비 후계자일 뿐, 아직 정말로 가문을 이어받은 게 아니었다. 특히 지금 등 뒤에는 그를 겨누고 있는 칼이 있었다. 지금 독하게 손을 쓰지 않으면 태자에게 더욱 독하게 당할 것이다. 류소양이 가문을 위해 배후에서 음모를 꾸민 자들을 처벌하는 건 당연했다.

    한편, 부드러운 침대 위에 누워 있던 류정헌은 여전히 현실 같지가 않은 기분에 사로잡혀 있었다. 순식간에 주변의 모든 게 변했으나 그녀는 영문을 알 수 없었다.

    * * *

    태자부의 촛불은 대낮처럼 저택을 밝게 비췄다. 누이동생의 방에 들어간 구염황이 구염상을 향해 싱긋 웃으며 알랑댔다. 방을 어떻게 꾸며야 좋을지 생각하고 있던 구염상은 곁눈질로 오라버니를 쳐다보다가 과도하게 찬란한 미소를 짓고 있는 그의 얼굴을 한쪽으로 치웠다.

    “요즘 바빠요? 이렇게 늦게 돌아오고.”

    구염황이 덜떨어진 사람처럼 헤헤 웃었다.

    “상아, 뭐 하나만 물어봐도 돼?”

    오라버니가 반격은커녕 환하게 웃으며 자신을 바라보자 구염상은 돌연 알 수 없는 예감이 드는 걸 느꼈다.

    “오라버니, 좋아하는 사람이 생긴 거죠?”

    구염황이 아무 말 없이 씨익 웃었다. 구염상은 손에 든 붓을 내려놓고 엄숙한 눈으로 오라버니를 바라보았다.

    “어느 집 규수예요? 언제부터예요? 아바마마와 어마마마께서도 이 사실을 아세요? 그녀를 태자비로 맞이할 거예요? 오라버니는 그녀에게 진심이에요?”

    구염상은 이내 손을 휘휘 저었다.

    “마음대로 해요. 오라버니도 나름의 생각이 있을 테니.”

    말을 마친 그녀는 다시 붓을 들고 자신의 거처를 그리려 했지만, 누이동생의 손에서 붓을 빼앗은 구염황은 자신의 둥글둥글한 얼굴을 손으로 받친 채 쓴웃음을 지으며 누이동생을 바라보았다.

    “상아, 너 혹시 빨리 살 빼는 방법을 알고 있니? 내가 이런 얼굴로 어떻게 네 올케를 집에 데려올 수 있겠어.”

    구염상은 조금도 의외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오라버니가 난감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자 구염상은 그의 두툼한 볼을 꼬집고 웃으며 말했다.

    “이제야 놀기만 한 게 후회가 되나 보죠? 이젠 오라버니가 남의 구경거리가 될 차례군요. 하하!”

    구염황이 누이동생의 손을 치웠다.

    “장난하지 마. 난 진심이란 말이야. 절박하다고.”

    살을 빼야만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그는 이번 사랑이 흐지부지 끝나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류정헌을 좋아한다는 걸 확신했다. 그리고 그는 류정헌도 자신을 진심으로 좋아해 주기를 바랐고 권력으로 억압할 생각은 없었다.

    구염상은 진지함 속에 씁쓸함이 섞여 있는 오라버니의 표정을 보며 그에게 분명 무슨 일이 있었던 거라고 추측했다. 그리고 그건 어쩔 수 없이 외모와 관계되어 있을 가능성이 컸다.

    돌연 오라버니의 얼굴을 잡은 구염상이 매우 진지하게 말했다.

    “오라버니가 그런 말을 하다니, 괴로운 일을 당한 게 분명하군요!”

    매우 우수한 오라버니를 바라보며, 구염상이 이를 악물고 말했다.

    “만일 위기를 느꼈다면 지금 살을 빼 봤자 이미 늦었어요. 차라리 오라버니의 매력을 보여줘요. 오라버니, 제 말 믿어요. 살을 빼는 건 단기간에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에요. 하지만 오라버니의 매력을 발산하는 건 언제든지 가능해요.”

    “나한테 무슨 매력이 있겠어. 내가 어떻게 살이 쪘는지 모르는 것도 아니면서 그런 말을 하다니! 내 특기는 오로지 조정 대신들을 구역질 나게 만드는 것뿐이야!

    내게 있는 매력을 꼭 꼽아야 한다면 아마 태자 지위겠지. 아마 그녀에게 알리면 내게 반항할 엄두도 못 낼걸. 하지만 그러는 건 내 힘만 믿고 남을 업신여기는 것 같아서 싫어. 난 그녀를 괴롭히기 싫어. 하지만 살을 뺀 뒤에 그녀가 사라져 있을까 봐 두려워. 그럼 살을 빼고도 슬플 거야.”

    구염상이 오라버니를 밀어냈다.

    “잘 아시네요! 그런 사람이 왜 여기서 불쌍한 척하고 있어요? 오라버니 생각에 자신이 그녀를 사랑할 가치가 있는 사람이고 그녀에게 행복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용감하게 구애해요. 사랑은 따뜻한 방식으로 얻을 수 없다면 칼이나 채찍을 써서 얻는 거예요. 둘 다 효과는 같아요.”

    구염락의 밑에서 큰 구염황은 돌연 누이동생의 말이 매우 일리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류정헌은 단지 한순간 상대의 외모에 미혹된 것이니 어떤 문제가 있다고 말할 수 없었다. 그가 잔인하게 남의 사람을 빼앗는 것도 아니니까.

    구염황은 순식간에 자신감이 생겼다. 그는 살을 빼는 동시에 그녀에게 잘해 주기로 결심했다. 그는 그녀의 마음속에 자신의 자리를 만든 뒤 구혼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성실하지 못한 모습으로 그녀를 도망가게 해서는 안 되었다.

    구염상은 지금 오라버니가 무엇을 고민하고 있는지 다 알고 있었다. 구염황은 신분을 밝힌 후 손쉽게 사랑을 얻고 싶은 마음과, 그녀가 자신을 좋아하지 않을 거라는 마음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었다.

    이는 미성숙한 남자의 전형이었지만 구염상은 오라버니를 걱정하지 않았다. 오라버니는 자신보다 식견이 넓은 사람이었으니까.

    설령 단기간 내 살을 빼지 못할지라도 오라버니는 어떻게 해야 가장 좋은 면을 보여줄 수 있을지 알고 있었다. 만일 오라버니가 상대방의 마음을 얻지 못한다면 그건 분명 오라버니가 불필요하다고 생각해서이거나 혹은 최선을 다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때가 되면 오라버니는 어쩌면 상심할지도 모르지만, 분명 자포자기는 하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구염상의 믿음은 아버지로부터 배운 것이었다. 구염락은 이제껏 두 자녀의 일에 일체 관여하지 않았다. 관심이 없어서가 아니라 자식을 믿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구염상은 앞으로 다가올 혼사를 잘 치르고, 오라버니 역시 감정을 잘 갈무리할 거라고 믿기로 했다.

    * * *

    이른 새벽, 첫 번째 햇살이 대지를 비출 때 구염황은 이미 한참 전 태자부를 떠나 있었다. 암살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동행한 사람은 고원이었다. 고원은 의심이 많고 높은 지위에 있었지만 약간 바보스러웠기에 그를 데리고 다니면 의외의 효과를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구염황은 생각했다.

    한편, 구염상은 아침 일찍 일어나 금을 연습한 후 어화원의 공기를 들이마시며 부름을 받고 입궁했다. 장서열은 딸을 잡아끌며 끝없이 잔소리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날이 이렇게 추워졌는데 어찌 이리 얇게 입고 다니는 것이냐. 곁에 있는 마마嬤嬤의 말을 들어야지. 괜히 어미를 걱정시키지 말고. 네 오라버니는 요즘 바쁘니 괜히 엉겨 붙지 말고 궁에 들어와 있거라. 다음 달에 공주부公主府 수리가 끝나면 어차피 옮겨가 살아야 하잖니.

    앞으로는 혼자 집안일을 맡아 처리해야 하니 기억력을 키우거라. 지금은 나와 네 아버지가 있으니 마음껏 게으름을 피워도 돼. 하지만 만일 우리가 없으면 네 성격상 손해를 보고도 하소연도 못 할 테니 걱정이구나.

    봉익이 야망이 없는 사람이라 다행이다. 집안 대대로 학문이 깊고 성격이 강직하여 권력에 아첨하지 않으니 널 지켜 줄 수 있을 테니까. 봉익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아바마마께서 흠천감에 날짜를 잡으라 일러두셨단다. 섣달의 첫날이니 이제 곧 다가오겠구나. 난 이미 네게 줄 혼수를 준비해 놓으라고 일러뒀단다. 필요한 게 있으면 말하렴. 어미가 준비해 줄 테니.”

    딸의 혼사 이야기가 나오자 장서열은 자기도 모르게 딸의 손을 어루만지며 속으로 괴로워했다. 전생에서 그녀는 딸을 영예롭게 시집보냈다. 기세 높은 헌원씨 가문에서 딸을 지켜 줄 거라 믿으면서. 그렇게 장서열은 딸의 생활에 방해되지 않도록 헌원씨 가문의 이름으로 어떠한 일도 하지 않았고, 그렇게만 하면 딸은 분명 잘 지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과거 상아는 잘 살지 못했고 처량한 말로를 맞이했다. 그 일로 장서열은 몹시 죄책감을 느꼈다. 이번 생에서 장서열은 사위의 능력을 보지 않았다. 그저 딸에게 잘해 주고, 집안에 부귀영화를 꾀하는 친척들만 없다면 다른 건 바라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 다행히도 딸은 공주부에서 부마를 맞아들이게 되었다. 앞으로는 집안의 자질구레한 일을 챙길 필요 없이 오로지 부마 한 사람과 살 것이고, 무엇보다 구염락과 장서열이 지켜 주고 있으니 딸에게는 분명 아무 일도 없을 것이다. 설령 자신이 죽는다 해도 딸에게는 오라버니가 있으니…….

    ‘이럴 줄 알았으면 애초에 상아를 위해 아우라도 하나 더 낳아 줄 것을!’

    하지만 구염락이 죽어도 더는 아이를 갖지 않겠다고 성화를 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었다. 살육을 많이 저질러 몸이 상했다는 게 그 이유였다. 물론 몸이 상했다면서 밤에는 전혀 그렇지 않은 게 문제였지만. 그 때문에 장서열은 딸을 지켜 줄 형제를 더 낳아 줄 수 없었다.

    구염상이 어머니를 보며 싱긋 웃었다.

    “어마마마, 뭘 그리 걱정하세요. 지금 걱정해야 할 사람은 제게 장가올 사람이에요. 아마 봉 씨 가문은 아들의 혼수와 공주부에 들여보낼 몸종을 준비하느라 골머리를 썩고 있을 거예요. 어마마마께서 괜히 그들처럼 애태우실 필요 없어요.”

    딸의 말에 장서열은 한결 기분이 나아졌다. 딸아이는 누구를 닮았는지 무슨 일이든 마음에 담아두지 않았다.

    장서열은 참지 못하고 딸의 이마를 콕콕 찔렀다.

    “잘도 떠드는구나. 잘 들거라. 봉익을 괴롭히지 마. 그는 좋은 사람이야. 네 시어머니도 온순한 사람이라 평소 취미라고는 마작 몇 번 하는 게 고작이지. 봉익은 겉보기에는 좀 냉정해 보일지 몰라도 가족에게는 참으로 잘하는 아이니, 괜히 싸우지 말거라.”

    “명 받들겠습니다, 어마마마.”

    “입만 살아서는. 본래 네 사촌언니의 혼사가 먼저였는데 네 혼사로 난리가 나는 바람에 그 애의 혼사는 설을 지내고 치르기로 했단다. 어느새 너희가 혼인을 다 하는구나.”

    왕 마마嬤嬤 들고 들어오는 꿀즙과 과일을 바라본 구염상이 탐욕스럽게 눈웃음을 쳤다.

    “어마마마, 너무 감개무량 마세요. 지금은 오라버니에게 얼른 태자비를 들여 부모님을 기쁘게 해 달라고 재촉할 때예요. 오라버니에게 재롱을 떨 손주를 낳아 달라고 하세요.”

    아들의 혼사가 언급되자 장서열은 머리가 아팠다. 딸은 걱정을 덜 끼치는 편이었지만, 황아를 보고 있으면 아무리 좋은 여인이라도 황아에게 밟혀 죽을 것 같아 조마조마했다. 그런데도 아들은 누구는 말라서 싫고, 누구는 약해 보여 싫다고 했다. 장서열은 구염황이 대체 어떻게 생긴 태자비를 얻으려는 건지 두고 보자는 심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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