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독후중생계 (432)화 (432/449)

외전 구염상 2-55

부마를 뽑는 의식은 매우 성대하고 장중했다. 구염락은 재계齋戒(종교의식을 치르기 위해 부정을 멀리하고 깨끗이 정화함)를 마친 용포를 입고 문무백관 앞에서 참배를 올렸다. 승려들이 경문을 낭송하는 가운데 구염락이 옥 상자를 안아 들고 손을 집어넣었다.

한참 뒤, 소리자가 불진拂塵을 살짝 휘둘렀다. 장엄한 북소리가 잦아들고 결과가 선포되었다.

“봉익은 앞으로 나와 성지를 받으시오!”

“천명을 받들라! 봉 어사封禦史의 아들 봉익은 인품과 외모가 출중하고 재능이 넘치며 본직을 충실히 수행하였으니, 특별히 봉해군왕封海郡王 일등공一等功으로 봉한다. 길일을 택하여 공주와 혼례를 올리기를 명하노라.”

“황제 폐하, 만세 만세 만만세! 공주 전하, 천세 천세 천천세!”

바닥에 무릎을 꿇은 어떤 이는 쓴웃음을 지었고, 어떤 이는 안타까워했다. 또 다른 이는 의기소침했다. 반년 동안 품고 있던 큰 희망이 오늘로서 물거품이 됐다. 주인공이 자신이 아니라는 사실에 사람들은 흐느끼고, 질투하고, 불복했다.

그러나 누구도 감히 움직일 수 없었다. 이건 황제가 낸 결과였다. 그 누가 감히 입을 열겠는가? 무슨 자격으로 자신이야말로 공주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 * *

의식이 끝나자 중신들은 흩어졌다. 결과에 관해 왈가왈부하는 소리가 시작됐고, 동시에 봉씨 가문의 문지방은 거의 닳아 없어질 지경이었다. 공주의 부마가 되어 고귀한 신분의 여인을 아내로 맞이하게 된 것을 차치하고서도 봉해군왕이라는 작위는 대단한 영광이었다. 고원과 섭영진 등은 아마 평생 전장에서 싸우며 공을 세워도 그 자리까지 오르지 못할 터였다.

봉익은 아직도 어안이 벙벙한 상태였다. 자신이 뽑힐 줄이야!

‘정말 내가 뽑힌 건가?’

주변의 축하 소리에 봉익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감돌았다. 마음이 따뜻해졌다. 참으로 신령님이 그를 불쌍히 여긴 게 분명했다. 소원을 들어주시다니!

봉익은 스스로에게 맹세했다. 온 마음을 다해 그녀를 사랑하고, 죽을 때까지 변하지 않겠다고. 자신이 비록 상국연에 참석한 사람들 중 가장 뛰어난 남자는 아닐지라도, 그녀의 마음속에서 가장 훌륭한 남자가 될 것이고 그녀가 어떠한 것에도 상처받지 않도록 지켜줄 것이라고.

고원은 어깨를 두드려 주는 섭영진을 쓸쓸한 눈빛으로 바라보다가 다시 멀지 않은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봉익은 겉보기에 침착하고 여유로운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고원은 순간 느껴지는 여러 감정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이렇게 기회가 사라지는구나…….’

고원은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인파를 바라보며 연무대에 서 있던 구염상의 맑고 거침없던 눈빛을 떠올렸다. 마음이 마치 무언가에 찔린 것처럼 몹시 아프고 아팠다. 그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대성통곡하기 시작했다.

‘인정할 수 없어! 인정할 수 없다고!’

고원은 결투를 원했다.

‘재도전을 하겠다고?’

섭영진이 얼른 한 걸음 물러섰다. 섭영진은 본래 고원을 비웃어줄 셈이었다. 그러나 왠지 모르게 덩달아 마음이 옥죄는 걸 느낀 그는 마찬가지로 눈물을 흘리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정말 상 공주는 그들과는 인연이 없단 말인가.

섭영진은 내심 생각했다. 만일 상 공주가 혼인하지 않는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렇게 모두가 그리워하고 사모하는 여인이 한 남자의 여인이 되어 시야에서 벗어날 줄이야.

고원의 울음소리가 너무 구슬프고 진실해서였을까. 많은 사내들이 울고 있었다. 마음속 괴로움은 발산해야 하는 법이었다. 울 핑계는 다양했다. 자신을 위해, 뭐라 표현할 길 없는 상실감을 위해.

이미 자리를 떠났어야 할 구염락이 어두운 얼굴로 갑자기 되돌아왔다. 그가 흐느끼고 있는 자들을 노려보자 순간 장내는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가장 구슬프게 울었던 고원 역시 부친에게 입을 틀어 막힌 채 끌려 나갔다.

관복을 차려입은 도도는 무거운 발걸음으로 사람들 사이에서 걷고 있었다.

‘내가 아니었어……. 그녀와 손잡고 일생을 함께 할 수 있는 사람은… 내가 아니었어.’

돌연 고개를 돌린 도도가 뒤에 있는 우뚝 솟은 황궁과 높은 자리에서 성난 눈을 하고 서 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갑자기 마음을 가득 채운 자만심이 무너져 내리고 패배감이 덮쳐왔다. 스스로 훌륭하다고 여긴 건 아무 소용이 없었다. 결국 좋아하는 여인조차 쟁취하지 못했다.

종종걸음으로 뒤따르던 현천기는 갑자기 제자의 등 뒤에서 튀어나와 초조한 목소리로 위로를 건넸다.

“마음에 두지 말아라. 구염씨 가문에는 정상인 사람이 없다. 오히려 네가 공주에게 장가가지 못 한 게 지극히 정상적인 일이지. 네가 뛰어나지 못한 사람이라는 게 아니라 그냥 우리가 운이 나빴다는 뜻이다. 아니, 아니지. 우리가 운이 나쁜 게 아니라 너와 공주가 인연이 아니었을 뿐이다.

공주에게 장가가면 어차피 고생하는 건 너야. 공주가 아무리 예뻐도 계속 보면 질리기 마련이지. 생각해 봐라. 살다 보면 다 똑같아져. 어쩌면 공주는 네가 상상했던 것보다 별로인 사람일 수도 있어. 도도, 넌 절대 권 씨처럼 한순간의 짧은 감정에 사로잡혀 살지 말거라. 황후마마를 몰래 짝사랑하… 아, 하하… 오늘은 해가 참 좋구나.”

도도가 억지 웃음을 지으며 씁쓸하게 답했다.

“알아들었습니다……. 이제 보니 권 승상께도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는 때가 있었나 보군요. 심지어 권 승상 같은 분도 그러셨는데 제가 어떻게 초연할 수 있겠습니까.”

현천기가 발끈해 소리쳤다.

“빌어먹을! 난 너에게 그 점을 깨달으라고 설명한 게 아니야!”

이치는 부친과 함께 맨 앞에서 걷고 있었다. 부마 선발은 조금 전 막을 내렸다. 그와 함께 연경에는 또 다른 싸움이 이제 막 시작됐다. 눈치가 빠른 이들은 모두 알고 있었다. 오늘 그 자리에 태자가 참석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아마 주국은 또 한 번 피로 물들 모양이었다.

완벽하고 빼어난 아들을 바라보자 마음속에서 자랑스러움이 마구 샘솟은 이치의 부친이 참지 못하고 말했다.

“이제 네 혼사를 거론할 때가 됐구나. 우선 마음부터 추스르거라. 더는 그런 너절한 여인들과 왕래하지 말고. 내 보기에 장씨 가문의 여식이 훌륭하더구나. 공주 전하에 못지않으니 마땅히 존중해야 할 것이다.”

이치는 담담하게 대답했지만 딱히 아버지의 말을 마음에 담아 두지는 않았다.

“알겠습니다.”

“알겠다는 녀석이 밖에서 첩이나 만들고 있어? 혼례를 올리고 난 뒤에는 네가 무슨 황당한 일을 벌여도 간섭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안 돼!”

이치의 말투는 여전히 담담했다.

“알겠습니다.”

‘또 똑같은 답이군.’

이치의 부친은 소리 없이 한숨을 내쉬었다. 아이는 자라면서 고집을 갖게 된다. 더는 사사건건 당부가 필요한 나이가 아닌 것이다. 하지만 부모란 아이가 더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 가끔은 참지 못하고 잔소리를 하는 존재였다.

* * *

구염상은 물가에 앉아 물고기 밥을 뿌려 주었다.

“봉익이구나…….”

“네, 공주 전하, 봉 대인입니다.”

구염상은 호수에서 서로 경쟁하는 물고기들을 바라보았다. 처음 봉익을 만났을 때가 떠올랐다. 물 속의 물고기들처럼 혼잡한 상황 가운데, 그녀는 제대로 서 있지도 못했으며 그는 거침이 없었다.

지난날을 회상하던 구염상은 문득 그 시절의 자신이 그립다는 생각을 금할 수가 없었다. 상대의 신분을 생각하고, 그가 선을 넘어도 억울하게 참았던 그때의 자신이.

‘억울하다’라…….

이미 그러한 기분을 느껴 본 지 오래였지만 구염상은 삶에서 뭔가가 빠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다시 태어난 후 높은 자리에 있는 부모님께 사랑을 받고 행복하기만 한 인생이 난생 처음으로 아름답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의 마음은 다시는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하지만 봉익은 처음 만났던 그때와 똑같았다. 그 시절부터 봉익은 이미 그녀에게 끈기 있게 손을 내밀었으며, 그녀의 소매에 쓸모없는 물건을 넣어 준 후 바보처럼 기뻐했다.

혜령은 말이 없는 공주를 몰래 힐끔 바라보았다. 황제의 당부를 떠올린 그는 책임을 다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공주 전하, 폐하께서는 전하께서 결과에 만족하시는지 반드시 여쭤보라 하셨습니다. 만일 마음에 안 드시면 다시 뽑으시겠답니다.”

구염상이 담담하게 웃었다.

‘다시 뽑으신다고? 성지가 무슨 장난도 아니고, 자존심 강한 아바마마께서 한 번 내린 성지를 어찌 거두시려고?’

“난 그가 마음에 든다. 그렇게 처리하거라.”

혜령은 대사면을 받은 사람처럼 기뻐했다.

“영명하십니다, 공주 전하. 그럼 노비는 명을 받들겠습니다.”

* * *

늦은 밤, 조용한 태자부의 상공에 갑자기 충돌이 일어났다.

관사소는 황급히 후퇴하여 먼 곳을 향해 빠르게 몸을 날렸다. 시위는 백여 명의 일등공一等功을 이끌고 공격을 시도했다.

“계속 추격하라!”

진작부터 죽이고 싶었던 자였다. 폐하께서 부마를 선택하는 날 대전에 영향을 끼칠까 염려하지만 않았다면 그날 밤 즉시 사람을 보내 죽였을 자였다.

검은 옷을 입은 관사소는 후퇴하는 동시에 싸웠다. 그의 몸에는 이미 수많은 상처가 나 있었다. 치열한 격전을 치른 끝에 가까스로 포위망을 벗어났지만, 또 다시 퇴로가 막혀 버렸다.

관사소는 가소롭다고 생각하며 점점 안색을 차갑게 굳혔다.

“계속 이러면 소리를 지를 거야. 오후부터 지금까지 날 추격하며 죽이려 하다니, 내가 네 주인이 누군지 모르는 줄 알아?”

그러나 아무도 관사소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고, 그를 죽이기 위해 계속 추격했다.

아래쪽에 있는 궁전을 내려다보던 관사소는 돌연 태자부로 돌진했다. 죽고자 하면 반드시 살 것이라 했다. 지금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그에게 살 기회는 없었다.

태자부는 순식간에 전투 태세를 갖추었다. 순식간에 검과 창, 몽둥이가 떨어지는 관사소에게로 쏟아졌다.

관사소는 끙 소리를 내며 속으로 실수였다고 중얼거렸다. 눈 깜짝할 사이 그의 머리 위에는 철통같은 방비와 서릿발처럼 날카로운 검술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시위 측 사람들은 조용히 무리 속으로 몸을 감추며 관사소를 제거할 때를 기다렸다. 관사소가 갑자기 소리쳤다.

“난 움직이지 않겠다! 공주 전하를 봬야겠어! 난 공주 전하와 아는 사이이고 긴밀히 상의할 일이 있어!”

소란에 잠에서 깬 구염상은 소루小路의 시중을 받아 옷을 갈아입으며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그녀가 한쪽에 무릎을 꿇고 있는 소태감에게 물었다.

“오라버니는?”

“네, 공주 전하, 태자께서는 오늘밤 저택에 안 계십니다.”

“어쩐지.”

구염상이 옷소매를 가다듬었다.

“길을 안내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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