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구염상 2-61
류소경은 순간 다리에 힘이 풀려 휘청이다가 넘어질 뻔했다. 그는 미친 듯이 겁을 먹었다가 다시 미친 듯이 기뻐했다. 불가사의한 이 상황이 믿기지 않았다.
태자께서 언제 다른 규수에게 ‘성정이 좋다’는 칭찬을 한 적이 있던가? 또 어떤 미인에게 특별한 마음을 품은 적이 있던가. 절대 없었다! 주국의 유일한 태자 구염황은 눈이 높은 탓에 누구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고, 심지어 통방通房조차도 두지 않았다.
류소경은 다시 마음을 진정시키려 했지만 아무래도 진정할 수 없었다. 이것은 하늘에서 떨어진 금덩이나 마찬가지였다.
류소경은 흥분을 진정하지 못하고 스스로에게 물었다.
‘이게 정말인가? 가능한 일인가? 태자께서 정헌을 만난 적이 있고 그 아이에게 좋은 인상을 받아 마음을 주다니! 이런 경사가!’
이제 정헌은 신분 상승하여 장래 주국의 황후가 될 것이고, 류씨 가문은 태자의 외척으로 하늘을 찌르는 권세를 누릴 수 있었다.
류소경은 자신을 진정시키려 애썼다. 침착해야 했다. 이미 오랜 세월 권 상서와 함께 어울린 그는 이런 근거 없는 추측으로 평정을 잃어서는 안 되었다.
류소경은 숨을 깊게 들이마시며 너무 좋은 쪽으로만 생각하지 않으려고 최대한 노력했다. 그간 오래도록 관직 생활을 영위하며 얼마나 많은 흥망성쇠와 부침을 봐 왔던가. 헌데 지금 이렇게 근거 없는 태자비 자리 때문에 평정을 잃다니. 지난 삽십여 년간 수양을 쌓아온 자신에게 미안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이렇게 스스로를 설득하면서도 류소경은 도저히 생각을 멈출 수가 없었다. 누구라도 집안에 이런 일이 발생하면 무관심할 수 없을 것이다. 주국의 강산은 얼마나 강대하고, 황실은 얼마나 큰 권력을 누리고 있는가.
심지어 이 나라의 어린 주인이 자신의 딸에게 약간 호감을 보였다는 것을 전해 들었을 때에는 권서함조차도 잠을 이루지 못했다. 하물며 자신이 어찌 물처럼 마음을 고요히 하고 무관심하게 행동할 수 있겠는가.
류소경은 더는 생각을 억제하지 않고 마음껏 상상의 나래를 펼치기 시작했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가능성이 있었다. 태자는 지금 류소양의 적녀를 대신해 화풀이를 하고 있다. 그리고 그의 목표는 류소양이 류정헌에게 더욱 좋은 대우를 해 주는 것이었다.
태자가 스스로 존귀한 지위를 내려놓고 이런 사소한 일에 관여했다는 건 이것이 더 이상 사소한 일이 아니라는 걸 의미했다.
류소경은 자기도 모르게 날 듯이 발걸음을 재촉하여 마차를 타고 집으로 달렸다.
저택으로 들어선 류소경은 류정헌이 물에 빠지는 변고를 당했지만 건강에 지장이 없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순간 그의 머릿속에 쾅 하는 굉음이 울렸다. 모든 추측이 현실이 되고 있지 않은가. 그는 돌연 숨이 막히는 것과 동시에 극도의 기쁨과 공포를 느꼈다.
만일 태자가 정말로 류정헌을 위해 나섰고, 그가 정말로 류정헌을 좋아하는 거라면 류씨 가문은 의심할 여지없이 태자의 내정된 외척이나 다름없었다. 그렇다면 조금의 실수도 있어서는 안 되었다. 특히 태자가 이미 말을 꺼낸 이상 더는 가문에서 류정헌을 홀대하거나 함부로 대해서는 안 될 일이었다.
류소경은 침착하려고 애쓰면서 깊이 숨을 들이마신 뒤 별로 개의치 않는 척 물었다.
“정헌이는 어디 있느냐? 내가 가 봐야겠구나. 어쩌다 물에 빠졌는지 소상히 고하라!”
류소경의 심복이 당시 상황을 낱낱이 털어놓았다. 그는 어떤 뚱뚱한 하인 한 명이 나타나 아가씨가 물에 빠진 것은 누군가 고의로 밀었기 때문이라고 의심했으며, 이에 화가 난 손자 도련님께서 그 하인을 내쫓았다는 이야기까지 고했다.
순간 다리가 휘청한 류소경은 머리가 띵해지는 걸 느꼈다. 생각할 게 너무 많아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았다.
“네… 네가 말한 뚱보가… 얼마나 뚱뚱했느냐…….”
류소경은 자신의 목소리가 얼마나 조심스럽고 작은지 알아채지 못했지만 부하는 이를 알아챘다. 주인이 이상하게 조심스럽고 신중한 것을 본 부하는 겁에 질려 감히 함부로 말할 수 없었다.
“아…무래도 소인은 자세히 설명하기 어려우니, 자리에 있던 사람을 불러 설명하라 이를까요? 그자는 장자에서 왔다고 들었습니다. 장자의 관사도 함께 와서 설명하라 이르면…….”
“그래, 당장 오라고 해라! 뚱보를 본 자는 모두 오라고 해! 정헌이는 부를 필요 없다. 지금 겁에 질려 있을 테니 편히 쉬게 하거라. 태의는 갔느냐? 아직 안 갔으면 다시 아가씨의 진맥을 보게 하라! 후부에 있는 의원, 의녀도 모조리 보내어 아가씨를 돌보게 해!”
다시 류정헌을 언급할 때, 류소경은 자신도 모르게 공손함을 더한 상태였다.
부하가 이를 알아듣지 못 했을 리 없었다. 그 역시 조심에 조심을 더하여 행동하면서 속으로 적녀 아가씨가 주인의 눈에 들었으니 그녀에게도 좋은 날이 머지않았다고 생각했다.
잠시 후, 반구를 본 모든 사람이 류소경의 앞으로 집결했다. 그들을 근처에 있는 정자에 부른 류소경은 반구의 외모를 설명하게 했다.
장자에서 올라온 노비들은 순식간에 두려워졌다. 반구가 류씨 가문의 아가씨의 손을 잡은 일을 이야기하면 큰일이 날 줄로 오해한 그들은 화가 미칠까 두려워 누구 하나 앞으로 나서서 입을 열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보다 더욱 긴장한 건 류소경이었다.
‘태자인 걸까? 만일 그렇다면… 정말 그렇다면…….’
그렇다면 태자와 류정헌은 이미 장자에서부터 친밀한 관계였으며, 태자는 존귀한 지위를 내려놓고 기꺼이 장자에서 머슴살이를 했다는 것을 뜻했다. 단지 조금 호감이 있어서 그런 거라고 말하면 누가 믿겠는가?
‘두 사람은 언제부터 알고 지냈을까? 관계는 어느 단계까지 발전했을까? 만일… 이미 평생을 약속한 사이라면?’
류소경은 하마터면 순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조카에게 가서 무릎을 꿇을 뻔했다. 태자의 말은 황제의 말과 같은 효력을 갖고 있었다. 태자의 여인이 후부에서 이런 억울한 일을 당했으니, 후부의 좋은 날은 이제 끝장인 것이 아닌가!
류소경은 이런 가능성을 생각하며 억지로 자리에 앉았다. 침착하자, 침착해. 만일 그가 먼저 어떤 허점을 보이거나 혹은 말도 안 되는 추측을 한 거라면 비웃음거리가 될 것이 뻔했다.
“말해 보아라. 긴장할 필요 없이 아는 대로 얘기하면 된다. 지금 너희에게 죄를 물으려는 게 아니다. 그동안 너희가 아가씨를 잘 돌봐 줬다는 걸 알고 있다.”
그 말에 노비들이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마침내 누군가 입을 열어 반구의 생김새와 평소 일솜씨, 그리고 폭발적이고 강한 근육에 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 아이는 자주 오지 않아요. 그에게는 아픈 누이동생이 있어서 집에 돌아가 동생을 돌봐야 하거든요. 정헌 아가씨는 그가 누이동생에게 줄 물고기를 사고 있을 때 처음 만났다고 했어요. 그의 생활이 곤궁한 걸 본 아가씨께서 그를 집으로 데리고 와 일하게 해 줬어요.”
“맞아요, 맞아. 아가씨는 평소 노비들에게 매우 잘해 주세요. 위세 부리지도 않으시고요. 반구에게도 매우 잘해 줘서 그는 아가씨를 따라 자주 산에 나물을 캐러 갔어요. 윽…….”
말을 하던 사람은 갑자기 등에 통증을 느끼고 순간 자신이 헛소리를 했다는 걸 깨달았다. 후부의 적녀 아가씨가 어찌 산에 나물을 캐러 갈 수 있단 말인가. 순간 겁에 질린 노비가 바다에 털썩 무릎을 꿇고 벌벌 떨었다.
그러나 류소경은 그런 것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그는 점점 자신의 추측이 맞았음을 확신했다. 그들이 말하는 반구는 바로 태자 구염황이었다. 류소경은 노비들의 말을 통해 태자와 류정헌이 자주 함께 있었다는 결론을 도출했다.
“그들이 평소 어떻게 함께 하는지 말해 보거라.”
노비들은 주인이 아가씨가 산에 나물 캐러 간 일을 질책하지 않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아는 바를 숨김없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나리, 눈이 있는 사람은 다 알 수 있습죠. 반구가 자기 분수도 모르고 아가씨께 얼마나 정성을 다하는지, 심지어 품삯을 받으면 아가씨께 물고기를 사 주었습니다요.”
“그뿐만이 아닙니다. 소인은 그가 몰래 아가씨의 뒤를 따라 저택을 나서는 걸 여러 번 보았습니다.”
“이번에도 반구가 자원해서 따라온 것입니다. 그 아이는 평소 아가씨 곁에서 자질구레한 일에 관여했지요. 아가씨도 그런 그를 그저 내버려 두고만 계시니 나리께서 나서서 그자를 막으셔야 합니다.”
류소경은 왜 막아야 하냐고 속으로 반문했다. 그건 류정헌이 몇 생애에 걸쳐 쌓은 복이었다. 비록 태자가 확실히 표현하지 않았지만, 여태껏 통방조차 없는 건 황제와 황후가 태자를 소홀히 관리하고 있다 말할 수 있었다.
물론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태자는 그의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마음을 중시하는 사람이었다. 태자는 자신이 사랑하는 여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 방면에서 태자는 평소 조정에서 보여 주는 위엄 있고 영명한 모습과 다르게 이제 막 사랑에 눈 뜬 청년과 같았다.
뒷짐을 지고 선 류소경은 조카가 맞이한 행운에 기분이 한껏 들떴다. 만일 태자의 일편단심을 얻는다면 류정헌은 몇 생애를 걸쳐 쌓은 복을 얻게 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아직 아무 사이가 아닌데도 태자는 벌써부터 이렇게 류정헌을 감싸 주었고, 그녀가 조금이라도 억울함을 당하지 않도록 애쓰고 있었다.
게다가 태자의 수법은 완곡했다. 그는 신분을 내세워 직접적으로 류씨 가문을 난처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류소경을 불러 류씨 가문 내부에서 문제를 해결하도록 했다.
이러니 누가 감히 태자가 류정헌의 체면을 염려하지 않은 거라 말할 수 있겠는가. 태자는 그녀를 난처하게 만들고 싶지 않은 것이다. 이런 마음 씀씀이를 보고도 태자의 마음을 알아채지 못한다면 그는 그동안 헛산 것이리라.
“물러가거라. 오늘 일은 다른 사람에게 말해서는 안 될 것이다.”
류소경은 분부를 마친 뒤 류정헌이 거주하고 있는 뜰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류소경이 채 방으로 들어서기 전, 안에서 날카로운 여인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순간 반감을 느낀 그는 속으로 경멸을 느끼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뭣들 하는 게야! 정신들이 나갔구나! 내가 언제 의원을 저택으로 불렀더냐! 너희가 감히 사사로이 의원을 부르다니! 후부가 그동안 너희 같은 배신자를 길렀다니 정말 눈이 멀었구나!”
류 부인은 바닥에 있는 노비들에게 삿대질하며 욕설을 퍼부었다.
류소양의 부인인 그녀조차도 아팠을 때 이런 대우를 받아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장자에서 자란 하찮은 딸이 무슨 근거로 이런 호사를 누린단 말인가. 분명 천한 계집애가 일의 경중도 모르고 염치없이 제 신분을 이용해 하인을 시킨 게 분명했다. 적녀의 허세를 부리려고!
바닥에 꿇어앉아 있는 계집종들은 억울해 죽을 것 같았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얼굴을 가린 채 흑흑 흐느낄 뿐 감히 울음을 터뜨리지 못했다. 그중에서 담력이 조금 큰 노비가 입을 열었다.
“노비들은 모르는 일입니다. 정말 모르는 일이에요. 의원들 스스로 온 겁니다. 부인, 노비들은 억울합니다. 부디 이 일을 자세히 조사해 주세요.”
류정헌은 이미 바닥에 꿇어앉아 용서해 달라고 빌고 있었다. 류 부인은 하인을 때리고 있었지만 사실상 류정헌을 때리는 것과 마찬가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