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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중생계 (437)화 (437/449)

외전 구염상 2-60

태의에게 감기 기운이 조금 있다는 진단을 받은 류정헌은 하인들의 시중을 받으며 옷을 말리고 약을 먹으러 갔다.

호숫가에는 여전히 경직된 자세로 꼼짝도 하지 않는 반구와 벌벌 떨고 있는 두 소녀가 남아 있었다. 류씨 가문의 손자는 화가 나 죽을 지경이었다.

“죽고 싶어? 동생들이 아니라고 하잖아! 고모도 그저 둘이 놀다가 실수로 고모를 친 거라고 했어. 고의로 민 게 아니었다고! 모든 건 사고였어! 의외의 사고! 알겠어? 이 고약한 놈! 너 대체 뭐 하는 자식이야? 내가 왜 너한테 이런 설명을 해야 하지? 여봐라! 감히 주인에게 대드는 이 녀석을 당장 내쳐라!”

그러나 구염황이 싸늘한 눈으로 다가오는 이들을 노려보자 순간 아무도 그에게 다가가지 못했다.

구염황의 냉랭한 목소리가 울렸다. 그는 류씨 가문의 손자를 똑바로 바라보며 정곡을 찔렀다.

“도둑이 제 발 저린다더니 그 말이 꼭 맞군. 내가 두 사람이 뭘 어떻게 했다고 했습니까?”

말을 마친 구염황은 자신에게 다가오려던 사람들과 탁 몸을 부딪치며 성큼성큼 자리를 떠났다.

류씨 가문의 손자는 순간 정신이 멍해졌다. 자신에게 도발한 하인이 거들먹거리며 눈앞에서 사라지다니!

번뜩 정신을 차린 그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

“여봐라! 저자를 저택에서 끌어내라! 관 공자는? 관 공자는 어디 계시냐!”

“관 공자께서는 이미 저택을 떠나셨습니다.”

“멍청한 놈들! 왜 막지 않은 게야! 내 일을 그르치다니 너희를 가만두지 않겠다!”

화가 난 채로 사람을 구한 장대를 발로 탕 걷어찬 그는 바닥에서 여전히 움직이지 않고 있는 두 누이동생을 보고 소리쳤다.

“뭘 계속 그러고들 있느냐! 상황을 더 어수선하게 만들 셈이냐? 꺼지거라! 모두 꺼져! 어디서 눈물을 보이느냐! 이건 그냥 사고였다. 아무도 너희에게 책임지라고 하지 않는단 말이다!”

두 소녀는 그 말에 무거운 짐을 벗은 듯 겁에 질려 얼른 달려 나갔다. 처소로 돌아온 그녀들은 문득 영문을 알 수 없어 서로를 멀뚱히 바라보았다.

‘우리가 무엇을 두려워하는 거지?’

고모는 집안에서 총애를 받는 몸도 아니었고, 기껏해야 상인의 집안으로 시집가야 할 팔자였다. 헌데 두 사람이 두려워할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이미 부인과 함께 일을 꾸미기로 했을 때부터 이런 건 별것도 아니었다.

‘대체 조금 전 그 공포감은 뭐였지?’

생각해 보니 두려움을 준 건 그 뚱보의 위압적인 눈빛이었다.

순간 두 소녀는 크게 노했다. 류 후부의 손녀 아가씨들이 일개 하인에게 위협을 받다니! 정말 커다란 수치였다.

“여봐라, 여봐라!”

“예, 아가씨.”

“그 뚱보를 찾아라. 찾으면 포박해서 내게 데려와!”

“예.”

전원前院을 나온 구염황은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류정헌이 잠시 머물고 있는 거처로 갔다. 이미 씻고 옷을 갈아입은 그녀는 창가 앞에서 생강탕을 마시고 있었다.

구염황은 약하게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조금 전 그녀가 물에 빠졌을 때 그는 놀라서 어쩔 줄 몰라 하며 온몸에 땀을 흘렸었다.

구염황은 숨을 내쉬며 창가 앞으로 걸어갔다. 홀로 멍하니 있는 류정헌을 보자 왠지 모르게 마음속 화가 가라앉는 것 같았다. 그는 싱긋 웃으며 창문을 두드려 그녀의 주의를 끌었다.

반구를 본 류정헌이 잠시 멈칫하다가 재빨리 주변을 살폈다.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그녀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왜 왔어요. 지금 그가 당신을 찾고 있으니 어서 장자로 돌아가요. 괜히 붙잡히지 말고요.”

류정헌의 걱정스런 표정에 구염황의 미소가 살짝 부드러워졌다.

“괜찮아요. 금방 가겠습니다.”

문득 그녀를 찾아온 목적을 떠올린 구염황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아가씨, 난 그 두 사람이 고의로 아가씨를 밀었다고 확신해요. 그냥 이렇게 그들을 놔둘 겁니까?”

류정헌은 그 말에 구염황을 노려봤지만 화를 내지는 않았다.

“용케 그런 말을 내뱉네요. 후부에서 당신을 가만두지 않을까 두렵지도 않나요?”

류정헌의 눈 속에 쓸쓸함이 스쳐 지나갔다.

“조카들이 고의로 날 밀었다 해도 어쩌겠어요. 아이들의 부친은 큰아버님께 신임을 받고 있는 걸요. 당신은 이해하지 못해요. 어쨌든 난 무사하니까 이 일은 이렇게 넘어가야죠.”

구염황은 류정헌이 무엇을 염려하고 있는지 깨달았다.

“만일 아가씨가 부친에게 사랑받는 딸이었다면 이번 일을 따져 물었겠지요?”

류정헌이 돌연 풋 웃음을 터뜨렸다. 눈부신 미소였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거예요? 내가 어떻게 아버지께 사랑받는 딸이 될 수 있겠어요.”

그녀가 장난스럽게 웃으며 이어 말했다.

“하지만 만일 그렇다면 난 조카들이 다시는 내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겁을 줬겠죠. 하하…….”

구염황은 아무렇지 않은 척 웃는 류정헌을 바라보며 그녀의 말 못 할 억울함을 깨달았다. 가문에서는 아무도 그녀의 기분을 신경 쓰지 않았고, 그녀는 있어도 없어도 그만인 존재였다.

“알겠습니다. 남은 일은 내게 맡겨요.”

그러나 류정헌은 참을 수 있을지 몰라도 구염황은 그럴 수 없었다. 그가 지키고자 하는 사람을 괴롭히는 자는 반드시 대가를 치러야 했다.

구염황의 말에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긴 류정헌이 생강탕을 마셨다.

“당신이 알긴 뭘 알아요. 어서 가요. 붙잡히지 말고요.”

“네.”

“잠깐만요. 아까 구해줘서 고마워요.”

류정헌의 미소에 구염황이 그녀를 따라 희미하게 싱긋 웃었다.

“천만에요. 식은 죽 먹기였는걸요. 며칠 있다가 장자로 찾아갈게요. 관사에게 이틀 정도 휴가를 내겠다고 대신 말 좀 전해줘요.”

“그래요.”

방안에는 다시 류정헌 혼자만이 남았다. 그녀는 머릿속으로 자신을 구해준 또 다른 은인을 떠올렸다. 냉철한 눈매와 탁월하고 범상치 않은 외모. 류정헌의 얼굴이 순간 확 붉어졌다.

류씨 가문의 저택을 나온 구염황은 약간 흐린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는 스스로를 조소하며 등에 검을 진 채 태자부로 발걸음을 옮겼다.

오늘처럼 후회가 되는 날은 없었다. 이제껏 갈고 닦은 재주는 류정헌의 감정과 잔잔한 변화를 포착했고, 그의 예민한 시선을 사로잡았다. 그녀는 아까 그 남자를 좋아하게 되었다. 그녀의 남편이 될 가능성이 높은 사람을 말이다.

구염황은 즉시 마음을 다잡고 몸을 날렸다. 그에게는 류정헌을 탓할 자격이 없었다. 그리고 그는 태자인 자신이 당연히 류정헌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지금 이런 모습으로 그녀를 좋아한다는 것 자체가 우스갯소리였다.

자신은 사랑하는 여인이 눈여겨볼 만한 외모를 갖고 있지도 않은데, 그런 자신이 무슨 자격으로 상대가 봐 주기를 바라겠는가. 그건 마치 똥통에 든 사탕과도 같았다. 왜 그 안의 달콤함을 발견하지 못하느냐고 남을 탓할 순 없는 것이다.

게다가 자신의 지위는 본래부터 문제가 있었다. 자신의 본래 신분이 똥보다 높다고 해서 득의양양해서는 안 되는 거니까.

‘뭐야, 무슨 비유가 이렇게 엉망이야? 내가 무슨 똥오줌인가?’

구염황은 자신의 생각에 자조하며 태자부로 들어가 얼른 옷을 갈아입었다. 이윽고 그는 무뚝뚝한 표정으로 황궁으로 달려갔다. 류정헌이 사고를 추궁하지 않고 그냥 넘어간다고 해서 자신까지 그래야 한다는 법은 없었다.

‘류 후부는 적자와 서자의 질서가 잡히지 않은 데다, 특히 류소양은 나이가 들어서도 여전히 소년 시절처럼 놀고 있으니 크게 중용되기 어려운 그릇이다!’

구염황은 일을 처리함에 있어 신속하고 맹렬한 자로, 이 점만큼은 아버지와 똑같았다.

구염황은 곧바로 류소경을 입궁시켰다. 그는 손가락질까지 해 가며 류소양의 ‘죄목’을 조목조목 늘어놓고 한바탕 호통을 쳤다.

“류씨 가문은 간덩이가 부은 게요? 이런 자를 감히 후부의 후계자로 올리다니! 바로 이런 소인배가 주국의 기강을 어지럽히는 거요!”

류소경은 깜짝 놀라 반사적으로 황망히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태자가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어 이러는지 전혀 종잡을 수가 없었다. 아우 류소양의 호색한 성격은 온 백성이 다 아는 사실이었지만, 동시에 그의 학식이 뛰어날 뿐더러 자손들 역시 하나같이 걸출한 인재라는 것 또한 온 백성이 다 아는 사실이었다.

‘이제껏 아무 말이 없으시다가 갑자기 왜 이러시지?’

구염황은 특히 류소양이 적녀를 학대한 일을 언급하며 류소경을 호되게 질책했다.

“이것 보시오! 이것 봐! 이게 정녕 부친의 모습이오? 집안 관리도 제대로 못 하는 자가 어찌 백성을 돌볼 수 있단 말이오! 자신의 적녀조차 돌보지 않는 자의 눈에 무엇이 가치 있게 보이겠소! 내 보기에 류소양은 분명 스스로 후부의 후계자가 되는 걸 바라지 않고 있소. 평생 그냥 미인이나 옆에 끼고 살라 하시오! 감히 폐하의 앞에 나아가 대주국 황제의 체면을 구기지 말고!”

놀란 류소경의 늙은 얼굴에서 순식간에 핏기가 가셨다.

‘지금 태자께서 아우 소양이 내 뒤를 이어 후부의 후계자가 되는 걸 막겠다는 뜻인가? 이를 어쩌면 좋단 말인가!’

류소경은 마음이 조급해졌다. 아우를 대변해 뭐라도 말하려 했지만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좀처럼 아우를 변호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류소양의 사생활은 확실히 태자의 말처럼 본받을 만한 점이 조금도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전혀 가문의 일에는 관여하지 않으셨는데 왜 갑자기?’

“태…태자 전…….”

구염황은 류소경이 아직 충분히 겁을 먹지도, 일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도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가 살짝 얼굴을 굳히며 말했다.

“내 보기에 류씨 가문의 아가씨는 참으로 성정이 좋소. 그런데 류소양은 어찌 적녀를 그리 대하는 것이오? 돌아가서 그에게 전하시오. 만일 다시 한 번 첩을 총애하고 적녀를 홀대하는 일이 발생하면 그때는 내가 반드시 그의 목숨을 거두겠다고!”

류소경은 대사면을 받은 사람처럼 허겁지겁 물러났다. 황궁 밖으로 나온 그는 다시 풍채 좋고 교양 있는 중년 남자의 모습을 되찾지만, 머릿속으로는 빠르게 태자의 말을 떠올리며 수많은 가능성을 헤아리고 있었다.

‘태자께서 왜 갑자기 소양을 난처하게 하시는 걸까?’

류소경은 생각할수록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는 놀란 한편 두려웠다. 정말 아우가 첩을 총애하고 적녀를 홀대하기 때문일까?

‘하지만 아우는 평생을 그렇게 살아왔고, 과거 아우의 이름을 후계자로 올렸을 때에도 아무 말이 없으셨는데 왜… 잠깐!’

류소경은 문득 깜짝 놀랐다.

‘태자께서는 첩을 총애하고 ‘적녀’를 홀대하는 것을 질책하셨어……. 첩을 총애하고 ‘본처’를 홀대하는 것이 아니라!’

류소경은 무언가 실마리를 잡은 사람처럼 번뜩 깨달았다. 답은 바로 ’적녀‘였다!

‘류씨 가문 아가씨가 참으로 성정이 좋은 것 같다……?’

태자는 언제, 무엇을 보았단 말인가. 설마 그가 정헌을 보았다고 말한 걸까? 게다가 정헌에게 좋은 인상을 갖고 있다고?

‘그 말은 태자께서 정헌을 마음에 두고 있다는 뜻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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