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구염상 2-47
“아비를 보거라.”
구염상은 갑자기 너무 화가 났다.
“네, 보고 있습니다! 왜요? 제가 뭘 알고 있는지 묻고 싶으시죠? 혹시라도 아바마마를 배신하고 어마마마께 모든 걸 일러바칠까 봐, 어마마마와 싸우게 될까 봐, 그로 인해 모든 걸 잃게 될까 봐 두려우신 거잖아요! 어떻게 저한테 이러실 수 있어요…….
조금 전까지 저를 위해 부마를 고르고 또 고르려는 아바마마를 보면서 저는 무척 행복했어요. 기댈 수 있는 아버지가 있다는 게, 따뜻한 가족이 있다는 게 정말 행복했다고요! 심지어 제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아세요? 전 아바마마를 대신해 그를 죽여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아바마마는 저를 의심하시는군요.
아바마마, 저는 아바마마 같은 아버지가 있다는 게 싫어요. 전 당신 같은 아버지는 싫어요! 싫다고요! 바꿀래요. 차라리 온화한 충왕을 아버지로 삼겠어요! 아니면 우아한 권 상서라도요! 전 아바마마가 싫어요. 어마마마께 말해서 아버지를 바꾸자고 할 거예요! 아버지를 바꿀 거예요! 바꿀 거라고요…….”
아연실색한 구염락은 울며불며 아버지를 바꾸겠다 외치는 딸을 바라보았다. 슬피 우는 딸을 마주한 그는 순간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당황했다. 딸은 그의 마음을 가장 아프게 하는 말을 하고 있었다. 아버지를 바꾸겠다니. 이 얼마나 두렵고 불안한 말인가.
구염상은 울고 또 울었다. 아버지는 흉악하고 잔인한 사람이라 욕하며 울고, 아예 증거를 송두리째 없애 버려 없던 일로 하려는 아버지를 질책하며 울고, 전생과 현생에서 모두 그녀에게 잘해 주지 못한 아버지를 저주하며 울었다. 그녀는 말끝마다 한마디씩 꼭 덧붙였다. 반드시 어머니에게 아버지를 바꾸라고 할 거라고, 지금 아버지는 매우 나쁘다고.
부리나케 달려온 구염황은 차가운 기운을 내뿜으며 서 있는 아버지를 발견했다. 구염상은 매우 슬프게 울고 있었다. 마치 아버지에게 큰 충격을 받고 상심한 아이처럼, 아버지에게 버림받은 아이처럼.
‘누이동생을 저렇게 상심하고 절망에 빠져 울게 만들다니!’
구염황은 돌연 마음이 아팠다. 그는 누이동생이 아버지의 노기를 감당하고 있다는 사실에 몹시 화가 났다.
‘아바마마는 대체 무슨 짓이야! 밖에서 거드름을 피우는 것도 모자라 집에 돌아와 딸을 겁에 질리게 하다니!’
게다가 오늘은 누이동생의 남편감을 고르는 날이었다. 이런 날 동생을 울릴 줄이야.
동생을 보호하려는 마음이 굴뚝 같은 구염황은 순식간에 서재로 달려들었다. 그는 제정신이 아닌 상태로 울고불고 난리가 난 구염상을 껴안고는 신이나 다름없는 남자를 질책하는 시선으로 노려보았다.
구염락은 딸이 우는 건 두려웠지만 아들은 무섭지 않았다. 어디 감히 솜털도 가시지 않은 어린 녀석이 아버지에게 이래라저래라 한단 말인가.
‘죽고 싶어 환장했구나!’
구염락이 죽음을 자초하는 아들을 향해 매서운 시선을 보냈다.
순식간에 눈물범벅이 된 구염황이 필사적으로 누이동생을 감쌌다. 겁이 나 죽을 지경이었다. 용기는 넘치지만 실력은 부족한 구염황은 다행히 똑똑했기에 싸워도 이기지 못하는 상황이라는 걸 알았다. 돌연 누이동생을 들쳐 멘 그가 죽어라 뛰기 시작했다. 구염황은 두려운 와중에도 독설을 퍼붓는 건 잊지 않았다.
“아바마마! 쫓아오시면 어마마마께 외할머니를 모해하려 했던 일을 알릴 거예요!”
말을 마친 구염황은 누이동생을 데리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뛰어갔다. 이미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구염락은 쥐보다 겁이 많은 아들을 쫓는 것이 귀찮았다. 구염황이 곁에 있다면 구염상이 행여나 무슨 일을 저지르지 않을까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구염황은 천성적으로 상황 판단이 빨라 어렸을 때부터 누가 이 황궁의 주인인지를 알고 있었다. 아들에게 아무리 커다란 간을 준대도 감히 함부로 혀를 놀리지는 못할 것이다.
구염락은 텅 비어 버린 서재를 바라보았다. 딸아이가 흐느끼며 질책하던 모습이 떠오르자 마음이 아파 가슴이 쓰렸다. 어렸을 때부터 성장하는 모습을 지켜본 어린 딸이 고집을 피우며 그를 위협하는 모습은 확실히 아들보다 귀여웠다.
구염락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내뿜던 차가운 기운은 사라졌지만 그래도 그는 상아에게 저택을 지어 주고 궁 밖으로 내보내겠다고 결심했다. 구염락은 이렇게 자신을 설득했다. 성장한 아이가 집에서 함께 사는 건 불편한 거라고.
구염락은 아들과 딸 모두를 내보낼 생각이었다. 이 황궁은 그와 서열이의 것이니, 다른 사람은 물러나는 게 옳았다. 그와 서열이가 어떻게 지내느냐는 전적으로 두 사람의 문제일 뿐, 아들딸이 간섭할 필요는 없었다.
* * *
구염황은 도망쳐 나온 후에도 구염상이 여전히 울면서 같은 말을 반복하자 탄식하며 누이동생의 머리를 툭 쳤다.
“너 미쳤어? 감히 울면서 ‘아버지를 바꾸겠다’는 말을 해? 아바마마께서 흥분하지 않으시고 그 자리에서 네 조상의 무덤을 파헤치지 않은 건 오늘 기분이 좋으셨기 때문이야!”
“속상해서 그랬어요.”
구염황이 즉시 항복했다.
“좀 봐줘. 처음에는 진심으로 울었을지 몰라도 나중에는 너무 심하게 우니 괜히 거짓 같잖아. 뭐, 됐어. 어차피 우린 이미 황궁을 나왔으니 아바마마께서도 우릴 뒤쫓아오진 않을 거야. 공연히 어마마마를 놀라게 하려는 게 아니라면 말이야. 가자. 오라버니가 맛있는 거 사 줄게.”
구염상은 기력을 소진한 탓에 우는 것도 귀찮았다. 자신이 명정의 일을 안타까워한들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그를 위해 해줄 수 있는 것도 없는데.
어머니와 마찬가지로 구염상 또한 명정을 보호하고 싶으면 그에게서 멀리 떨어지는 수밖에 없었다. 명정을 동정하는 건 결국 그에게 죽기보다 못한 삶을 선물할 뿐이었다. 다 그런 아버지를 둔 탓에…….
울어서 퉁퉁 부은 눈을 든 구염상이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
“뭐 먹을 건데요?”
구염황은 손수건을 꺼내 누이동생의 눈물을 닦아 주며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슬퍼하지 마. 나와 어마마마가 있잖아. 우리는 널 사랑해. 우리가 아바마마께 사랑받지 못하는 건 행운이야. 오히려 아바마마의 사랑을 받는 것이야말로 재수없는 일이지. 너도 모르는 새에 네 곁에 있는 사람이 죽음을 맞이하게 되니까. 그러니까…….”
구염황이 누이동생을 매우 진지하게 바라보았다.
“오라버니는 널 사랑해. 내가 널 지켜 줄게. 어마마마든 아바마마든 다 필요 없어!”
오라버니의 말에 구염상은 순간 마음속에 있던 안개가 확 걷히는 기분이 들었다. 지금 이 순간 오라버니는 그녀의 아버지이자 어머니였다. 장난기가 발동한 구염상이 짓궂게 말했다.
“방금 그 말, 어마마마와 아바마마 앞에서도 감히 할 수 있어요? 그럼 오라버니에게 이 몸을 지킬 권리가 있다는 걸 인정해 줄게요!”
구염황이 가슴을 탕탕 치며 장담하듯 말했다.
“그건 간단해! 두 사람이 모두 황릉에 묻히면 이 오라버니가 그 묘 앞에서 백 번은 소리쳐 줄게!”
오누이는 하하 웃음을 터뜨렸지만 ‘묘 앞에서’라는 단어에는 모두 슬퍼했다. 아무리 못된 아버지이고, 아무리 나쁜 습관에 물든 어머니이면 뭐 어떠한가. 두 사람은 오누이의 부모였다. 설령 언젠가 온 천하가 그들을 비난한다 해도 두 사람의 자식들은 절대 그러지 않을 것이다.
부황과 모후는 혈육의 정 외에도 자식들이 진심으로 존경하는 사람이었다. 그들에게 생존을 알려 주고 강산을 물려준 사람. 아버지는 이들 오누이의 마음속에서 넘어설 수 없는 신과 같은 존재였다.
* * *
“폐하께서 태자 전하께 왕부를 지어 주기 위해 부지를 선정하고 계신단 말이오?”
목소리는 솜털처럼 가볍고 작았다.
「아니오. 부지는 이미 선정하셨소. 전 왕조 때 역모로 참수당한 왕의 저택이라 하오.」
노인은 대답 대신 손가락에 물을 묻혀 탁자 위에 한 글자 한 글자를 적었다. 혹여 말이 새어나갈까 매우 조심스러운 모습이었다.
“역모자의 저택?”
비밀회의에 소집된 사람들의 눈에 놀라움이 떠올랐다.
‘폐하께서는 무슨 뜻으로 그러신 걸까? 무언가를 암시하고 계신 건가?’
‘혹 태자가 역모를…….’
‘제길! 대체 폐하께서 암시하는 게 뭐야!’
사실 구염락은 단지 그 저택이 가장 넓고 아름다워 편하다고 생각했을 따름이었다. 이에 매우 만족한 장서열은 아들에게 저택을 내려 주고 궁을 나가 살게 했다.
장서열은 딸까지 나가는 것은 원치 않았다. 그러나 얼마 전, 구염상은 오라버니도 저택이 있으니 자신도 달라는 서신을 보내 왔다. 주지 않으면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것으로 간주하겠다는 내용이었다. 그리하여 장서열은 지도를 들고 딸이 살기 적합한 저택을 고르게 되었다.
구염락은 빠르게 확산되는 유언비어와 제멋대로 난무하는 중신들의 추측을 전혀 저지하지 않았다. 이런 소식을 접하지 못한 장서열은 저택 하나 때문에 중신들 사이에서 거센 풍랑이 일고 있는 것을 전혀 알지 못했다.
구염황은 요즘 여러 신하를 만나느라 매우 바빴다. 모든 이들이 마음속 깊은 곳에 이야기 하나쯤은 감추고 있는 것 같았다. 사람들은 어린 혈기에 구염황이 외로움을 견디지 못하거나, 황제가 명을 다한다면 어떻게 될까 내기를 했다.
심지어 태자에게 빙빙 돌려 귀띔을 하는 이도 있었다. 황제와 황후가 아직 젊어 아이를 낳을 수 있으니 아마 더 어린 후계자를 중용하기 위하여 태자를 제거할 가능성이 있지 않겠느냐는 말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구염황이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들은 그저 내부에서 소동을 피우는 간신배에 불과했다. 나중에 두들겨 패서 호된 맛을 보여 주면 다시는 감히 기어오를 생각을 하지 못할 소인배들.
구염황이 기다리고 있는 건 이번 상황을 이용하여 진정으로 반란을 일으키려는 자였다. 예를 들면 외부에서 야합을 하려는 신하들이 그러했는데, 구염황은 그들이 주국에 바치는 충심이 진심인가를 의심하고 있었다. 각지의 변방에 흩어진 그들은 어느 대신을 매수하여 나라를 난장판으로 만들려 했으며, 또 다른 대신은 그들의 발톱이 되어 부강한 주국을 멸망시키려 했다.
구염황은 조용히 기다렸다. 태자가 앞장서서 짊어져야 할 책임을 다하는 건 아버지에 대한 깊은 이해와 절대적인 믿음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구염황은 비록 혈육의 정은 믿을 수 없을지언정 아버지의 성격만큼은 절대적으로 믿었다. 아버지는 아이를 싫어했고, 아이를 기르는 건 더더욱 싫어했다. 그러니 어머니의 주의력을 빼앗아 갈 아이를 또 낳는다는 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오라버니! 오라버니! 빨리 와서 이것 좀 보세요. 오라버니가 기르던 물고기가 죽었어요! 죽었다고요! 기어이 초어草魚(잉어과 담수어)를 죽이고 말았군요!”
구염황은 귀신에 홀린 사람처럼 헐레벌떡 뛰쳐나왔다. 공포에 질린 듯 그가 커다란 물 항아리 위에 엎드려 포효했다.
“말도 안 돼! 이건 초어草魚인데! 초어라고! 물만 있으면 산다 했는데 어째서 죽은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