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독후중생계 (428)화 (428/449)

외전 구염상 2-51

관사소는 약간 경악했다. 조금 전 여인이 본능적으로 보인 행동과 이에 과할 정도로 겸손하게 반응한 봉 대인의 행동이 관사소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순간 대담한 가설 하나가 그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관사소가 자신도 모르게 입 밖으로 말을 내뱉으려 할 때였다.

“설마 그녀는…….”

섭영진이 다시 한 번 격렬하게 기침을 하며 손을 내저었다.

“말하지 마세요.”

관사소가 비틀어 뭉개질 정도로 세게 미간을 모았다.

‘그녀가 상 공주였다니!’

주국의 상 공주를 누가 모르겠는가. 내로라할 청년들을 단번에 잠재운 부마 선발 연회에서 상 공주는 일대에 명성을 떨치게 되었다. 사람들은 연경의 명문 공자들 중 과연 누가 상 공주의 부마가 될 것인지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다.

특히 공주를 독립시키기 위하여 황제가 따로 저택을 짓기 시작한 뒤부터 공주의 신분은 더욱 종잡을 수 없게 되었다. 이는 황제가 공주에게 그만의 가문을 세워 주려는 뜻이었으므로 천하의 영웅 중 정말로 능력을 갖춘 자만이 그녀를 얻게 될 터였다. 그리하여 자신보다 신분이 고귀한 공주를 아내로 맞아들이는 혼사임에도 불구하고 현재 연경에는 공주에게 장가가기를 꿈꾸는 자가 셀 수 없이 많았다.

조금 전 공주를 바래다주고 떠난 작은 회오리바람 같은 봉 대인과 몸이 호리호리한 섭 장군, 그리고 기세등등한 고 대인 같은 이들이 유력한 부마 후보였고, 그 중에는 심지어 연경에서 가장 존귀한 권씨 가문의 공자도 있었다.

그러니 관사소와 같은 상인 가문의 자식은 거리의 쥐와 같은 존재로, 이러한 경쟁에 참여할 자격이 없었다. 오히려 고관대작의 서출 자녀가 온몸에서 구리 냄새를 풍기는 장사꾼 아들보다 더욱 황제의 눈에 들었다.

‘이 얼마나 모순된 일인가!’

관사소는 문득 조금 전 그녀를 책임지겠다고 장담한 스스로가 우습게 느껴졌다. 그녀의 뒤에서 줄을 선 남자들 중 감히 누가 그녀가 처녀이고 아니고를 신경 쓰겠는가. 그녀는 그토록 존귀한 신분이었기에 뒤돌아 나갈 때도 조금의 주저함이 없었다. 궁술 하나로 수많은 사람을 놀라게 한 공주에게 관씨 가문의 부인 자리는 마치 돗자리처럼 우스웠을 것이다.

“왜 그럽니까?”

섭영진은 관사소가 이렇게 침울한 표정을 짓는 건 본 적이 없었다.

“별거 아닙니다. 조금 뜻밖이라서요.”

조금 전 일은 의외의 사고라는 데 관사소는 이견이 없었다. 그녀는 상인과는 왕래할 필요가 없는 아주 높은 신분의 여인이었다. 가문이 몰락한 탓에 제 딴에는 귀한 집 여식이었던 여인이 신분이 낮은 집안에 와 준다며 첩으로 들어오는 여인들과도 달랐고, 그의 조부에게 잘 보이기 위해 관원들이 보내오는 서자, 서녀와도 달랐다. 그녀는 주국의 존귀한 공주 전하였고 그들 같은 일반 백성들과는 어떠한 관계도 없었다.

관사소는 스스로 창피를 당하는 취미가 없었고, 자진해서 황제에게 처분을 기다릴 사람도 아니었다. 상 공주가 아무 일이 없었던 것으로 해준 것만으로도 이미 그는 많은 은혜를 입었다. 관사소는 그 호의를 받지 않을 만큼 어리석지 않았다.

그러나 일은 종종 공교롭게 돌아가는 법이다. 하룻밤 사이 관사소의 주변인들은 모두 상 공주에 대해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녀가 얼마나 온화하고 여성스러운지, 그녀가 얼마나 아름답고 존귀한지는 수시로 그의 귀에 들려와 관사소는 그때마다 그녀의 얼굴을 떠올려야 했다.

관사소는 차갑게 웃으며 마음의 안정을 되찾으려 노력했으나 친구들의 이야기는 그칠 줄 몰랐다.

“폐하께서는 공주께 어떤 부마를 얻어 주실까? 공주께서는 이미 시집을 가지 않겠다고 분명한 의사를 밝혔지만 폐하께서는 동의하지 않는 것 같아.”

“당연히 반대하시지. 공주께서는 선녀처럼 아름다운 자태에 신분 또한 존귀하기 이를 데 없는데 시집가지 않는 게 가당키나 하겠어?”

‘그녀가 시집가는 걸 원하지 않는다고? 왜?’

관사소는 자신이 또 무의미한 생각을 하는 것 같았다. 공주의 성격이 그러하든 말든, 시집을 가든 안 가든 그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자신 때문에 시집을 안 간다고 하는 것도 아닐 텐데.

하지만 관사소는 왠지 모르게 마음이 후련해졌다. 기왕 이렇게 된 거 그렇게 아름다운 여인은 아무도 얻지 못하는 게 나았다.

관사소가 손에 든 옥잔을 빙글빙글 돌렸다. 출렁이는 연녹색 술은 옥잔을 더욱 매혹적으로 보이게 했다.

“다들 소식이 늦군. 공주께서 부마를 선택하지 못하자 폐하께서 공주 전하에게 제비뽑기로 부마를 결정하라고 하셨대. 정녕 모르는가?”

관사소는 순간 바짝 긴장했다. 곧이어 사람들이 맞장구치며 말했다.

“못 들었는데? 어떻게 된 일이야? 어서 말해 봐.”

짐짓 태연한 척하며 목청을 가다듬은 이가 입을 열었다.

“공주께서 계속 부마를 택하지 못하자 황후께서 한 번 우셨다는군. 황후를 가엾게 여긴 폐하께서 공주를 불러 깊은 대화를 나누었는데, 공주께서는 시집가고 싶지 않다고 분명한 의사를 밝혔대.

그런데 폐하께서는 공주가 홀로 외롭게 늙는 건 좋지 않다고 여기신 거지. 그래서 공주께 제비뽑기로 남편을 고르라고 했다네. 연경에 있는 젊은 수재들 중 아무나 뽑아 혼례를 올리라는 거야. 제비로 뽑힌 자가 부마가 되는 거지.”

“허, 말도 안 돼… 그럴 리가 있나…….”

관사소가 손에 쥔 술잔은 좀처럼 내려올 줄을 몰랐다. 그 역시 상상도 하지 못했다. 황제께서 공주의 혼사를 가지고 그런 장난을 치시다니! 손안의 술잔을 꽉 움켜쥔 관사소는 마음이 불편해졌다. 그녀가 다른 사람의 부인이 될 거라 생각하니 분노가 치솟았다.

“정말이라네. 곧 공주부가 지어질 거야. 폐하께서는 그 저택을 부마와 공주께 상으로 내릴 준비를 하고 계신다더군. 그러니까 제비뽑기로 뽑힌 부마는 공주께 장가를 가는 거야. 공주 전하께서 부마를 맞이하는 거지.”

“그게 뭐 어때서! 공주께서는 자태가 아름답고 신분이 존귀하며 금과 무도, 기마와 활쏘기 어느 것 하나 사내 못지않은 실력을 갖추고 계시다네. 공주 전하께 장가가는 남자는 큰 복을 받은 거야.”

”듣고 보니 그렇군. 공주부에 들어가 사는 건 더없이 존귀한 영광을 누리는 거니까. 어떠한 고관대작도 부마가 되는 일에 불만은 없을걸. 우리는 죽도록 일해도 그런 영화는 꿈도 못 꾸는데 말이야.”

* * *

간편한 가을 옷을 차려입은 장서열은 촛불이 환히 켜진 대전 안에 앉아 세 걸음 정도 떨어진 구염락을 불쾌한 듯 바라보았다. 그를 향한 노여움이 좀처럼 가시지 않았다.

하인들은 진작에 물러간 상태였다. 대전에는 분노에 가득 찬 장서열과 의자 옆에 기대고 눈 하나 깜짝 안 하는 구염락만 남아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기분이 나빴던 장서열이 눈앞에 있는 찻주전자를 들어 올려 구염락의 발치를 향해 내던졌다. 찻주전자가 쨍그랑 소리를 내며 산산이 조각났다.

깜짝 놀란 구염락이 미간을 찌푸리며 살짝 언짢은 기색을 보였다. 뜨거운 찻물이 발끝에 닿자 장화가 축축해졌다. 천 사이로 아직 식지 않은 찻물의 열기가 느껴졌다.

발바닥이 뚫리는 것 같은 통증을 느꼈지만 구염락은 이미 이런 통증에 익숙했다. 매번 겪을 때마다 그는 이루 말할 수 없는 후련함을 느꼈다. 화가 풀리는 느낌이었다.

구염락은 전생에서 자신이 장서열에게 저지른 짓을 생각할 때마다 그녀가 자신을 죽여 영원히 환생하지 못하게 만든다 해도 할 말이 없다고 생각했다. 몇 번을 다시 태어난대도 그는 장서열이 두려움을 느끼는 것과 관계 없이 그녀를 자신의 곁에 가둘 생각이었다.

그러니 또 살아 봐야 무얼 하겠는가. 장서열을 구원하기 위해서라도 구염락은 이번 생을 마지막이라 여기는 데 만족했다. 어쩌면 자신을 뒤쫓던 그의 또 다른 영혼 역시 같은 생각을 했는지 모른다. 18년 전 국사國寺의 고승 28명이 ‘그’의 영혼을 가둘 때, 영혼이 고통스러운 정련의 과정을 거치면서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묵묵히 견뎌 낸 것 역시 같은 이유에서였을 것이다.

다만 두 사람은 결국 한 몸이었기에 영혼이 느끼는 고통은 구염락도 똑같이 느꼈다. 특히 불꽃이 일 때는 마치 연옥의 고통이 심폐로 밀려들고 뼈에 스미는 듯했다.

장서열은 찻주전자를 구염락의 얼굴에 던지지 못한 게 한스러웠다.

“애를 타일러야지 같이 제멋대로 굴면 어떡해요? 둘이서 제비뽑기로 부마를 택할 생각을 하다니요! 차라리 길거리에 나가 아무나 골라 시집을 보내지 그래요? 그게 더 간편할 거 아니에요!”

좋은 생각이라 생각했지만 차마 구염락은 입 밖에 내지 못했다. 부인에게 또 욕을 얻어먹기는 싫으니까.

구염상은 이미 혼인을 하지 않겠다고 마음을 굳힌 상태였다. 그러니 구염락에게 무슨 방법이 있겠는가. 그는 스스로 방법을 강구해 상아에게 동의하라고 밀어붙이는 수밖에 없었다.

그는 아직 한참 어린 딸이 세상사에 통달한 노인의 마음을 갖게 할 수 없었다. 부모인 그들이 아직 죽지 않았으니, 딸아이가 세상에 달관하고 세상 물정을 꿰뚫어 볼 차례도 아직 되지 않은 것이다.

게다가 정말로 혼인을 하지 않으면 지금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할지 몰라도 나중에 나이가 들어 백발 노인이 되었을 때 누가 그녀를 아끼고 돌봐 줄지 장담할 수 없었다. 아마 그때는 손자를 불러 욕하고 싶어도 그럴 손자도 없을 것이다.

부마가 좋고 나쁜 건 문제 될 것이 없었다. 어차피 부마는 단지 자손을 잇기 위해 필요한 도구에 불과했다. 구염상에게 자식이 생기면 자신만의 생활이 생기게 될 것이고, 나중에 그 자식은 상아를 돌봐 줄 것이다. 손주들이 상아의 곁을 지키며 외롭지 않게 해 준다면 절로 노후에 의지할 곳이 생길 텐데 제비뽑기로 부마를 뽑는 일이 대체 뭐가 나쁘다는 말인가. 구염락은 자신에게 잘못이 없다고 생각했다.

장서열은 화가 나고 기가 막혀 죽을 것 같았다. 영문도 모르게 딸의 독립이 결정되었고, 딸이 자신의 곁을 떠나 공주부에서 살기로 한 건 백 번 양보해 그럴 수 있었다. 그런데 딸의 혼사를 두고 이런 일까지 저지르다니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단 말인가!

“둘이서 날 화병으로 죽일 셈이군요! 당신 혼자서 맘대로 결정했으니 나와 상의할 필요 없어요. 이제 와서 내게 얘기하면 뭐 해요? 나가요! 얼굴도 보고 싶지 않아요!”

구염락은 움직이지 않았다. 잘못한 게 없었으니까.

“못 들었어요? 내가 직접 내쫓아 줘요?”

‘무슨 근거로!’

장서열은 아들딸이 궁을 나가 따로 살게 되었다는 걸 이유로 보름 동안 구염락을 보지 않았고, 그 다음엔 딸을 위해 부마를 고른다며 또 한 달 동안 그를 보지 않았다. 그런데 오늘도 또 영문을 알 수 없는 이유로 자신을 내쫓으려 하다니!

장서열은 요즘 그의 마음이 얼마나 조급한지 모르는 모양이었다. 그에게 꺼지라고 해도 좋았다. 다만 그에게 욕구를 풀 기회는 줘야 하지 않을까?

“뭐 하는 거야! 이거 놔! 서른이 훌쩍 넘은 나이에 무슨 발정이 나서 이래요! 구염락! 당장 꺼지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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