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독후중생계 (429)화 (429/449)

외전 구염상 2-52

입가에 묻은 피를 닦은 구염락이 조로전 궁문 밖에 초라하게 기댔다. 그는 안절부절못하며 생각했다.

‘정말 화난 건 아니겠지?’

구염락은 초조하게 창문을 관찰하며 시간을 헤아렸다. 조금 더 기다렸다가 서열이가 잠들면 기어들어 가야지. 사람이란 역시 나이가 들면 고집스러워지는 모양이었다. 때리는 손길이 점점 매워졌다.

소리자가 황급히 달려와 달빛을 등지고 말했다.

“폐하, 태자께서 뵙기를 청합니다.”

“꺼지라고 해!”

멀리 꺼질수록 좋았다. 자식 녀석들이 일을 저지르지만 않았어도 그의 처지가 근 두 달 새 이런 초라한 신세로 전락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구염황은 아버지가 화를 내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는 며칠 전 아버지와 나눈 약속을 지키기 위해 연경 대신들의 동향에 대하여 보고를 하러 온 것이었다.

‘보고를 듣고 외부 세력에 매수당한 관원을 잘라 내도 모자랄 판에 오히려 나더러 꺼지라고?’

어마마마가 언짢아하시는 것도 당연했다. 누이동생을 위해 누이동생의 부마를 제비뽑기로 뽑겠다니? 아바마마는 정말 머리가 정상이 아니었다.

* * *

고요한 밤, 고관대작의 저택 문은 굳게 닫혀있었다. 당직을 서는 계집종과 하인들의 수는 낮보다 적은 탓에 어쩌다 한 명씩 보였고 당직을 서는 이들도 하품을 하며 겨우 몸을 가누고 있었다. 층층 누대와 우뚝 솟은 누각이 한데 어우러진 저택들은 부귀영화를 이룬 부귀한 가문의 마을을 형성했다.

조용한 밤, 저택 깊은 곳에서 별안간 귀를 찌르는 비명이 들렸다. 여인의 우렁찬 목소리와 함께 곧이어 험상궂은 얼굴이 불같은 노여움을 쏟아냈다.

“이 천한 것! 천한 것이 감히 내 아들에게 나쁜 물을 들여? 감히 그런 비천한 짓을 가르치다니!”

소리를 지른 여인이 침대 위로 달려들었다. 여인은 어린 아들을 덮친 계집을 미친 듯이 마구 때리기 시작했다.

금용이 죽자고 반격했다.

“하하! 네 아들이 나한테 부탁했어! 네 아들이 부탁한 거라고! 천한 걸 논하자면 네 아들이 제일이지!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녀석이 벌써부터 여인을 밝히기나 하고 말이야! 하하하!”

주소유가 긴 손톱을 휘두르며 시뻘건 눈으로 한스럽게 외쳤다.

“죽여 버릴 테다!”

깜짝 놀란 헌원사책은 이불로 몸을 꽁꽁 싸맨 채 구석에서 몸을 웅크렸다. 그는 두려운 눈으로 앞에서 미친 듯이 싸우는 두 여인을 바라보았다.

‘나는… 아무 짓도 안 했는데… 정말 아무 짓도 안 했는데. 금 이랑이 기분 좋게 해 주겠다고 해서 그냥…….’

금용이 경박하게 깔깔대고 웃었다.

“날 죽인다고? 하하! 죽여 봐, 어서! 나도 진작부터 살기 싫었으니까. 하지만 죽기 전에 네 아들 맛을 보고 가니 밑지는 장사는 아니지 뭐야? 하하! 날 잡은들 무슨 소용이야! 이번이 처음도 아닌데. 들었어? 처음이 아니라고! 네 아들과 언제부터 이랬는지 알고 싶지? 안 가르쳐 줄 거야!”

금용이 미친 듯이 웃으며 이어 말했다.

“네 아들은 이미 날 자기라고 불러. 게다가 나보고 빨리 해 달래… 하하! 이게 바로 네가 낳은 아들이야. 아버지의 첩실과 관계를 갖는 아들이라고!”

황급히 방 안으로 뛰어 들어온 헌원사사가 서로 맞잡고 싸우는 두 여인을 발견했다. 계집종과 하인들이 뜻밖에도 말리지 않고 있는 것을 본 헌원사사는 깊은 숨을 들이마시며 냉정을 되찾으려고 노력했다. 이내 그가 침착하고 위엄 있는 목소리로 외쳤다.

“뭣들 하는 게냐! 두 사람을 떼어 놓지 않고!”

형님의 목소리를 듣고 급히 튀어나온 헌원사책이 형의 등 뒤로 숨었다. 그가 모기처럼 작은 목소리로 무서워 덜덜 떨며 말했다.

“형님… 형님…….”

헌원사사는 바닥에 엉켜 있던 두 여인이 떨어지는 모습을 보았다. 뼈만 앙상하게 남은 모친과 엉망진창이 된 금 이랑은 어린 시절부터 언제나 말다툼을 벌였고, 그 관계는 오늘날도 여전했다. 게다가 이젠 무고한 헌원사책까지 끌어들여 싸우고 있었다.

여기까지 생각한 헌원사책은 두려움에 떠는 어린 아우의 손을 잡았다. 금용을 보는 눈빛에 차가운 빛이 번뜩였다. 그는 이미 다 커서 가문을 책임질 수 있게 되었다. 다시는 집안에 풍랑에 일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어린 아우에게 자신이 겪은 고통을 경험하게 하지 않을 것이다.

황제께서 하사하신 첩실이면 어떠한가. 이미 이렇게 오래 살았는데. 오랜 세월동안 저택 안에서 소란을 피운 것으로 이미 충분했다.

이날 밤, 헌원사사는 어린 아우를 데리고 나갔다. 이후 헌원씨 가문에서는 보름 동안 계속해 감기 몸살로 하인이 죽어 나갔다. 그 중에는 금 이랑을 측근에서 모시던 계집종도 있었다. 불행히도 금 이랑 역시 전염되어 생명이 위태로웠다.

하루 휴가를 낸 소리자가 금용을 보러왔다. 사경을 헤매는 금용의 베갯머리에 소매 속에 감춰둔 설산고雪山糕를 놓은 그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그녀의 바싹 마른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소리자의 목소리에 짙은 그리움이 배어 나왔다.

“금용, 이것 봐. 네가 병이 났다는 소식을 듣고 폐하께서 널 보고 오라 하셨어. 폐하께서 속으로 얼마나 널 생각하고 계시는지 알겠지.”

금용은 쓴웃음을 지었지만 입가의 곡선은 얼마 펴지지 못했다. 그녀가 손을 내밀어 천천히 소리자를 잡았다. 그녀의 눈 속에는 확신에 찬 깨달음이 있었다.

그가 자신을 생각했을 리 없다. 심지어 그는 자신이 누구인지도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무정한 그는 자기 뜻에 맞지 않는 사람에게는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과거 그가 자신의 가슴팍을 발로 찼을 때 금용은 진작에 정신을 차렸다. 그녀는 다시는 그의 마음을 얻으려고 하지 않았고, 그저 평온한 나날을 보내고자 했다. 그렇게 헌원상과 함께 일상을 보내려 했지만 헌원상은 그녀를 원하지 않았고, 주소유는 그녀를 못살게 굴었다. 이곳은 자신의 집이 아니었다. 이곳은…….

눈물 한 방울이 금용의 노쇠한 주름을 타고 흘러내렸다. 소리자의 손을 꼭 잡은 그녀가 이를 한껏 움켜쥐었다. 그러나 소리자의 손에 전해지는 힘은 매우 작고 약했다.

“난… 난 집에 돌아가고 싶어요……. 남소원南小院으로 돌아가고 싶어요…….”

손수건으로 황망하게 금용의 눈물을 닦아 준 소리자는 마치 수백 번 운 사람처럼 야윈 그녀의 모습에 마음 아파했다. 그가 얼른 답했다.

“그래, 그래. 우리 같이 남소원으로 돌아가자. 전하께서 이제 곧 수업이 끝나 돌아오실 테니 우리 곽 공공을 찾아가 먹을 것을 좀 달라고 하자…….”

금용이 웃었다. 마치 헤진 곳에 천을 덧댄 궁복을 입은 어린 시절을 본 것 같았다. 남소원 길 위에서 그녀는 끊임없이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전하께서는 돌아오시는 중일까? 억울한 일을 당하지는 않으셨을까? 잘난 체를 하는 황자와 공자들이 전하를 괴롭히진 않았을까?

금용의 눈빛이 갑자기 풀렸다. 하지만 입가에는 미소가 걸려 있었다. 그녀의 머릿속에 떠오른 마지막 장면은 어린 소리자가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모습이었다. 꾀죄죄한 소매 속에 설산고를 숨긴 소리자는 금용에게 무엇이 들어 있는지 맞혀 보라고 물었다. 바보같이 어리바리한 모습이 보기만 해도 얄미웠다…….

금용은 그 시절 소중한 얼굴을 기억해 냈다. 그녀에게 잘 보이려 조심스레 행동하고 부드럽게 이름을 불러 준 사람. 겨울이 되면 길어 온 물을 데워 놓고 바보처럼 기다려 주고, 남은 돈 몇 푼을 설산고로 바꿔 자신에게 건네주며 좋아하던 그.

눈물을 머금은 금용이 천천히 싱긋 웃었다. 원수를 갚고 그녀의 마음속에 자리 잡은 일생은…….

금용은 마지막으로 입을 벌려 무어라 말했지만 소리자는 알아들을 수 없었다.

마음으로 깊이 사랑한 여인의 손이 손안에서 미끄러져 떨어졌을 때, 소리자는 울지 않았다. 그는 차분하게 헌원사사와 협상을 했다. 금용의 시체를 금용의 고향에 묻어 주고 싶었다.

헌원사사는 이를 허락했다. 헌원부를 나온 소리자는 창백한 얼굴을 들고 푸르디푸른 가을 하늘을 바라보았다. 발밑이 잠시 휘청이는 듯했지만 어린 제자가 급히 다가와 그를 부축했다.

“의부님, 조심하세요.”

조심이라… 소리자는 평생을 조심하며 산 덕분에 오늘날까지 살아남았다. 그는 금용의 죽음이 뜻밖이지 않았다. 금용이 헌원부에서 무슨 짓을 했는지는 그 역시 잘 알고 있었다. 다만 금용을 저승길로 보낸 사람이 헌원오마나 헌원상이 아닌, 헌원사사일 줄은 생각지 못했다.

헌원사사는 그의 부친이나 모친보다 더 독한 마음을 가진 자였다. 금용은 헌원사사의 아우를 건드리지 말았어야 했다.

눈가의 흔적을 닦은 소리자가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가서 네 고모를 들것에 모시고 오너라. 이만 가자꾸나…….”

“네, 의부님.”

어느 저택이든 이랑의 죽음은 조금도 중요하지 않았다. 연경의 태양은 여전히 떠올랐고, 바깥세상의 시시비비는 끝이 없었다. 헌원부의 부인과 이랑 사이의 일은 진작 과거 이야기가 되었다.

최근 사람들 사이에 화젯거리가 된 일은 고씨 가문의 고 장군이 지난 밤 태자부 밖에 꿇어앉아 하룻밤을 지새운 일이었다. 그는 공주의 부마를 뽑는 것을 반대하며 자신을 부마로 추천했다.

“한밤중에 잠깐 무릎 꿇은 게 뭐 대수라고! 도 대인은 아예 이불까지 싸서 갔다더군. 공주께서는 전처럼 아무도 만나지 않았고.”

“그렇다면 상 공주께서는 내일 정말로 제비뽑기로 부마를 택하는 거네요?”

“그러겠지. 공주께서는 뛰어난 재능과 지략을 갖춘 데다 문무를 겸비했고, 신분 또한 존귀하니 누구를 취해도 똑같을 거야. 누구도 공주보다 뛰어날 수 없고 누구도 공주의 신분을 떨어뜨릴 수 없어. 그러니까 부마가 누가 됐든지 간에 상 공주가 우리 주국의 유일한 공주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아.”

태양은 약속이나 한 듯 다시 떠올랐다. 별빛이 반짝이는 시간부터 햇빛이 사방을 비출 때까지, 하루 종일 연경은 이상하리만치 떠들썩했다.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남녀노소부터 모두가 하나의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다. 과연 황제는 오십여 명의 부마 후보 중 누구의 제비를 뽑을 것인가.

사람들은 숨을 죽이고 조용히 기다렸다. 부마 후보들을 데리고 조상께 제를 지내고 돌아온 황제는 명문가 공자들의 이름이 적힌 검은색 제비 상자를 향해 손을 뻗었다.

대오 속에 있는 헌원사사는 마음이 불안했다. 요 며칠 전염병으로 몸져누운 어머니로 인해 그의 정신은 이미 딴 곳에 가 있었다. 아름답고 신분이 높은 상 공주에 관해 그는 한 번도 헛된 꿈을 꾼 적이 없었다. 꿈에서도 그는 자신의 주제를 잘 알고 있었다. 제비뽑기로 부마를 택한다 한들 그에게 희망이 있을 리 없었다. 그는 자신의 인생에 행운이란 없다고 믿었다.

사는 동안 헌원사사는 시대의 흐름에 맞춰 사는 법을 배웠고, 모든 일에는 그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나쁜 일면이 있다는 걸 배웠다. 그런 그가 뭘 믿고 이런 엄청난 행운을 기대하겠는가. 그건 단지 마음속 꿈이었고, 너무 멀어서 비현실적으로 보이는 환상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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