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구염상 2-57
관씨 가문 저택 안, 침대에 기댄 관사소는 침울한 표정으로 방 안에 있는 두 사람을 바라보며 차갑고 딱딱하게 말을 뱉었다.
“안 가요!”
“왜 소리를 지르느냐! 아직 상처가 다 낫지도 않은 아이에게 부드럽게 이야기하면 어디 덧나느냐!”
화가 난 관몽득이 아들 노십을 향해 고함을 쳤다. 노십은 어이가 없었다.
“아버지! 이번 일은 장난이 아닙니다. 류 후부 같은 승승장구하는 집안이 우리 집안에 기회를 주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인지 아십니까? 사소가 지금 몸을 움직일 수 없는 상태라도 무조건 가야 합니다!”
노십이 물러서지 않자 관몽득이 한숨을 쉬었다. 그 역시 이번 일에 얽힌 관계가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됐다. 어서 물건이나 챙기거라. 그래, 가자. 꼭 가야 한다. 사소의 운이 나쁜 것을 탓하고만 있을 수는 없지. 그런데 하필 날을 잡아도 이런 날을 잡았는지, 원… 여봐라, 어서 도련님을 업어 마차에 태우거라!”
노십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한숨을 내쉬었다. 어렵게 얻은 기회인데 하필 이런 상황이라니.
‘우리 관씨 집안이 아무래도 운이 좋지 않은 모양이구나. 됐다, 됐어.’
제 것이 아닌 것은 억지로 구하려 해 봐야 소용이 없는 법이다.
한편, 관사소는 이 상황이 그저 웃기기만 했다. 욕심내지 말아야 할 것을 욕심내고 있으니 사서 고생하는 게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할아버지나 아버지 모두 마찬가지였다.
관사소는 이렇게 생각하면서도 참지 못하고 먼 곳을 바라봤다. 어젯밤 거만했던 그녀의 눈동자가 떠올랐다. 그 눈은 그들의 모든 자부심을 짓밟기 충분했다.
“마차를 끌어라!”
* * *
같은 시각, 류정헌 역시 후부에서 보내온 가마를 타고 장자를 떠나고 있었다. 류정헌은 처음으로 안절부절못했다. 저택으로 돌아가는 게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지만 신분에 맞는 화려한 가마를 타는 건 처음이었다.
마차 안에서 류정헌은 기뻐하기는커녕 오히려 불안했다. 만일 후부에서 남편감을 확정한 것이라면 자신이 갈 필요가 있을까? 간다고 뭐가 변할까?
‘내게 이 혼사를 원하냐고 물어보고 의견을 들어 줄 사람이 과연 있을까?’
그건 절대 불가능했다.
‘하지만 만일 혼사 때문이 아니라면?’
그럼 그녀가 저택에 돌아가는 건 아무런 의미가 없을 터였다. 과연 누가 그녀가 저택에 돌아오기를 바란다는 말인가.
‘대체 무슨 이유로 나를 부른 걸까?’
류정헌은 몹시 불안했다. 그리고 그녀는 일부러 일을 복잡하게 생각하고 있는 게 아니었다. 그녀는 직감적으로 분명 단순한 이유로 집에 가고 있는 게 아니라는 걸 확신했다.
여러 가지 생각에 결국 참지 못한 류정헌이 휘장을 걷고 밖을 힐끔 바라보았다. 반구와 장호원張護院을 보자 마음이 가라앉는 것 같았다. 누가 어떤 목적으로 부른 것이든 절대 속아 넘어가서도, 조그만 실수라도 저질러서는 안 된다.
휘장을 내려놓은 류정헌이 결연한 눈빛으로 숨을 들이마셨다. 그녀는 혼사를 마음대로 좌지우지할 수 없었지만, 최소한 누군가 목표를 이루기 위해 자신의 혼사를 이용하지 않기만을 바랐다.
류정헌을 저택으로 불러들인 건 류소양이 아닌 류 부인이었다. 옛말에 일의 성공 여부는 사람의 노력에 달려 있다고 했다. 류소양은 관씨 가문의 손자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지만 상관없었다. 류정헌이 관씨 가문의 손자를 마음에 들어 하기만 한다면, 거기에다 남사스러운 짓까지 저지른다면 그녀는 반드시 관씨 가문에 시집가게 되리라.
젊고 아름다운 류 부인은 이 생각에 즐거워 몸 둘 바를 몰랐다. 곧 손에 넣게 될 논밭과 황금을 떠올리자 기쁘기 그지없었다.
아무도 원하지 않는 적녀일 뿐이었다. 그런 계집을 보내고 은자로 바꿀 수 있다는데 어찌 이 기회를 틈타 한 몫 챙기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한 번의 수고로 영원히 편안한 생활을 누릴 수 있는 길, 이건 그들 가문이 직접 부귀영화를 구하는 것보다 훨씬 빠른 길이었다.
화려하게 꽃단장을 한 류 부인은 자신이 생각해 낸 묘책에 온몸이 다 상쾌해지는 것 같았다. 특히 관씨 가문에서 보내온 사례금을 받은 후에는 근심과 걱정이 사라질 정도로 더욱 마음이 편안했고, 앞으로 관 씨 집안에서 보내올 은자를 떠올리자 수지에 맞는 장사라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무도 원하지 않는 딸을 미래의 부귀영화로 바꿀 수 있다니!
류 부인은 생각할수록 신이 나서 귀밑머리를 살랑이며 재촉했다.
“아가씨는 돌아오셨느냐? 너희는 모두 문밖으로 나가 대기하고 있거라! 저택으로 돌아온 아가씨를 푸대접한다면 내 너희의 다리 몽둥이를 부러뜨릴 것이다!”
“예, 예…! 지금 당장 나가서 대기하고 있겠습니다!”
* * *
연경은 평소와 마찬가지로 시끌벅적했다. 사람들이 오고 가는 거리는 비록 붐비지 않았지만 활력이 가득한 모습이었다. 물건을 파는 듣기 좋은 소리와 사람들의 속닥거림은 편안하고 즐거운 태평성세를 떠오르게 했다.
류씨 가문의 장자에서 올라온 가마는 오늘 처음으로 콧대가 높아졌다. 법도에 따라 류씨 가문의 적녀는 관도官道(나라에서 닦은 길)를 지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방이 떠들썩한 가운데 홀로 위세를 떨치며 넓은 길을 지나는 순간 장자에서 올라온 하인들은 한껏 의기양양해졌다. 그도 그럴 것이 아가씨를 모시고 처음으로 지나는 관도였다.
게다가 사람들은 가마 안의 여인을 친절하게 대해 주었다. 집사와 하인들은 더욱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으스댔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황제가 있는 연경에는 대신들이 많았기에 백성들은 어느 가문의 가마냐고 간간이 이야기를 나눌 뿐, 가던 길을 멈추고 쳐다보는 사람은 없어 집사의 허영심은 이내 줄어들었다.
하지만 그래도 집사는 여전히 신기했다. 관도는 신분의 상징이었으므로 어떤 이는 평생 이 길의 벽돌 한 장 밟아볼 수 없었다.
아쉽게도 계속 관도로 갈 수는 없었다. 성문에서 후부까지 계속 관도를 이용하는 건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렸다. 성의 중앙부에서부터는 곧바로 번화가를 통과해 지나가는 것이 훨씬 시간이 절약됐다.
류씨 가문의 가마가 관도에서 내려왔다. 일행은 번잡해지기 시작한 오전의 번화가를 걷기 시작했다. 속도가 느려진 듯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같은 속도로 걷고 있었다. 이들은 마주 보고 오는 가마를 만났을 때 거리에 사람이 많으면 길을 양보해 주었고, 거리에 사람이 적으면 양보하지 않고 나란히 지나갔다.
이번에도 평소와 같았다. 길에는 사람이 별로 없었기에 두 가마는 동시에 길을 통과하고 있었다. 두 가마가 스쳐 지나가고 있을 때, 갑자기 옆 좌판에서 뜨거운 다엽단茶葉蛋(간장, 찻잎 등과 함께 삶은 달걀)을 파는 좌판이 뒤엎어졌다. 돌연 욕설이 터져 나왔다.
“어이, 영감! 장사 그만하고 싶어?”
동시에 두 가마가 쿵 부딪쳤다. 뜨거운 물을 피하던 가마꾼이 너무 빨리 몸을 돌리는 바람에 좌측에 있던 류씨 가문의 가마꾼과 부딪친 것이다. 비틀거리던 류씨 가문의 가마꾼은 다른 쪽에 있던 만두 가게와 부딪히고 말았다. 만두를 놓은 좌판이 와르르 무너졌다.
만두 가게의 주인이 좌판과 부딪친 하인을 붙잡았다.
“이런, 은자를 물어내! 아직 팔지도 못한 만두란 말이야!”
주인은 바닥에 뒹구는 새하얀 만두들을 보면서 마음이 아파 어쩔 줄을 몰랐다. 가마꾼이 있는 게 뭐 대수인가. 연경에 살면서 아는 지인 몇 명 없는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그러나 하필 만두 가게 주인이 끌어낸 사람은 평소 난폭하기로 소문난 장원莊院의 대관사大管事였다. 그는 순간 상대의 팔을 꺾고 찰싹 따귀를 날렸다.
“은자는 무슨! 날 친 사람에게도 아직 은자를 받지 못했는데, 널 줄 것 같아?”
동시에 류정헌이 가마의 휘장을 살짝 열었다.
“상백常伯, 그러지 말아요. 우리가 부딪친 거니 우리 잘못이에요.”
류정헌은 휘장을 놓고 가마에서 내리려 했다. 평소 장자에서 공개적으로 얼굴을 드러내는 일에 익숙했으므로 그녀는 자신의 행동에 무슨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녀는 먼저 저택으로 돌아간 뒤 은자를 보내주면 어떻겠냐고 가게 주인에게 물어보려 했다.
그러나 그녀가 가마의 휘장을 들어 올리려 할 때, 누군가 그 앞을 가로막았다. 반구가 매우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
“앉아 있어요. 아가씨는 앉아만 있으면 돼요.”
말을 마친 구염황은 거절을 용납하지 않고 가마의 휘장을 내렸다. 매우 엄숙한 표정이었다. 류정헌은 얼굴에 면사를 쓰고 있지 않았고, 채소를 사러 나온 것도 아니었다. 그녀는 조금도 걱정할 게 없었다. 그녀는 지금 류 후부의 둘째 어르신 댁 적녀 신분이었다. 그녀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은 여러 가지로 혹독할 것이기에 실수해서는 안 되었다.
잠시 멈칫하다가 자리로 돌아가 앉은 류정헌은 현재 처지를 잊고 있던 자신을 비웃었다. 이 가마 안에 있는 그녀는 실수해서는 안 된다. 만일 누군가 그녀를 알아보기라도 한다면 그녀는 앞으로 외출을 하지 못하게 될지도 몰랐다.
류정헌이 생각에 잠겨 있을 때였다. 갑자기 밖에서 여인의 부드럽고 엄숙한, 무시할 수 없는 목소리가 울렸다.
“만두는 우리가 배상할게요. 여기 은자 다섯 냥이면 충분할 거예요. 우리 마부가 실수로 이쪽 집사를 밀어서 생긴 일이니 우리 잘못이랍니다. 부디 용서해 주세요.”
“아닙니다. 별 말씀을요. 모두 오해입니다. 오해예요.”
여자는 얼굴을 맞은 가게 주인을 바라보았다. 속으로 상대가 앙갚음하려 하지 않으니 굳이 상관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여자는 몸을 돌려 집사를 향해 살짝 절을 올렸다.
“소녀가 사죄를 드리겠습니다. 어르신께서 부디 넓으신 아량으로 용서해 주세요. 이건 찻값입니다. 가시는 길에 차를 드시라고 우리 아가씨께서 드리는 겁니다.”
말을 하며 여자는 불룩하고 무거워 보이는 쌈지 주머니를 내밀었다.
집사는 내키지 않았다. 본래 상대편 마부에게 큰소리를 치려 했던 그는 급히 다가온 두 소녀를 보자 그럴 수 없었다. 특히 말을 건넨 계집종 같은 소녀는 비록 나이는 어리나 대갓집 출신으로 보였고 생김새 또한 류 부인의 시녀보다 훨씬 예뻤다.
소녀의 뒤를 따라온 아가씨는 면사를 쓰고 있어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그 분위기만큼은 대갓집 느낌을 주는 계집종보다 더욱더 차분하고 침착했다.
집사는 현재 류씨 가문 둘째 어르신을 대표하고 있었지만 상대가 성의를 보이고 또 만만하게 볼 가문이 아닌 듯하자 괜히 일을 크게 만들어 좋을 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즉시 웃는 낯으로 바꾼 집사가 거만하게 은자를 받아들었다.
집사가 계집종 뒤에 면사를 쓴 여인에게 뭐라 말을 하려 할 때였다. 갑자기 면사를 쓴 여인이 가마 방향을 바라보며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집사가 즉시 답했다.
“가마 안에 저희 아가씨가 계시는데 얼굴을 내보이기 곤란하십니다.”
면사를 쓴 여인은 시선을 거두고 집사를 향해 싱긋 웃어 보였다. 그리고는 발걸음을 옮겨 가마 앞으로 다가가 반구의 바로 앞에서 멈추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