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구염상 2-58
“죄송합니다, 아가씨. 우리 가마꾼이 소란을 떨어 아가씨를 놀라게 해 드렸습니다. 소녀가 대신 이곳에서 아가씨께 사죄를 드리니 용서해 주시길 바랍니다.”
면사를 쓴 여인은 가마 안에 있는 주인에게 사죄하려 했다. 어쨌든 그녀의 가마꾼이 잘못한 일이었으니까.
류정헌이 그 말에 얼른 휘장을 걷었지만, 또다시 누군가에 의해 휘장은 닫히고 말았다.
순간 화가 난 류정헌이 입술을 뾰로통 내밀었다. 그녀도 반구가 자신을 위해 그런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말하는 상대 여인의 목소리가 너무 듣기 좋아서 한 번 보고 싶었다.
“괜찮아요. 직접 와 주셨는데 제가 얼굴을 드러내기가 여의치 않으니…….”
권염아가 생긋 웃었다. 그녀의 시선이 가마를 막는 뚱뚱한 손에서 잠시 멈추었다. 순간 그녀의 눈이 반짝였다. 그러나 권염아는 즉시 평소처럼 침착하게 예의를 갖추며 절을 올렸다.
“괜찮습니다, 아가씨. 우리 측에서 무례를 저질렀는걸요. 아가씨께서 무사하시니 소녀는 안심입니다. 만일 또 만날 기회가 생기면 이 동생이 언니께 차를 대접하겠습니다.”
상대의 말에 영향을 받은 듯 류정헌 역시 자신도 모르게 진심을 담아 답했다.
“좋아요.”
그러나 류정헌은 감히 저택을 마음대로 나갈 수 없는 처지였기에 상대를 곤란하게 만들까 걱정됐다. 게다가 그녀는 류씨 가문 저택에 사는 것도 아니고 또 두 사람은 우연히 만난 사이일 뿐인데 어떻게 언니 동생 사이가 될 수 있겠는가.
류정헌은 한숨을 내쉬며 현실과 맞지 않는 생각을 억눌렀다.
“어서 가던 길을 가세요. 그러시다 늦으시겠어요.”
이 시간에 이 길을 통해 외출을 하는 건 의심할 여지 없이 불전에 향을 올리기 위해 성밖으로 나가는 것일 터였다.
권염아는 고맙다는 말을 한 뒤 몸을 돌려 한쪽에 있는 구염황을 향해 살짝 절을 했다. 그녀는 계집종의 시중을 받으며 자리를 떠났다.
권염아의 행동을 주의 깊게 본 사람은 없었다. 설령 있다 해도 그들의 아가씨에게 재차 예를 차리기 위해 하는 행동으로만 여길 뿐, 속으로 그녀가 분명 보잘것없는 가난한 집안 출신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으면 뭐가 무서워서 저렇게 예를 차리겠는가.
하지만 여인을 정면에서 본 구염황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상대가 범상치 않다고 생각했다. 여인이 온몸에서 발산하던 기세는 보기만 해도 감탄이 나왔다.
가마가 다시 출발했다. 가마 옆에 선 구염황의 얼굴에 당혹스러운 빛이 스쳤다.
‘날 알아본 건가?’
미간을 찌푸린 구염황이 뒤에서 길을 떠나고 있는 가마를 힐끔 쳐다봤다. 가마의 몸에 작게 쓰여 있는 ‘권權’ 자를 본 구염황은 번뜩 깨달았다.
‘그러니 이렇게 변장을 했는데도 알아본 거군.’
역시 권씨 가문 사람의 눈썰미는 언제나 뛰어났다.
구염황은 그와 동시에 상대방의 신분도 생각했다. 권 상서에게는 염아라는 고명딸이 있었다. 그 아이가 이렇게 벌써 컸을 줄이야.
‘올해 열둘인가? 열하나?’
생각이 귀찮아진 구염황은 더 이상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대신 잠시 후 포의방을 지날 때 면사를 사서 류정헌에게 씌워 주자고 생각했다. 덕분에 구염황은 그의 뒤에서 멀어지고 있는 소녀가 쓸쓸하게 가마 뒤편의 휘장을 내리는 걸 알아채지 못했다.
‘그는 조금 전 가마 안에 있던 언니를 보호하기 위해 애썼어. 그 언니는 그가 정한 왕비인 걸까?’
가마 안에 있던 여인은 자신보다 나이가 많아 보였고, 자신과 달리 예뻐 보였다. 아무리 자라려 노력해도 권염아는 이제 겨우 열두 살이었다. 무슨 짓을 해도 그의 왕비가 되는 길은 영영 따라잡을 수 없었다.
사랑하지 않으면 입궁하지 마라.
이건 권씨 가문이 새로 세운 규칙이었다. 권염아의 고모와 고모할머니가 맞이한 말로 때문이다. 권씨 가문은 더 이상 가문의 여식이 냉궁에 갇히는 걸 감당할 수 없었다.
쓸쓸하게 고개를 떨군 권염아가 초점 없는 눈으로 손목에 있는 옥구슬을 만지작거렸다. 조금 전 그는 가마 안에 있던 사람을 염려하며 곁을 지켰다.
‘나에게는 기회가 없는 게 아닐까.’
권염아는 아이처럼 눈가를 닦으며 울지 말자고 되뇌었다. 과거 그는 단지 매원梅園을 지나다가 키 작은 자신을 보고는 선심을 써서 위로 들어 올려 주고, 매화향을 맡게 해 준 것일 뿐이었다.
또한 그는 귀족 여식들이 제왕을 위해 기예를 펼치는 연회에서 그저 다른 사람에게 하듯 무의식적으로 그녀에게 용모가 빼어나고 총명하다고 칭찬한 것일 뿐이었다. 그의 눈 속에 자신은 절세미인이 아니었고, 그저 이야기를 나누다 한 번쯤 거론되는 여인일 뿐이었다.
그러니 이건 그저 자신 혼자 쓸데없는 마음을 품고 부주의하게 그를 향한 마음의 싹을 틔운 것이었다. 이건 수많은 소녀가 마음속에 품고 있는 감정일 뿐, 태자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었다.
그에게 보호해야 할 여인이 생겼으니 권염아는 마땅히 기뻐해야 했다. 그는 여인의 진심 어린 사랑을 받을 가치가 있는 사람이었다.
* * *
“오라버니는 뭘 하러 갔는데 아직도 안 돌아오는 거지?”
구염상은 최근 아버지가 오라버니에게 어떤 임무를 내렸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네, 공주 전하. 태자 전하께서는 개인적인 일을 보고 계십니다.”
구염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공주부에 가볼 작정이었다. 더 고칠 곳이 있는지 살펴보고, 별다른 게 없다면 곧바로 저택은 다음 달 자신의 것이 될 것이다. 혼례 역시 그곳에서 거행될 터였다.
구염상은 자신과 혼례를 올리는 봉익이 운이 없다고 생각했다. 공주가 시집을 오는 좋은 시기를 만나지 못하고, 하필이면 공주에게 장가를 들어야 하는 나쁜 시기를 만나다니.
구염상은 봉익이 지금쯤 답답해 죽으려 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녀가 알고 있는 봉익은 잘난 체하고 유세 부리기를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감히 자신의 소매 속에 물건을 집어넣는 일을 거리낌없이 자행한 그였으니, 아마 공주에게 장가를 들어야 하는 그는 정말 난감해 하고 있을 것이다.
그 시각, 봉익은 정말 난감했다. 관아로 가는 길이 고원과 도도에 의해 막혀 버렸기 때문이다. 도도는 아직 잠에서 덜 깬 상태였지만 잠에서 깬 고원은 봉익을 붙잡고 크게 엉엉 울며 그에게 나가 죽던지 태감이 되어 달라고 빌었다.
봉익은 자신의 팔을 죽어라 잡고 있는 손가락을 떼어 냈다.
“저리 좀 가십시오. 전 바쁩니다.”
고원은 놓아주기는커녕 더욱 성심성의껏 봉익에게 빌기 시작했다. 순간 봉익의 등 뒤로 뛰어오른 거대한 몸집이 필사적으로 그에게 달라붙었다.
“어서 가서 거세해. 응? 거세하라고! 몸이 홀가분해질 거야! 익아, 너 생각 잘해. 공주에게 장가가는 게 뭐가 좋니? 응? 그런 고통은 내가 감수할 테니 내게 양보해!”
“비키라고요!”
고원은 봉익의 냉담한 시선은 조금도 안중에 두지 않고 다시 봉익의 등에 달라붙었다.
“불가에서 말하길 즐거움은 함께 나누라 했어. 그럼 차라리 나도 데려가! 내가 네 시중을 잘 들게! 네게 차를 끓여 주고 물을 따르고 네 등을 긁어 줄게! 정말 고분고분하게 복종할 테니까 날 네 배방陪房(여인이 시집갈 때 데려가는 몸종)으로 삼아 줘. 우리가 함께 공주 전하의 마음을 빼앗는 거야!”
봉익이 날린 주먹이 고원의 입가를 비껴 지나갔다. 필사적으로 자신을 잡고 놓아주지 않는 고원을 질질 끌면서, 봉익은 굳건하게 관아를 향해 걸어갔다.
고원은 여전히 단념하지 않았다. 그는 눈물을 흘리며 자신의 결심을 밝혔다. 절대 총애는 다투지 않겠다, 홀수일은 너고 짝수일은 나다, 삼 대 칠로 하자 등등.
듣고 있던 도도는 새로운 일을 경험하는 사람처럼 탄복해 마지않았다. 일개 군관이 하룻밤 새에 그런 심오한 이치를 깨닫게 될 줄이야. 도도가 참지 못하고 말했다.
“봉 형, 만일 정말 자리가 있으면 저에게도 한 자리만 남겨 주세요. 형님이 더 많이 주무셔도 돼요. 전 이 대 팔도 충분히 가능해요.”
그 말에 고원이 반역자를 죽일 듯이 쳐다봤다.
‘그건 내가 생각해 낸 거야! 따라하지 마! 도도 너 이 자식!’
* * *
대문을 연 류씨 가문은 주국에서 제일가는 부자의 손자 관사소를 맞이했다. 모든 이의 예상과 달리 관사소는 그의 조부나 부친과 다르게 뚱뚱하지 않았고, 사람들은 그 점에 흥미를 느꼈다.
저택에 들른 김에 질녀侄女의 사윗감을 보게 된 류소경조차 괜찮은 사윗감을 골랐다고 생각했다. 그는 관사소가 품위 있고 크게 쓰일 재목이라고, 마침내 류정헌을 위해 둘째가 제대로 일을 처리했다고 말했다.
류소양은 방금 형님께서 떠나기 전 관사소와 인사를 주고받았다는 하인의 이야기를 듣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 형님은 그가 잘 알았다. 형님은 눈이 높고 콧대가 셌으며 평소 권서함과 가까이 어울리며 점점 괴상하게 변해 누구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그런 형님께서 뜻밖에도 관씨 가문의 손자와 이야기를 나누다니.
‘그 말은 관사소가 형님의 눈에 들었다는 말이 아닌가?’
본래는 그냥 은자를 받은 일도 있고 하여 관씨 가문의 손자에게도 한 번 기회를 주자 생각했던 거였다. 이쯤 되자 류소양은 관사소가 어떤 사람인지 눈여겨보기로 했다.
관사소는 어떤 실망도 안겨 주지 않았다. 비록 귀족이 길러 낸 귀공자와는 달랐지만, 교양이나 학식 면에서 각 방면의 인재와 비교해도 뒤지지 않아 사람을 감탄하게 했다.
류소양은 만족스러워 어쩔 줄을 몰랐다. 관사소는 과연 비범했다. 게다가 그는 관씨 가문 재산의 절반의 떠맡고 있어 세간에서의 지위도 범상치 않았다. 관리가 아니라는 점 외에는 어떻게 봐도 만족스러운 사윗감이 아닐 수 없었다.
게다가 류소양에게 적녀가 모자란 것도 아니었다. 기억도 안 나는 딸 한 명을 시집보내면 천하의 재물 절반을 얻을 수 있는데, 이런 든든한 사위까지 덤으로 딸려오는데 어찌 즐겁지 않겠는가.
관사소는 자신을 바라보는 류소양의 눈빛이 마음에 들지 않아 줄곧 미간을 찌푸리고 데면데면하게 반응했다. 그러나 상대는 그럴수록 더욱 만족스러운 눈빛을 보냈고, 관사소는 류씨 가문 사람에 어떤 문제가 있는 건 아닌지 의심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비록 류씨 가문의 노여움을 살까 염려한 조부와 부친이 열심히 그의 주의를 끌며 대응하고 있었지만, 관사소는 귀찮아서 상대하고 싶지 않았다.
관사소는 자신의 비협조적인 행동에 대한 류씨 가문의 반응은 염려하지 않았다. 다만 그는 최근 공주의 노여움을 산 일을 걱정하고 있었다.
어쩌면 류씨 가문이 소란을 일으킬 때 누군가 암암리에 그 기회를 틈타 관씨 가문을 괴롭히는 데 힘을 보탤지도 모른다. 공주는 그날의 실수를 개의치 않았지만, 누군가는 그 일을 쉽게 넘기려 하지 않았다. 자신을 몰래 암살하려 했던 그 시위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