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구염상 2-54
관몽득은 손자의 나쁜 성격을 잘 알고 있었다. 만일 관사소가 대외적으로 조금이나마 웃는 낯을 보일 줄도 몰랐다면 관몽득은 아마 관씨 가문의 다음 대를 잇는 후계자로 그를 지목하지 않았을 것이다.
“걱정하지 말거라. 이 할아비가 전 재산을 다 탕진해서라도 네게 높은 신분의 적녀를 얻어 주마.”
관사소가 할아버지를 바라보며 비웃듯 말했다.
“정말 늙으셨군요. 할 일이 없으면 노래나 들으시지요. 쓸데없는 걱정일랑 마시고요.”
“너 이 녀석!”
관몽득은 어린 손자와 쩨쩨하게 다투는 대신 득의양양하게 답했다.
“이 할아비가 널 위해 벌써 류씨 가문의 적녀를 점찍어 두었다. 류씨 가문 후부侯府는 알지? 인재를 많이 배출한 연경 제일의 후부 말이다. 그곳이야말로 진정한 전성기를 누리고 있는 명문 귀족이지. 류소경은 인맥이 굉장히 넓은 데다, 부친인 류소양의 집안은 아들과 손자가 인재로 가득하지. 우리 관씨 가문이 마침내 진짜 높은 가문의 규수를 데려올 수 있게 됐단다.”
관사소는 할아버지의 머리가 정말로 어떻게 된 것 같다고 생각했다. 찻잔을 손에 든 관사소는 우쭐대는 할아버지를 웃을 듯 말 듯한 표정으로 바라보면서 알려주듯 말했다.
“오리를 기르고 밭을 매는 후부의 적녀 아가씨라니, 참으로 명망 있는 귀족이군요.”
관몽득이 듣고 어색하게 웃었다.
“그런 건 개의치 말자꾸나. 우린 신분만 보는 거야.”
“제 어머니의 신분과 별반 차이가 없지 않습니까.”
구색만 갖추었을 뿐이다. 류씨 가문이 출세 가도를 달리고 있는 것과 시골 농장에서 자란 적녀 아가씨는 아무런 관계가 없었다. 오히려 류씨 가문은 온갖 이유를 대며 관씨 가문에 은자를 바치라 할 것이다. 하지만 류씨 가문이 그들에게 무엇을 줄 수 있는가? 그들은 시골에 처박아 둔, 심지어 자신들도 기억하지 못하는 여식을 관씨 가문의 재산과 맞바꾸려 하고 있었다.
관몽득은 말을 삼키고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손자 녀석이 류씨 가문에 관하여 잘 알려지지 않은 정보까지 알고 있는 것을 기이하게 여겼다. 말을 꺼내자마자 류씨 가문의 아가씨가 어떠한 처지인지를 줄줄 읊다니.
생각에 잠겨있던 관몽득에게 갑자기 뭔가가 번뜩 떠올랐다.
“사소야, 네 외조부께서 요즘 네게 돌아오라고 하지 않으시더냐?”
관사소의 외가는 몰락한 가문이긴 하나 어찌 됐든 벼슬길에 올라있는 가문이었다. 그러나 세대를 거듭할수록 직위가 낮아져 손자 세대에는 겨우 6품 관직에 머물며 어떤 실권도 갖지 못 했다. 그나마도 관씨 가문이 은자를 써 준 덕에 부수입이 짭짤한 관직을 얻은 것이었고, 이제 조금 더 은자를 쓰면 그래도 올해에는 5품으로 승진할 가능성이 있었다.
관씨 가문은 지난 몇 년 동안 몰락한 학생들을 후원해 왔다. 그러나 단지 후원이었을 뿐, 학생들은 3품 이상에 오르면 명문가 사부를 따르게 되어 있어 관씨 가문은 어떠한 보답도 받지 못했다. 결국 관몽득은 실망하여 점점 후원을 꺼리게 되었다.
관사소는 할아버지가 진작에 후원을 그만뒀어야 했다고 생각했다. 장사꾼은 장사꾼일 뿐이다. 어찌 분수에 맞지 않는 것을 얻으려 하는가. 장사꾼이라는 글자 앞에 관직이라는 글자를 더하는 게 관씨 가문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아니요.”
관몽득이 한숨을 내쉬었다.
“네 외조부의 관직이 낮지만 않았다면 너도 부마 선발에 나갈 수 있었을 게다.”
관몽득이 순간 다시 말을 삼켰다. 어째서 이렇게 학문에 소질이 없는 손자가 있을꼬. 아들 노십은 다방면에 재능을 갖춘 인재였으나, 관사소는 아버지와는 완전히 달랐다. 심지어 풍류를 즐길 줄 아는 노십과 달리 관사소는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모든 것을 다 봐 왔기에 그 모든 걸 증오하며 거의 붓을 들지 않았다.
생각에 잠겨 있던 관몽득은 이내 정신을 차리고 그래도 관사소가 가장 훌륭하다고 생각했다. 아쉽게도 황실에는 장수가 부족하지도, 뛰어난 문관이 부족하지도 않았다. 황실은 당당한 태평성세를 누리고 있어 관씨 가문이 실력을 발휘할 여지가 전혀 없었다.
황제에게는 모두 일곱 개의 군단이 있었고, 태자는 그 중 세 개를 보유하고 있었다. 나라에는 백만 대군과 삼십여 명의 장수가 있었다. 또한 예비 문관은 수천 만이 넘었고 국고에 은자가 차고 넘쳤기에 아무리 급성장한 관몽득이라도 남들보다 높은 지위에 있는 타국의 동료가 부러운 건 어쩔 수 없었다.
“상 공주는 누구와 혼인한다더냐?”
“피곤하실 테니 이만 돌아가 쉬십시오. 여봐라, 어르신을 저택으로 모셔다 드려라.”
“이놈아, 내가 뭘 잘못 말했다고 이러는 게냐! 두고 보자, 이 녀석! 난 안 간다! 이거 놔!”
관몽득의 그림자가 점점 멀어져 갔다. 가면서 쉬지 않고 소리치는 것으로 보아 아직 기력이 좋은 듯했다.
의자에 기대앉은 관사소의 머릿속에 갑자기 어떤 생각이 스쳤다. 별안간 자리에 바로 앉아 옷매무새를 가다듬은 그가 밖으로 향했다. 관사소는 우물쭈물하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 그는 생각이 떠오르면 바로 실행하는 사람이었다. 설령 불가능할지라도 두 눈으로 직접 결과를 봐야 직성이 풀릴 듯했다.
* * *
누이동생을 설득하지 못한 구염황은 쓸쓸히 옷을 갈아입은 후 홀로 연경 외곽에 있는 류씨 가문의 장원莊園으로 향했다. 낡은 광목옷으로 갈아입은 그는 후원 땔나무 창고에 쭈그리고 앉아 땀을 뻘뻘 흘리며 장작을 팼다. 순수하게 힘을 소모하자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이렇게 해야만 어린아이 같은 누이동생이 혼인을 올린다는 사실을 잊을 수 있었다.
주방에 있던 부인이 밖으로 나오다가 뚱뚱한 머슴을 보았다. 그녀는 손에 든 닭과 생선을 그의 곁에 쌓아놓았다.
“죽인 다음에 토막 내서 내가 준비해 놓은 단지 속에 넣어 놓거라.”
“동서, 아직 멀었어요? 폐하께서 타신 마차가 이제 곧 성문을 지날 거래요! 빨리 와요!”
“이제 가요!”
부인은 뚱뚱한 머슴에게 반드시 깨끗하게 손질해 놓아야 한다고, 오늘 점심에 오실 손님께 드릴 것이니 소홀해서는 안 된다고 재차 당부했다. 황급히 앞치마를 벗은 그녀가 손을 닦고 뛰어나갔다.
구염황은 힘껏 장작을 쪼갰다. 한 무더기의 나무토막이 쌓였지만 구염황의 기력은 여전했다. 그는 쉬지 않고 계속 장작을 쪼갰다. 장작은 계속 늘어났다.
나물 한 바구니를 들고 주방으로 들어가려던 류정헌은 한쪽에서 쉬지 않고 장작을 패는 반구胖九(구염황의 별칭)를 바라보았다.
“폐하께서 출행을 나오셨다는데 보러 가지 않나요?”
여자의 목소리는 활발하고 거침없었다. 시원시원한 태도에서 귀한 가문의 딸이 주는 고지식함이나 딱딱함은 느껴지지 않았다.
어린 시절부터 장자에서 자란 류정헌은 농민들처럼 먹고 입었다. 주변 마을 사람들과도 매우 친하게 지냈을 뿐더러 온종일 밖을 돌아다니며 마을의 다른 여자아이들처럼 먹을 것을 찾아왔기에 이 예쁜 여자아이가 류소양의 적녀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류정헌은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였다. 그녀는 누군가를 원망하거나 열등감을 느끼지도 않았다. 그녀에게 화려한 저택은 너무 낯선 곳이었다. 그녀는 이곳이 훨씬 좋았다. 단순한 생활과 밥 짓는 연기가 피어오르는 곳. 비록 이 주방조차도 마음대로 사용할 자격이 없었지만 그래도 굶어 죽을 일은 없었다.
말소리를 들은 구염황이 고개를 들었다. 눈에 들어온 웃는 얼굴에 구염황은 돌연 심장이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그녀의 맑고 상쾌한 느낌은 구염황의 긴장된 마음을 기적처럼 안정시켰다.
이내 얼굴이 붉어진 구염황은 도리어 고개를 숙이고는 다시 열심히 장작을 패기 시작했다.
류정헌이 부드럽게 웃으며 모든 친구에게 하듯 꾸밈없고 자연스럽게 말했다.
“안 힘들어요? 좀 쉬었다가 해요. 제가 조금 전에 산에서 나물을 많이 캐왔어요. 점심에 반찬으로 만들어 줄게요.”
류정헌은 모든 하인을 지칭하며 말했다. 이곳은 비록 류씨 가문의 산장이었지만 관리하는 이는 산장의 총관總管이자 류소양이 가장 총애하는 첩실의 수하였다. 그는 의지할 곳 없는 류정헌에게 권력을 넘겨주지 않았다. 총관의 눈에 류정헌은 장자 안에 있는 다른 계집종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
“내… 내가 나물 다듬는 걸 도와줄게…….”
류정헌이 멈칫하다가 깔깔대며 웃었다.
“오라버니는 우선 아주머니께서 맡기신 일부터 해요. 닭이랑 생선을 손질해야죠. 아주머니가 돌아오기 전까지 다 해놓지 않으면 품삯이 깎일 거예요.”
구염황은 바보처럼 헤헤 웃으며 얼른 대야에 쌓인 닭과 생선을 손질하기 시작했다. 류정헌도 의자를 가져와 앉아 한쪽에서 나물을 다듬기 시작했다.
“오라버니, 누이동생은 좀 어때요? 요즘에 자주 오지 않는 걸 보니 누이동생이 많이 아픈가 봐요.”
구염황은 한 방울도 튀지 않게 능숙한 솜씨로 닭과 생선을 다듬었다. 그는 류정헌의 시원시원하고 꾸밈없는 성격을 좋아했다. 그녀는 지금처럼 잡일을 하면서도 전혀 불편한 기색이 없었다. 마치 대자연과 하나가 된 바람처럼 그녀는 언제나 맑고 순박했다.
누이동생 이야기가 나오자 구염황의 손동작이 조금 느려졌다. 여자아이의 생각은 여자아이가 잘 알지 않을까?
“그 애는…….”
구염황이 잠시 생각하다가 이어 말했다.
“…그 애는 이제 곧 혼례를 올릴 거야. 그런데, 왜 그런지 모르겠는데 누이동생은 조금도 기뻐하지 않는 것 같아.”
류정헌이 반구를 빤히 쳐다보았다.
“누이동생의 병환이 깊은가요? 아니면 남편감이 마음에 안 드는 건가요?”
“마음에 안 들면 다른 사람을 찾으면 돼. 좋아하는 사람이 없어서 혼인하기 싫다면 그건 괜찮아. 내가 평생 데리고 있으면 되니까. 그런데 동생은 그냥 시집가는 게 싫다고 했어. 그게 왜 싫을까?”
류정헌은 자신을 바라보는 반구의 눈을 마주보았다. 눈빛이 교차한 순간, 그녀의 뺨이 살짝 붉어졌다.
“그건… 저도 잘 모르겠어요…….”
아직 시집도 안 간 처녀가 그런 걸 어떻게 알겠는가. 류정헌은 반구가 항상 별걸 다 묻는다고 생각했다.
류정헌이 쑥스러운 듯 고개를 숙였다. 그녀는 수줍어서 고개를 들 수 없었다. 그녀 역시 혼례를 올릴 나이가 되었고, 유모가 이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도 들었다. 그녀는 자신의 신분을 알고 있었기에 상대의 신분이나 지위에 특별한 바람은 없었다. 그저 청렴한 가문과 혼인하여 한결같은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으면 더 바랄 게 없다고 생각했다.
구염황은 넋을 잃고 속으로 생각했다. 그녀가 수줍어하는 모습은 정말 보기 좋았다. 그러나 즉시 다른 생각 하나가 더 튀어나왔다.
‘저게 바로 여자아이가 ‘혼례’라는 말을 들었을 때 보여주는 정상적인 반응이야!’
누이동생처럼 반응하는 사람은 극히 드물 터였다.
고개를 들던 류정헌은 반구가 손질을 다 한 생선을 대야에 던지려는 걸 보고 순간 큰소리로 외쳤다.
“잠깐! 던지지 말아요! 앗, 빨리 건져요! 아주머니가 아시면 우리를 가만 안 둘 거예요!”
구염황은 오물더미 안에서 황급히 생선을 건졌다. 류정헌이 안도의 숨을 내쉬는 것을 보자 구염황은 마음속 뜨거운 감정이 물결처럼 출렁이는 걸 느꼈다.
구염황은 처음으로 그녀를 뚱뚱한 몸으로 대하는 게 매우 예의 없는 행동이라고 생각했다. 게다가 이런 몸으로 그녀의 시선을 받고 싶지 않았다.
구염황은 살을 빼고 싶었다. 그녀가 남자를 바라보는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봐 주길 바랐다. 그리고 그녀가 자신을 마을 장자에 있는 아저씨나 노인을 대하는 것처럼 다정하게 대하는 것이 아닌, 사랑으로 대해 주기를 바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