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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중생계 (427)화 (427/449)

외전 구염상 2-50

관사소는 오늘은 완전히 재수 없는 날이라고 생각했다. 아버지가 이상한 약을 주입하여 손자를 만들도록 이곳에 자신을 버린 것부터가 시작이었다. 어렵게 화해의 통로가 생겼는데 도중에 갑자기 살수가 등장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태가 된 것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죽을 맛인 건 조금 전 그 여인을 본 순간 곧바로 정신이 아찔해지는 묘한 감정을 느꼈다는 사실이었다. 이게 다 무슨 일이란 말인가. 하지만 관사소는 자신이 무언가에 깊이 빠지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무슨 일이든 예외는 없어야 했다. 그는 여인을 향해 소리쳤다.

“그만 하라니까! 여긴 내 구역이야! 입구마다 출입금지라고 써 놓은 거 못 봤어? 설령 그게 없었다고 해도 좋은 집안 규수가 왜 쓸데없이 이런 곳을 헤집고 다녀? 뒤에 대단한 고수가 따라다니니까 세상 무서울 게 없나 보지? 잘못을 나 한 사람에게 뒤집어씌우려 하지 마! 이 일에는 당신도 잘못이 있어!”

그의 궤변에 분노가 치밀어 오른 구염상은 머리끝까지 화가 나는 것을 느끼며 씩씩거렸다.

“당신 말대로라면 난 당해도 싸다는 소리군? 그러면 당신도 만약 내 손에 죽게 된다면 그건 당신이 약하기 때문이겠네? 더 얘기할 것도 없지! 각자 자기 능력에 맡기고 누가 먼저 죽는지 보자!”

관사소는 장사꾼이었다. 밑지는 장사는 하지 않았고 협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일에는 절대 무력을 사용하지 않았다. 이성을 되찾은 그가 최대한 표정을 온화하게 한 뒤 그녀에게 이치를 설명했다.

“당신이 억울하다는 거 압니다. 하지만 이미 일이 이렇게 돼 버렸으니 내가 책임지겠습니다. 어떻게 보상할 수 있을지 방법을 강구합시다. 쓸데없이 화를 낼 게 아니라, 내가 잘못한 부분이 많으니 당신 가족이 과한 요구만 하지 않는다면 마음대로 값을 불러도 좋습니다. 혼수는 우리 관씨 가문에서 전부 책임질 거고 혼인 후 당신 지위도 보장하겠습니다!”

구염상은 좋은 말을 짜내려 노력하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오만방자한 어두운 기운을 몰아내고 열심히 온화한 척을 하는 남자. 그는 멀지 않은 곳에서 허리를 꼿꼿이 세운 채 고통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리고 구염상이 제 발로 동굴에 들어온 것도 사실이었다. 구염상은 남자의 얼굴에 난 상처와 그의 몸에 엉망으로 생긴 흔적들을 바라보았다.

구염상은 순간 초연해져 제삼자의 입장에서 문제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녀는 어쩌면 남자의 말처럼 그가 터무니없이 잘못을 저지른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구염상은 동시에 이 상황이 어이가 없고 모순적이라고 생각했다. 이게 다 무슨 해괴한 일이란 말인가. 만일 아버지와 오라버니가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남자의 말은 철저하게 도리에 맞지 않는 말이 될 터였다. 그러나 구염상은 권세를 믿고 남을 괴롭히는 사람이 아니었다.

구염상이 손을 휘휘 저어 시위에게 싸움을 멈추게 했다. 시위가 갑자기 검을 거두자 그와 교전 중이었던 사람들은 서로 부딪쳤다. 시위는 이미 돌아와 공주의 뒤에 서 있었다. 언제나 냉정한 시위의 얼굴 위에 미약한 송구함이 서려 있었다.

구염상은 냉정을 되찾았다. 조금 전 이성을 잃었던 그녀의 안색은 눈앞의 남자보다 더 어두웠다.

“일단 새 옷부터 주시지요.”

관사소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말이 통하니 다행이었다.

“여봐라, 이 아가씨께 옷 한 벌을 갖다 드려라.”

곧이어 구염상이 연분홍빛 비단 치마로 갈아입고 나타났다. 하늘하늘한 빛깔의 옷을 보며 구염상은 속으로 자조했다.

관사소는 살짝 미간을 찡그렸다. 눈앞에 꽃 같은 소녀를 본 순간 억제한 열기가 다시 솟아오르려 했기 때문이다.

“아가씨, 전 약속은 지키는 사람입니다.”

구염상이 그를 차갑게 쳐다봤다. 반감이 없다면 거짓말이었다.

“필요 없습니다.”

한 번 이득을 본 것도 모자라 영원히 이득을 취하려 하다니. 구염상이 미치지 않고서야 그런 일을 받아들일 리 없었다.

“뜻밖의 사고였을 뿐 마음에 담아두지 마십시오. 가자!”

구염상이 몸을 돌려 들어왔던 길로 걸어 나갔다. 관사소는 넋이 나간 얼굴로 오랫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굳은 얼굴이 더욱 굳어졌다.

구염상은 시위를 데리고 동굴 밖으로 나왔다. 나오자마자 석산을 발로 퍽 찬 그녀는 순간 너무 아파 발을 껴안고 그 자리에서 콩콩 뛰었다.

한참 동안 구염상을 찾고 있던 봉익은 갑자기 튀어나온 구염상을 보고 얼른 그녀를 부축했다.

“왜 그래요? 왜 갑자기 바위는 발로 차고 그럽니까? 아프지 않아요?”

고개를 든 구염상의 눈 속에는 별처럼 눈물이 반짝이고 있었다. 순전히 아파서 나는 눈물이었고, 조금 전 일어난 일에 대한 감정은 조금도 섞여 있지 않았다.

구염상의 불쌍한 모습을 본 봉익이 별안간 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다음에 또 그러는지 보겠습니다. 그런데 옷은 왜 갈아입었어요?”

“실수로 옷을 더럽혔거든요.”

구염상이 안색의 변화 없이 이어 말했다.

“그런데 당신이 사 온다던 먹을거리는 어디 있어요? 조금 배가 고픈 것 같은데.”

구염상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석문이 다시 쾅 소리를 내며 열렸다.

흑색 옷을 입은 관사소가 한기를 내뿜으며 걸어 나오고 있었다. 그의 눈에 들어온 건 조금 전까지 그에게 주먹질을 하고 발을 날리던 여자가 온순하게 다른 남자의 품에 안겨 있는 광경이었다.

언제나 강하고 억세던 관사소는 망연자실해졌다. 조금 전 그녀가 확고한 결정을 내리고 나간 건 모두 저 눈앞에 있는 남자를 위해서였단 말인가?

“봉 대인?”

관사소가 마음을 가다듬었다. 그의 미간에는 약한 실망이 담겨 있었다. 심지어 관사소는 콧방귀까지 끼었다. 역시 여자는 속물이었다. 여인들이 좋아하는 건 높은 가문과 하찮은 작위였다.

‘수재의 첩이 되고 싶을지언정 상인의 부인은 되지 않겠다는 건가? 무슨 이유로 관씨 가문의 젊은 부인 자리를 마다하나 했더니, 훨씬 좋은 선택지가 기다리고 있어서였군.’

조금 전까지 관사소의 마음에 자취를 남긴 여인은 순식간에 꾀 많은 여인으로 변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하늘이 무너진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으면서 지금은 다른 남자의 품에서 위안을 구하고 있다니 어찌 역겹지 않겠는가.

“관사소.”

그를 마주한 봉익이 관원의 위엄을 한껏 과시했다. 연경의 울타리 안에 살고 있는 이상 서로를 아는 것은 당연했다. 봉익은 구염상이 제대로 설 수 있도록 부축하며 온화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아직도 아픈가요?”

고개를 가로저은 구염상은 관사소를 모르는 체하며 답했다.

“이제 그만 내려가요. 좀 피곤하네요.”

봉익은 고개를 끄덕인 후 뒤돌아 관사소를 바라보고 인사를 건넸다. 그는 걱정에 찬 얼굴로 구염상을 부축하며 구각영월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걷는 도중 봉익은 연신 걱정스레 물었다.

“정말 안 아파요? 제게 업히는 게 어떻습니까? 여긴 아무도 없으니 볼 사람도 없는걸요.”

구염상의 목소리는 매우 가벼웠다.

“괜찮아요. 예전에 말을 타다가 부딪친 적도 있는걸요. 정말 안 아파요.”

점점 멀어지는 두 사람과 함께 대화 소리도 점점 멀어졌다. 걱정하는 남자의 목소리와 부드럽게 거절하는 여인의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렸다.

관사소는 냉소를 금치 못했다. 팔짱을 낀 채 벽에 기댄 관사소의 눈 안에 냉기가 스쳐 지나갔다.

‘허세 하나는 잘 부리는군. 봉익은 어떻게 저런 여인에게 반한 거야?’

석문이 열렸다. 관씨 가문의 복색을 한 중년 남자가 초조하게 뛰어 들어와 고개를 숙이고 사죄했다.

“도련님, 늦어서 죄송합니다. 사람은 이미 대령해뒀습니다. 지금 바로…….”

순간 관사소의 머릿속에 자신도 모르게 사모하게 된 여인의 그림자가 스쳐 지나갔다. 냉정하게 생각했을 때 그 여인에게는 남자를 미치게 하는 매력이 있었다. 관사소의 눈빛이 더욱 냉랭해졌다.

“필요 없다.”

말을 마친 그는 자취를 감춘 뒤 나는 듯이 산기슭 아래로 향했다. 관사소는 그녀가 자신을 마주하고도 여전히 봉익의 곁에 붙어있을 수 있는지 궁금했다.

산기슭 아래에는 섭영진이 차가운 눈으로 봉익을 바라보고 있었다.

“봉 대인, 소인이 감히 묻겠습니다. 대인께서는 공주 전하를 어떻게 돌보신 겁니까? 공주 전하를 혼자 돌아다니게 한 것도 모자라 상처까지 입게 만들다니요. 오늘 이후로 공주 전하께서 집에서 몸조리를 하게 만들 작정인 건가요? 더는 다른 부마 후보와 약속을 잡을 수 없게 말입니다. 콜록콜록…….”

봉익이 뱀처럼 교활하게 말하는 섭영진을 바라보며 정중하게 답했다.

“섭 장군께서 지나친 걱정을 하시는군요. 소신은 폐하께 일편단심입니다.”

섭영진이 기침을 하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허약한 몸은 그보다 더 환한 미소를 견디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장난친 겁니다. 마음에 담아두지 마세요.”

봉익 역시 마찬가지로 냉담하게 답했다.

“그럴 리가요.”

문신과 무신의 사이가 좋지 않다는 건 익히 알려진 사실이었고, 그들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산을 내려오던 관사소는 섭영진의 부축을 받고 있는 여인을 보고 비웃음을 흘렸다. 어쩐지 ‘뜻밖의 사고’라는 말을 잘도 하더라니, 이제는 봉익이 보는 앞에서 섭 장군과 저렇게 친밀하게 굴고 있다.

별안간 관사소는 마음이 동요했다. 설마 섭영진의 누이동생인 걸까? 그렇다면 그녀의 곁에 어째서 그런 고수가 있었는지 설명이 됐다.

‘어쩐지 관씨 가문의 부인 자리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더라니 이제 보니 섭씨 가문의 딸이었구나.’

그러나 어느 가문의 여식이든 출신이 얼마나 고귀하든 조금 전 일은 분명 여인에게 좋지 못했다. 그리고 관사소는 그런 일 하나 책임지지 못할 정도로 형편없는 사람이 아니었다.

관사소는 마음의 결심을 하고 유유히 내려갔다. 그는 결정하고 다짐한 일은 반드시 실행하는 사람이었다. 관사소가 공수拱手하며 말했다.

“섭 장군.”

섭영진이 격렬하게 몇 번 콜록거린 뒤 관사소를 마주보며 간단하게 답했다.

“관사소.”

몸을 일으킨 관사소는 그들에게 등을 지고 선 여인의 뒷모습을 힐끔 바라보며 함께 자주 모이는 형제에게 물었다.

“누이동생이신가요?”

섭영진이 살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관사소가 눈썹을 찌푸렸다. 아니라고? 말도 안 돼! 누이동생이 아니라면 어찌 멀쩡한 처녀가 두 남자의 부축을 동시에 받을 수 있단 말인가?

섭영진은 길게 말하고 싶지 않았다. 공주부에 들어가고 싶어 싸우는 사람은 차고 넘쳤다. 관사소의 신분이 아무리 대단해도 어차피 그들 무리에는 끼지 못했고, 부마 후보에 들 자격은 더더욱 없었다. 그러니 구염상이 누구인지 굳이 알려줄 필요가 없었다.

섭영진은 다시 상 공주의 곁에 선 봉익을 바라보며 조용히 콜록콜록 기침하다가 말했다.

“실례지만 봉 대인, 부디 아가씨를 잘 돌봐 주세요. 아가씨, 내일 소인이 아가씨를 모시고 호수 유람을 하러 가겠습니다.”

“내일 얘기해요.”

구염상이 고개를 들자 봉익이 응수했다. 구염상은 발가락의 아픔을 참으며 청산을 떠나는 배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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