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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중생계 (430)화 (430/449)

외전 구염상 2-53

군중 속에 섞여 있는 고원의 두 눈은 빨갛게 부어올라 있었다. 밤새 꿇어앉아 있느라 한시도 눈을 붙이지 못했기 때문이다.

고원은 문득 문관 대열에 있는 도도를 바라보았다. 평소처럼 기력이 왕성한 모습에 고원은 화가 나서 이를 악물었다. 만일 도도가 뽑힌다면 그는 반드시 불복할 것이다. 어찌 저런 인간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무릎을 꿇고 있을 때조차도 부정행위를 저지르다니!

군중 속에서 무릎을 꿇고 있는 섭영진은 황족의 조상에 제를 올리면서 자신의 이름은 상자 속에 없을 거라고 어렴풋이 생각했다. 그는 황제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있었다. 황제는 절대로 공주에게 말 못 할 병이 있는 부마를 맺어 줄 사람이 아니었다.

‘내가 무엇 때문에 병을 얻었는데!’

여기까지 생각한 섭영진은 순간 격분을 금치 못했다. 폐하께서 어떻게 자신에게 이럴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곧이어 섭영진은 고개를 저으며 마음을 비웠다. 그 역시 이런 병자 같은 모습으로 공주 앞에 나타나는 건 참을 수 없었다.

군중 속에서 흑색 그림자 하나가 스쳐 지나갔다. 부마, 행운, 공주 등의 단어가 그의 귓가를 가득 채웠다. 그가 살짝 내리깐 눈으로 자기도 모르게 봉쇄된 대로를 쳐다본 뒤 말했다.

“가자.”

한편, 구염황은 침대 옆에 앉아 늦잠을 자고 있는 누이동생을 바라보고 있었다.

“너 정말 아바마마께서 멋대로 하시게 그냥 둘 거야?”

구염황은 누이동생의 이불을 잡아당겼지만 젖히지는 못했다.

“일어나라 좀! 이렇게 큰일에 어떻게 신경을 안 써? 너와 평생 함께 할 남자를 뽑는 거라고!”

억지로 끌어당겨진 구염상이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아직 눈을 완전히 뜨지 않은 상태였다.

“오라버니… 뭐 하는 거예요. 전 아직 한창 잘 시간이란 말이에요.”

말을 마친 그녀가 다시 이불로 몸을 싸매고 자리에 누웠다. 구염황은 다시 누이동생을 끌어당겨 자리에 앉힌 후 동생의 이마를 쉬지 않고 쿡쿡 찔렀다.

“정신 차려. 아바마마께서 지금 널 팔려고 하신다고. 그런데 자신을 구할 생각은 안 하고 뭐? 그러다 아바마마께서 정말 네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을 고르면 어떡하려고 그래.”

“상관없어요.”

그녀가 아픈 이마를 문지르며 말을 이었다.

“전 아바마마께 혼인할 생각이 없다고 말했어요. 제 말을 안 들으시는데 뭘 어쩌겠어요. 누구에게 시집갈지 전 정말 관심 없어요. 싫은 사람이 없으니 아무나 고르라고 하죠, 뭐.”

구염황은 다시 침대에 누워 늦잠을 자려는 누이동생을 바라봤다. 그의 기억 속 누이동생은 언제나 이랬다. 어렸을 때는 귀엽게 그를 잡아끌며 설교하기 바빴던 아이가 점점 자랄수록 어떤 일에도 마음을 두지 않았다. 지금은 부마를 고르는 일에도 관심 없어 하니, 과연 동생다웠다. 그 역시 태자비가 누가 되든 상관없다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물론 지금은 달라졌지만.

“상아, 난 네가 나중에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고 후회하게 될까 걱정 돼.”

별안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구염상이 구염황의 눈을 진지하게 응시했다.

“오라버니, 좋아하는 사람 생겼죠? 게다가 요즘 오라버니 살 빠졌어요. 이것 봐요. 이제 눈두덩이 사이로 눈이 보이잖아요.”

구염황은 마구 찔러오는 누이동생의 손을 얼른 치우고는 긴장한 마음을 감추기 위해 그녀의 머리를 콕콕 찔렀다.

“지금 네 이야기 하는 중이잖아! 네 이야기! 이제 곧 있으면 부마가 생길 텐데 어떡할 거야. 나중에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다고 울지나 마라.”

갑자기 책상다리를 한 구염상이 오라버니 옆에 앉았다. 그녀의 눈 속 깊은 곳에 있는 고요함은 영원히 가시지 않을 것 같았다.

“오라버니, 전 좋아하는 사람이 없어요. 심지어 아바마마께서 왜 저를 혼인시키려고 하는지도 모르겠어요. 혼자서 지내는 게 뭐가 어때서요? 전 아이가 필요 없고, 아바마마께서 말씀하시는 가족과 함께 하는 미래도 필요 없어요. 하지만 제가 혼인을 해야지만 두 분의 마음이 놓이신다면 혼인할 수 있어요.”

구염황이 깜짝 놀란 눈으로 누이동생을 바라보았다. 누이동생의 입에서 나온 말이 무슨 뜻인지 그는 이해할 수 없었다.

‘왜 너는 너와 함께 손잡고 살아갈 사람에 대한 환상이 없는 거야?’

구염황은 사랑하는 여인과 함께라면 평생 마음이 설렐 것 같았다. 그런데 지난 며칠간 수많은 수재를 만나온 상아는 어째서 설레는 감정이 없는 걸까?

“정말 좋아하는 사람이 한 명도 없어?”

구염상이 긴장한 구염황을 바라보며 부드럽게 싱긋 웃었다.

“누구도 싫어하지 않아요. 그러니 아바마마께서 누구를 선택하시든 전 좋아할 거예요.”

구염황은 누이동생의 웃는 얼굴에 순간 말문이 막혔다.

‘혹 상아는 연애 감정에 관해 전혀 몰라서 무관심한 게 아닐까?’

하지만 동생의 눈 속에 담긴 고요함과 순수함은 무엇으로도 깨뜨릴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렇게 세상사에 초연한 눈빛은 어머니나 외로운 삶을 사는 후궁의 눈에 나타나야지 활달하고 사랑스러운 누이동생의 눈에 나타나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구염상은 오라버니가 말이 없자 속으로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오라버니를 놀라게 한 걸까?’

하지만 구염상은 정말로 다시 사랑할 기력이 없었다. 설령 그녀 자신이 원한다 해도 어찌할 수 없었다. 이건 신분 때문이 아니라 그녀의 성격 때문이었다.

“오라버니, 전 정말 괜찮아요. 어쩌면 혼인을 하면 부마를 사랑하게 될지도 모르잖아요?”

아니, 사람이 너무 냉정하면 사랑을 받아들일 수 있을지는 몰라도 사랑하는 법을 배우는 건 어려웠다. 구염황은 시간이 지나면 사랑이 생겨날 수 있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는데, 강인한 성격을 가진 사람에게는 특히나 적용되지 않았다. 그의 부모가 그러했고 누이동생 역시 마찬가지였다.

구염황은 돌연 생각했다. 어쩌면 가족들 중에서 정상인 사람은 자신 밖에 없을지도 모른다고. 어렸을 적 그는 피를 보면 울었고 억울한 일을 당하면 분노했고 가끔 뜨거운 혈기에 궁 밖으로 뛰쳐나가 활개를 치고 돌아다니기도 했다.

하지만 누이동생은 그렇지 않았다. 구염황은 시위가 사람을 죽이는 걸 처음 목격했을 당시 누이동생이 차분한 반응을 보였을 뿐더러 생활이 어려운 할아버지가 매질을 당할 때에도 의혹의 시선으로 살짝 눈살을 찌푸렸을 뿐이라는 걸 여전히 기억하고 있었다.

누이동생은 그에게 자주 동정심을 가지라고 훈계했다. 하지만 동생은 정작 그런 마음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녀는 기이한 방관자 같았고, 가족 외에는 그 무엇에도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

구염황은 이로 인해 초조해하는 어머니와 아버지의 대화를 들은 적이 있었다. 아버지는 구염상이 천성적으로 공주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상아는 어렸을 때부터 비현실적인 환상을 품지 않고 공주의 책임과 신분에 대한 뚜렷한 자각이 있었다고, 그런 모습이 자신과 꼭 닮았다며 아버지는 매우 자랑스러워했다.

하지만 구염황은 그럴 수 없었다. 그는 언제나 혼인 속에 애정이 있기를 바랐고, 인간의 정의를 숭배했으며, 인생은 놀랍고 기쁜 것이라고 여겼다. 덕분에 그는 인생을 마음껏 즐길 수 있었다. 다만 그는 침착함이 없었다. 그의 강산은 눈부시게 아름다웠고 매일 일어나는 일들은 너무나 다채로웠다.

‘헌데 상아는 어째서 모든 일에 무관심한 걸까?’

구염황은 누이동생이 아버지를, 자신은 할아버지를 많이 닮았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물론 지금 오라버니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구염상이 알았다면 분명 그를 비웃을 것이었다. 여태껏 가장 사람을 많이 죽인 사람은 바로 오라버니라고, 오라버니가 우유부단한 모습을 보인 적은 단 한 번도 없다고 말하면서.

* * *

중년에는 후덕했으나 노년이 되자 비쩍 말라 버린 늙은이가 바퀴 달린 의자에 앉아 있었다. 창가에서 들려오는 소녀의 연주 소리에 귀를 기울인 그에게는 무수한 자녀가 있었지만, 그 중 쓸 만한 재목이 된 자식은 노십老十 한 명뿐이었다. 손자는 자녀보다 더욱 많았는데, 아이들은 상좌에 앉기 위해 서로 싸우고 죽인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만일 주국이 지나치게 강성하지 않았다면, 태평성세를 맞이하지 않았다면 그가 쌓은 부는 가히 나라의 재산과 필적한다고 말할 수 있었을 것이다. 여러 주변국의 황제가 지닌 영토, 재산을 모두 합쳐도 관몽득管夢得을 능가하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관몽득이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건 그런 것들이 아니었다. 그가 자랑스럽게 여기는 건 관 씨 가문의 재산을 짊어질 만한 자손이 각 세대마다 나오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손자가 들어오는 것을 본 연로한 관몽득의 눈 속에 자애로운 빛이 가득 찼다. 그가 손을 휘휘 저으며 시녀를 물러가게 했다.

“왔구나. 바깥이 시끌벅적하지?”

관사소는 조용히 자리에 앉아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관몽득은 흔히 있는 일이라는 듯 하하 웃었다.

“지난번 일로 여전히 화가 나 있구나. 너도 이제 어리지 않다. 네 아버지가 너만 했을 때는 벌써 서출 자식들이 두 발로 뛰어다녔다. 콜록콜록… 오늘 폐하께서 공주의 부마를 뽑으신다지? 내 손자가 참가하지 못하다니 생각할수록 참 아쉽구나.”

관몽득이 분하게 여기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정말로 아쉬웠다. 그들 관씨 가문은 부족할 게 없었으니 단지 관직 하나가 모자랐다. 과거 관몽득이 지금의 3품 관원보다 못한 자리에 만족한 이유는 단지 그의 뜻이 관직에 있지 않아서였다. 그는 청산을, 여기저기 뛰어다니는 걸 좋아했다.

관사소는 할아버지가 왜 갑자기 그 이야기를 꺼내는지 몰라 어리둥절했다. 관몽득은 다시 탄식했다. 이게 다 팔자란 거지. 하지만 그는 이내 참지 못하고 웃으며 말했다.

“내 기억 속에 황후마마는 여전히 아이인데 이젠 상 공주가 혼인을 하는구나. 그거 아느냐? 과거에 황후마마께서는 말이다…….”

관사소는 할아버지가 들려주는 옛이야기가 따분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듣고 있으면 마치 할아버지처럼 그 시절의 정경이 눈앞에 펼쳐지는 것 같았다.

관사소는 돌연 생각했다. 상국연에서 그녀가 선보였다는 궁술 역시 신의 경지였을까? 모든 사람이 다 놀랄 만큼?

이야기를 마친 관몽득은 손자의 눈빛이 어두운 것을 보고 담담하게 웃었다.

“내가 늙었구나. 늙었어. 너희 젊은이들은 재미없다고 생각하겠지.”

“아닙니다.”

관사소는 담담했지만 진심이었다. 관몽득은 순간 마음이 후련해졌다. 손자는 이렇듯 인내심이 강했다. 어쩌면 아들 노십老十보다도 인내심이 있었다. 이렇게 참을성이 많은 아이는 처음이었다.

“됐다. 이 늙은이를 위로하지 않아도 된다. 지금 너희 젊은이들은 모두 공주에 관해 이야기를 하는데, 나는 황후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으니 이미 한물 간 게지. 너도 굳이 여기 와서 이 늙은이의 말동무를 해 주지 않아도 된다. 내려가서 좀 놀거라. 얼른 이 할아비에게 손자도 안겨 주고.”

관사소는 대답하지 않았다. 쓸데없는 말에 대꾸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 탓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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