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구염상 2-49
구염상은 경탄했다. 두 생애를 살면서도 깨달음을 얻지 못해 분주한 인생을 살고 있는 자신에 비해 권택진은 긴 세월을 산 사람처럼 평온하고 느리며 세상사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다. 두 사람 모두 무엇과도 다투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본래 세상 만물을 꿰뚫어 보는 사람은 인생이 재미없는 법이다.
헤어질 때 구염상은 권택진에게 입을 맞추었다.
“당신의 삶에 의외의 일을 하나 만들어 드리죠.”
놀란 권택진이 곧이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름다운 얼굴이 그의 마음을 환히 비췄다. 그는 속으로 탄식했다. 그녀는 자신을 애지중지해 줄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지만, 뜻밖에도 자신과 마찬가지로 물결조차 일지 않는 고요한 사람이었다.
권택진은 억지로 그녀를 얻으려 하지 않았다. 그녀를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자신과 혼인을 하면 그녀가 삶에서 열정의 불꽃을 찾지 못하게 될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 자신이 우울하고 칙칙한 사람인데 어떻게 그녀로 하여금 꽃송이가 활짝 피어날 수 있도록 생명을 불어넣어 줄 수 있겠는가. 그는 오히려 그녀를 천천히 시들어 죽게 할 것이다. 그건 그가 원하는 게 아니었다.
권택진은 향기로운 구염상을 품에 안고 도발적인 말을 했다.
“정말 놓치고 싶지 않군요.”
이런 재미없는 말은 그로서는 엄청난 용기를 낸 끝에 내뱉은 말이었지만 그녀를 동요시키는 건 역부족이었다. 권택진은 정말 마음이 편치 않았다.
봉익은 계단을 오르는 구염상을 조심스럽게 부축했다. 구염상은 어이가 없었다.
“제가 길을 못 걷는 사람도 아닌데요.”
봉익이 장황하게 이유를 설명했다.
“여긴 물이 있으니 미끄러지지 않게 조심해야지요.”
두 사람은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천천히 위로 올라갔다. 봉익은 그녀를 매우 세심하게 돌봐 주었고, 구염상도 이를 기꺼이 받아들였다. 최근 그녀는 만나는 사람마다 정성스럽고 빈틈없이 자신을 떠받들어 주는 걸 마음껏 즐기는 중이었다. 마치 여러 첩실의 알랑거림에 익숙해지는 것처럼, 구염상도 이런 상황에 익숙해졌다.
구각영월의 정상은 여전히 사람의 마음을 뒤흔들었다. 아래에 자욱이 깔린 청산의 운무를 바라보자 마치 선계에 온 것 같았다. 지금은 나들이를 하기에 좋은 시기도, 그에 적합한 계절도 아니어서 청산에는 손님이 그리 많지 않았다. 사람이 별로 없는 덕분에 구각영월에 있는 반송와류盤松臥柳(큰 소나무와 옆으로 누워 자란 버드나무)는 더욱 선계와 같은 풍취를 자아냈다.
구염상이 난간에 엎드려 아래를 내려다보자 초조해진 봉익이 그녀의 옷자락을 잡았다. 그녀가 너무 기뻐하다가 떨어질까 걱정이었다.
구염상이 몸을 숙였다. 손을 뻗으면 구름을 만질 수 있을 것 같았다. 뭉게뭉게 떠다니는 짙은 구름은 눈처럼 새하얗고 부드러워 보였다.
“정말 예쁘네요.”
그 말에 봉익이 웃으며 참지 못하고 그녀의 이마를 문질렀다.
“마침내 제대로 된 말을 하는군요. 청산이 백 년 동안 쓰러지지 않고 우뚝 설 수 있었던 이유가 있어요. 수많은 고관대작들이 이곳을 좋아했기 때문이지요. 듣자 하니 폐하께서도 예외가 아니라고 합니다.”
구염상이 갑자기 풋 웃음을 터뜨렸다.
“당신의 소식통은 믿을 바가 못 되는군요. 아바마마께서는 과거에 이곳을 헐어 버리려고 하셨어요.”
봉익은 깜짝 놀랐다.
“그런 일이 있었나요?”
당연했다. 장서열이 이곳을 마음에 둔 탓에 구염락은 기분이 좋지 않았다. 하지만 차마 아버지의 권위를 훼손시키는 말은 할 수 없었던 구염상은 이렇게 말했다.
“관원들이 이곳에 푹 빠져 이성과 포부를 잃고 있다고 생각하셨거든요. 하지만 설마 그런 일이 있겠어요? 단지 경치가 좋을 뿐인데 말이에요.”
봉익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한 구염상의 눈빛을 마주하고 처음으로 말문이 막혔다.
구염상은 ‘관원들이 푹 빠졌다’는 의미를 모르는 듯했다. 전생에서부터 잘 모르는 세계였던 탓이었다. 비록 이번 생에서 청산에 ‘성세안락盛世安樂’이라는 곳이 있고, 그 안에 다재다능한 미인들이 있다는 걸 알게 됐지만 그런다고 설마 관원들이 이성과 포부를 잃을 정도일까?
봉익은 고개를 돌려 구염상의 눈빛을 못 본 척했다. 남자라면 성세안락에서 매달 말 성대한 연회가 열린다는 사실을 누구나 알고 있었다. 소문에 의하면 온갖 일이 다 일어나는 연회는 타락과 사치의 극치를 보여 준다고 했다. 하지만 이건 은근한 소문일 뿐, 정말로 연회를 경험한 사람은 구체적인 내용이나 일정 등을 절대 말하지 않았다.
한때 예부禮部에서 불시에 검문을 한 적도 있지만 어떠한 성과도 얻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전설은 영원히 전설로만 전해지고 있었으나, 사실상 이 세계의 전문가들은 모두 알고 있었다. 성대한 연회는 매달 열리고 있었다. 단지 참여하지 않는 사람만 모를 뿐.
구염상은 재미있다는 듯 봉익의 안색이 변화하는 모양을 바라보았다. 질문하듯 바라보는 구염상의 시선에 갑자기 봉익이 입을 열었다.
“배고프지요? 잠시만 기다려요. 제가 가서 먹을 것을 좀 사 오겠습니다.”
말을 마친 봉익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치듯 사라졌다. 구염상은 아래에 뭉게뭉게 떠가는 구름을 바라보면서 갑자기 깔깔 웃음을 터뜨렸다.
‘이제 보니 청산은 정말로 남자들의 이성을 잃게 만드는 곳이군.’
봉익이 알려 주지 않아도 괜찮았다. 돌아가서 오라버니에게 물어 보면 그만이었다.
몸을 일으킨 구염상은 깊은 숨을 들이마시며 두 팔을 벌려 기지개를 켰다. 옅은 물기가 코끝에 맴돌았다. 구름이 허리와 다리 사이를 스치는 것 같아 상쾌하고 기분이 좋았다.
구염상은 몸을 이리저리 움직이다가 제자리에서 콩콩 몇 번 뛰었다. 산 아래 정경을 보는 것이 지겨워지자 그녀는 시선을 누각 안으로 돌렸다. 그러나 과연 이것을 누각이라고 부를 수 있는지 확실치 않았다.
산을 파낸 후 각종 진귀한 식물을 심어 폭포수가 흘러내리는 선경을 조성한 이곳은 소문에 의하면 오색찬란한 일출과 일몰 때 가장 아름답다고 했다. 일출과 일몰 시간이 아니었기에 구염상은 볼 수 없었지만, 다행히 이곳의 진기한 나무와 경치는 여전히 사람을 매혹시켰다.
구염상은 발길 닿는 대로 여기저기 돌아다녔다. 섬세하고 정교한 것들을 좋아하는 그녀는 작은 분재나 풀에 관심이 많았다.
그때,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 발생했다. 화분에 있는 수송水松을 살짝 건드린 구염상의 눈앞에 갑자기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석문이 열렸다.
깜짝 놀라 사방을 둘러보던 구염상이 본능적으로 앞으로 다가가 살펴보았다. 시위侍衛가 즉각 튀어나와 들어가지 말라고 막지 않는 것으로 보아 위험한 동굴은 아닌 것 같았다. 아마 구각영월의 경치 중 일부이리라. 그렇지 않으면 이렇게 눈에 보이는 곳에 희한한 장치를 설치했을 리 없었다.
호기심이 생긴 구염상이 동굴 입구에 늘어져 있는 덩굴을 손으로 헤치며 돌아 들어갔다. 좁은 길을 따라 들어가자 갑자기 눈앞이 확 트이고 밝아졌다. 황궁에서 가장 화려하고 아름다운 경옥전까지 볼품없어 보일 정도로 금빛 찬란한 난간과 옥으로 만든 계단이 나타났다.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풍경에 견문이 넓은 구염상조차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금과 옥으로 만든 잔과 무지갯빛 수정구슬은 구염상의 마음을 설레게 했다.
별안간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다른 석문에서 쾅 하는 굉음과 함께 문이 열렸다. 동시에 흑색 옷을 걸친 남자 한 명이 차분한 걸음걸이로 걸어 나왔다. 긴 머리를 늘어뜨린 남자는 조각 같은 눈썹에 눈매가 깊었다. 형용할 수 없는 박력이 느껴졌다.
구염상은 속으로 깜짝 놀랐다. 아버지와 오라버니를 제외하고 그토록 모든 것을 깔보듯 오만방자한 눈빛을 한 자는 처음이었다.
살짝 눈을 든 남자가 무도장 한가운데 서 있는 여인을 바라보았다. 늘 보던 것을 보는 사람처럼 그의 눈빛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지만, 걸음걸이는 약간 빨랐다.
그러나 약간만 빠른 것이 아니었다. 구염상이 눈을 한 번 깜빡였다고 생각했을 때 남자는 이미 눈앞까지 다가와 그녀를 압박하고 있었다. 곧이어 구염상은 어딘지 싸늘해지는 것을 느꼈고 남자는 이미 그녀를 누르고 위에 올라타 있었다.
“윽, 살려 줘!”
구염상은 죽을힘을 다해 발버둥 쳤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알 수 없었고 그저 아래쪽이 매우 아팠다. 너무 아파서 몸 어딘가가 찢어지는 것 같았다.
멀지 않은 곳에서 시위가 길을 막는 자를 죽였다. 공주가 소리를 지른 순간, 시위는 이미 공주의 몸을 짓누른 남자에게로 몸을 날리고 있었다. 남자는 꿈쩍도 하지 않고 손을 흔들며 시위와 3 초식을 겨루었다.
구염상은 이미 울고 있었다. 수치스럽기보다 너무 아파서, 죽을 만큼 너무 아파서 눈물이 뚝뚝 흘렀다.
숨을 훅 들이켠 남자는 약물이 몸에 일으키는 작용에 극도의 쾌감을 느꼈다. 몸을 뺀 남자는 이내 공격해 오는 시위와 싸우기 시작했다.
‘빌어먹을! 이 자는 어디서 튀어나온 거야!’
구염상은 빌어먹을 짐승 새끼를 죽이고 싶은 분노를 느꼈다. 곧이어 비단 휘장을 찢어 몸에 감은 그녀가 공중에서 죽자고 싸우고 있는 두 사람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분노해 소리쳤다.
“저자를 죽여라! 당장 목을 베!”
구염상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갑자기 사방에서 검은 옷을 입은 한 무리가 날아들었다. 시위를 목표로 한 이들은 말없이 공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모두가 우습게 볼 수 없는 고수였다.
시위는 비록 우위를 점하고 있었지만 패싸움을 벌이고 있었기에 공주를 완벽히 보호하지 못했다. 특히 이 망할 산속 동굴에서는 밖으로 어떤 신호도 보낼 수 없었다.
시위는 남자가 공주를 향해 걸어가는 것을 보았다. 잠긴 목소리가 찢어질 듯 음산하게 울려 퍼졌다.
“만일 내가 일각 이내에 밖으로 소식을 전하지 않으면 즉시 수많은 사람이 이곳을 포위할 것이다.”
남자는 바보가 아니었다. 그는 시위를 보며 일이 잘못됐다는 걸 느꼈다. 저런 고수가 어린 소녀 뒤를 따라다니며 호위를 하다니, 무언가 수상하다는 걸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이제 죽여서 입을 막을 것인지, 아니면 여자를 책임질 것인지를 선택해야 했다.
구염상은 다가오는 남자를 향해 탁자 위에 있는 금잔, 옥잔을 힘껏 내리쳤다.
“저리 가! 꺼져!”
남자는 체내에 끓어오르는 열기와 그녀를 제멋대로 짓밟고 싶은 충동을 억눌렀다. 그의 표정은 얼음처럼 차가웠고 눈빛은 무서웠다. 움직이지 않은 채 하고픈 대로 하도록 그녀를 내버려 둔 그는 위에서 그의 부하와 교전을 벌이고 있는 시위의 위협적인 말을 귀담아들었다.
관사소管四少는 냉담한 표정으로 그녀가 던지는 물건을 맞으며 짜증스럽게 말했다.
“좀 진정하시오! 난 당신이 누군지 몰랐소!”
그가 성가시다는 듯 말을 이었다.
“신분을 말하시오. 만일 내 마음에 들면 관씨 가문 작은 부인 자리에라도 앉혀 줄 테니. 제길, 그만 던지라고!”
도자기에 긁힌 준수한 얼굴에서 피 한 방울이 흘러내렸다. 검은 옷을 입은 자들은 주인이 다친 것을 보고는 순간 눈앞의 적과 바닥에 쓰러져 있는 여인까지 죽이겠다 다짐하며 안간힘을 다했다. 그러나 큰 파도를 만난 것처럼 공격은 점점 힘에 부쳤다. 검은 옷을 입은 자들은 속으로 흠칫 놀랐다.
‘이자는 대체 누구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