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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중생계 (433)화 (433/449)
  • 외전 구염상 2-56

    병기로 제압당한 관사소는 아래에서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재빨리 상처를 수습했다. 만일 공주의 명이라면 그는 아마 이곳에서 싸우다가 죽게 될 터였다.

    멀지 않은 곳에서 촛불이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불이 환하게 비치는 가운데 화려한 옷에 붉은 비녀를 꽂은 여인이 긴 머리를 무릎까지 늘어뜨린 채 나타났다. 주홍색 나뭇가지가 그려진 옷 위에 가지런히 늘어진 머리카락은 여인의 발걸음에 따라 눈부시게 아름다운 빛을 냈다.

    여인이 가까워지며 고운 얼굴이 사람들 앞에 나타났다. 옥처럼 희고 고운 얼굴은 뜻밖에도 위엄이 넘쳤다.

    별안간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가 관사소의 귓가에 울렸다.

    “공주 전하를 뵈옵니다. 천세 천세 천천세!”

    구염상은 병기로 제압당한 남자를 바라보았다. 누군가 밝게 빛나는 횃불을 들어 관사소 앞에 들이밀었다. 공주가 그의 얼굴을 자세히 보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구염상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가 다시 평소와 같은 표정으로 돌아갔다. 그녀는 분명 말했었다. 뜻밖의 사고로 여기겠다고. 그런데 그가 지금 왜 여기에 나타난 걸까?

    관사소는 그녀가 자신을 원숭이 보듯 해도 상관없었다. 미처 그녀를 다시 만나게 될 거라 예상하지 못했던 관사소는 그녀가 앞에 있다는 설렘에 앞서 속으로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조금 전 그녀의 눈빛을 통해 관사소는 자신을 해치려 한 사람이 그녀가 아니라는 것을 확신했다.

    하지만 관사소는 은근히 서운했다. 구염상은 정말로 그가 누구인지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심지어 그를 제거하기 위해 손을 쓰는 것조차 귀찮아한다는 걸, 그녀는 몸소 행동을 통해 보여 주고 있었다. 공주에게 관사소는 단지 길가에 밟히는 풀처럼 하찮은 존재여서 시선조차 오래 두지 않는다는 걸.

    관사소는 마음속에서 느껴지는 이상한 감정을 억눌렀다. 목소리에서 절로 피로가 느껴졌고, 몸을 움직이자 강렬한 통증이 전해졌다. 관사소는 대충 그녀에게 절을 올리는 자세를 취하며 말했다.

    “공주 전하께 제대로 절을 올리지 못하는 소인을 용서해 주십시오. 일부러 그런 것이 아니었다는 점을 봐서라도 소인을 살려 주십시오. 공주 전하께서 청을 들어주지 않으신대도 소인은 할 말이 없습니다.”

    말을 마친 관사소는 조금도 걱정하지 않았다. 그에게는 공주가 자신을 어떻게 하지는 않을 거라는 근거 없는 믿음이 있었다. 그녀의 눈 속에 전혀 그가 없었기 때문이다. 뭇 여인들에게는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사건이 그녀에게는 작은 물결조차 일지 않는 하찮은 일인 듯했다.

    구염상의 오만함과 놀라운 반응에 관사소는 부족한 자신의 매력을 한탄해야 할지, 아니면 그냥 운이 나빴던 거라고 생각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구염상은 관사소의 행색과 땅 위의 핏자국을 보며 무슨 일이 발생한 건지 눈치챘다. 비록 시위는 그녀의 명령에 따라 행동하는 존재였지만 그렇다고 시위에게 아예 자유 의지가 없는 건 아니었다.

    구염상이 휘휘 손을 저었다.

    “놓아줘라.”

    “네, 공주 전하.”

    관사소를 제압하고 있던 병기들이 순식간에 흩어졌다. 섬뜩한 빛을 발하던 검광이 사라지자 긴박하던 분위기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관사소는 자조 섞인 웃음을 지었다. 왠지 모르게 엷은 허탈감이 느껴졌다. 그는 자신이 늘 선택하는 존재라고 믿었다. 하지만 지금 그는 보호해 달라고 청하러 사람, 그녀는 높은 자리에서 그를 살려 줄지를 선택하는 사람이었다.

    구염상은 주변에 오라버니 쪽 암위暗衛가 한 명도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소시.”

    구염상의 말이 떨어지자 조용한 달빛 아래 그림자 하나가 어둠 속에서 무릎을 꿇었다.

    “다시는 그러지 말거라.”

    그림자는 잠시 꿈틀거리는 듯했지만 이내 뼈에 녹아든 무조건적인 복종에 의해 머리를 숙였다.

    “예.”

    구염상은 사람들에게 포위된 남자를 다시 바라본 뒤, 기어이 그에게 태자부를 밟게 한 시위대를 차가운 눈으로 훑어보았다. 시위들은 창백한 얼굴로 고개를 숙이며 오늘 밤 호위의 책임을 다하지 못한 것을 부끄럽게 여겼다.

    “들었느냐? 다시는 네게 손대지 않을 것이다. 만일 또 한 번 이곳에 나타나면 그때는 이유를 막론하고 너를 살려 보내지 않을 것이다. 여봐라! 공자를 배웅하라!”

    그때 일은 그녀의 속에서 일어나지 않았던 것과 마찬가지였다. 구염상은 구태여 상대를 물고 늘어질 생각이 없었다.

    관사소는 반항하지 않고 오늘 밤 일어났을지도 모를 무수한 가능성을 생각했다. 이런 결말은 가장 이상적이면서 동시에 가장 일어나지 말았어야 할 일 같았다. 공주는 그의 존재를 조금도 용납하지 않는 것으로 황실의 기개를 보여 주었다.

    관사소가 떠난 후, 태자부의 대문이 닫히자 구염상은 이내 차가운 눈으로 장내를 훑으며 위엄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난 조금 전의 일을 태자 전하께서 알기를 바라지 않는다. 알아서들 조심하거라!”

    일제히 무릎을 꿇고 절하는 소리가 울렸다.

    “예!”

    소시를 데리고 돌아온 구염상은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차갑게 그를 쳐다보았다. 한쪽 다리로 무릎을 꿇고 있던 소시는 양다리로 무릎을 꿇었다. 결국 구염상은 그를 계속 노려보다가 잠이 들었다.

    소시는 조금도 의외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공주는 이제껏 한 번도 화를 낸 적이 없었다. 기분이 나빠도 잠시뿐이어서, 시간을 주면 그녀는 이내 화를 풀곤 했다. 마치 조금 전 불쾌했던 일은 너무나 하찮은 일이었다는 듯이.

    그러나 소시는 자신이 제대로 소임을 다하지 못한 일까지 공주가 의외의 사고로 여길 줄은 상상도 하지 못 했다.

    소시는 고개를 숙인 채 이를 꽉 깨물었다. 자신이 무능하지 않았다면, 만일 폐하의 손에 죽을 것을 염려하지 않았다면 공주께서는 오히려 망설임 없이 복수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만일 소시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구염상이 알았더라면 그녀는 분명 그가 쓸데없는 걱정을 한다고 했을 터였다. 그가 짊어져야 할 책임은 없었다.

    소시는 자책하며 자신의 무능함을 증오했다. 그래서 그는 더욱더 노력했다. 그는 이런 실수가 다시 일어나는 걸 용납할 수 없었다. 사람들은 일등공이 무정하다고 했지만 일등공도 감정이 있는 사람이었다. 다만 감정을 밖으로 드러내 보일 수 없는 것뿐.

    과거 공주는 소시의 마음을 감사히 받아들여 준 사람이었다. 그는 그로 인해 불면증에 시달리면서 제 주제도 모르는 스스로를 비웃었다.

    소시는 감히 공주를 원할 수 없었고, 앞으로도 그러지 않을 터였다. 황제와 태자가 그에게 관심을 갖는 건 그의 복이었다. 그 외의 것은 어떤 것도 생각할 권리가 없었다.

    희미한 촛불이 비추는 가운데 소시는 무거운 마음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조심스럽게 공주를 침대에 눕히고, 이불을 덮어 준 뒤 재빨리 사라졌다. 바라지 않으면 실망도 없다. 공주가 봉익과 혼인하는 건 그로서도 바라 마지않는 혼사였다.

    어두워지던 촛불은 차츰 마지막 한 줄기 빛까지 사라졌다. 침대 위에 누운 구염상은 편안히 잠들어 있었다. 수천수백 번을 지나온 밤처럼 조용하고 달콤하게.

    * * *

    같은 시각, 손자의 방문 밖을 초조하게 서성이던 관몽득은 화가 머리끝까지 나 있었다. 이따금씩 들려오는 손자의 신음에 그는 당장이라도 의원을 죽이지 못하는 게 한이었다.

    “대체 어찌 된 일이냐! 사소가 대체 어딜 갔다 왔기에 온몸이 상처투성이냔 말이다! 죽고 싶은 게로구나. 정말로 죽고 싶어 환장한 게야!”

    바닥에 무릎을 꿇은 하인들은 감히 아무 말도 못하고 놀란 매미처럼 바닥에 바짝 엎드려 관사소가 무사하기만을 기도했다. 그가 무사해야만 혼나지 않을 터였다.

    관씨 가문의 열째인 노십이 학구적인 복장을 하고 총총걸음으로 분주히 다가왔다. 그가 아버지를 보고 조급하게 물었다.

    “어찌된 일입니까? 사소는 괜찮나요? 의원은 뭐라고 하던가요?”

    관몽득은 아들의 말에 순간 대노했다.

    “이제야 아들에게 관심을 두는구나! 진작에 좀 그러지 그랬느냐! 매일 흥청망청 술이나 마셔대고는! 조만간 관 씨 가문은 네 손에 망하게 될 게다!”

    “예예, 제 손에 망하게 될 겁니다. 아버지, 화내지 마세요. 의원이 안에 있잖아요.”

    노십은 아버지에게 의자를 갖다 드리기 위해 얼른 하인에게 손짓했다. 사실 관몽득도 그저 손자가 걱정되어 그런 것뿐, 정말 아들을 꾸짖으려는 건 아니었다. 게다가 아들은 누구보다 관몽득이 잘 알았다.

    만일 정말로 흥청망청 술이나 마시며 빈둥대는 아들이었다면 오늘날에 이르지도 못했을 것이다. 실제로 노십은 관몽득의 말과 달리 매우 훌륭했다. 비록 관사소만 못했지만, 이미 뛰어난 인재였다.

    노십은 아버지를 상대하지 않고 초조하게 서성이다가 가볍게 한숨을 토했다.

    “내일 류부에서 열리는 연회에 참석할 수 있을지 모르겠군요.”

    “연회라니?”

    “사소의 혼사 때문이지요. 아버지께서 류 후부를 마음에 들어 하시니 제가 힘을 좀 썼습니다. 류 후부의 둘째 어르신께 사소를 초대해 달라고 했어요. 비록 사랑받지 못한 딸이지만 어쨌든 적녀라는 명분을 갖고 있어서 그런지 둘째 어르신께서도 매우 신중하게 생각하는 눈치였습니다.”

    관몽득이 그 말에 한숨을 내쉬었다.

    “신중하다니 좋구나. 신중하게 여긴다는 건 우리를 무시하지 않는다는 뜻이지. 사소는 복을 타고난 아이니 류 후부의 둘째 어르신께서도 분명 마음에 들어할 게다.”

    말을 마친 관몽득이 바닥에 꿇어앉은 한 무리의 하인들을 향해 다시 크게 소리쳤다.

    “오늘 내 손자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하지 않으면 누구도 자리를 떠날 생각 마라!”

    * * *

    태양이 대지를 비추고 수탉이 목을 길게 빼며 우렁차게 울었다. 사방에 있는 닭들이 여기저기서 푸드덕대기 시작했다. 그 사이로 개 짖는 소리가 끼어들며 아침을 열었다.

    구염황은 일찍 일어나는 게 몸에 배어 있었다. 아침 운동을 끝낸 뒤 그는 허리띠를 두르고 마당에서 머리를 감았다. 우람찬 체격의 몸은 초가을 새벽에도 한기를 느끼기는커녕 오히려 뜨거운 힘이 흘러넘쳤다.

    일찍 자리에서 일어난 마을 장정들은 반구가 아침에 씻는 모습을 자주 보아 와서 아무렇지도 않았다. 장정들은 농사일을 나갈 때 그와 인사를 나누기도 했다.

    “뚱보야, 잘 잤냐.”

    “안녕하세요.”

    농사일을 나가지 않는 사람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양치를 했다. 저수지에 나온 이들은 부러운 듯 반구의 폭발력 넘치는 근육을 툭툭 치며 부러워했다.

    “야, 이 근육은 어떻게 만든 거야?”

    구염황은 머리를 닦으며 숨김없이 말했다.

    “단련하다 보니까 저절로 생겼어! 너도 몇 시간 덜 자면 나처럼 될 거야.”

    말을 하던 자가 입안에 물을 뱉으며 믿을 수 없다는 듯 말했다.

    “거짓말. 장 씨도 매일 아침 신체 단련을 하는데 왜 너 같은 몸이 안 되지?”

    “걔는 단련하는 강도가 약해서 그래.”

    물가에 점점 사람이 많아졌다. 사람들은 함께 모여 담소를 나누면서 씻었고, 젊은이들은 저희끼리 모여 길을 지나가는 예쁜 아가씨를 바라보았다. 노인들은 삼삼오오 모여 노래를 부르며 가끔 불성실한 젊은이를 꾸짖기도 했다.

    갑자기 시끌벅적한 입구로 집사가 들어오더니 큰소리로 외쳤다.

    “모두 주목! 중요한 일이야! 정헌 아가씨가 오늘 저택으로 돌아가시는데 호위할 사람 두 명이 필요하다. 누가 가겠느냐!”

    지원하는 사람은 적지 않았다. 구염황은 누군가 자기를 알아볼까 봐 가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둘째 어르신이 아가씨께 남편감을 보여 주려 한다는 집사의 말은 순식간에 구염황을 앞으로 달려가게 했다.

    “제가 갈게요!”

    “좋아. 네가 가라.”

    반구는 힘이 좋으니 뽑힐 만한 타당한 이유가 있었다.

    “그리고 장중張中, 너희 둘은 날 따라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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