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구염상 2-46
미간을 찌푸린 구염락이 곁에서 걱정하고 있는 장서열을 향해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
“혹 몹쓸 놈을 만나 괴롭힘을 당한 게 아닐까?”
“하여튼 당신 입에서 좋은 말이 나올 리 없죠!”
구염락이 껄껄 웃으며 위로하듯 말했다.
“별것도 아닌 일로 그렇게 마음 졸이지 마. 내게 맡겨. 잠시 뒤 상아가 함박웃음을 짓게 해줄 테니까. 일단 먼저 돌아가. 어떤 녀석을 혼내 줘야 하는지 내가 물어볼게.”
장서열이 구염락을 향해 눈을 부라렸다. 그녀는 자식들이 자신보다 구염락을 더 무서워한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그가 나서는 것이 자신이 나서는 것보다 효과가 좋을 거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가장 중요한 건 이 궁에서 상아의 기분을 상하게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다. 상아가 문을 열지 않는 건 아마 기분이 언짢아서일 것이고, 어쩌면 지금은 구염락이 상아에게 어떤 약속을 해주는 게 필요한 순간인지도 모른다.
장서열은 딸아이의 귀여운 계략을 굳이 언급하지 않았다. 어쨌든 상아는 구염락을 상대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고, 구염락 역시 딸을 애지중지했다. 장서열은 자신이 부녀 사이에 간섭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당신이 잘 달래 주세요. 만에 하나라도 상아의 기분을 상하게 하면 각오해요!”
구염락이 얼른 아부하듯 말했다.
“부인 말씀이 옳습니다. 소생 명심하겠사옵니다.”
황제의 애교에 딸을 걱정하던 장서열은 하마터면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이럴 때마다 장서열은 구염락이 한 나라의 군주라는 걸 잊고 단지 평범한 아버지이자 남자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절로 마음을 놓은 장서열은 평소처럼 어쩔 수 없다는 시선으로 딸아이의 방을 쓱 바라본 후, 궁녀를 거느린 채 물러갔다.
황후가 떠나가 장내의 분위기는 갑자기 변했다. 자리에 있던 하인들은 모두 무릎을 꿇고 감히 건방지게 행동하지 못했다. 언제 그랬냐는 듯 조금 전 온화하고 따뜻했던 분위기는 사라져 있었다.
“물러가라.”
늘 그렇듯 구염락의 목소리는 차가웠다.
“네.”
사람들은 몸 둘 바를 몰라 하며 물러갔다. 자리에 있던 어느 누구도 감히 황제의 명을 거역할 수 없었다. 공주를 걱정하는 유모들조차 감히 대꾸하지 못했고, 황후에게 이 일을 고하는 건 더더욱 할 수 없었다. 그간 황후가 없을 때 갑자기 낯빛을 바꾸는 황제에 대하여 누구도 감히 황후에게 알리지 못했다. 죽고 싶어 환장한 게 아니라면 말이다.
그간 황제의 손에 죽어 간 후궁들은 손꼽아 셀 수 있었지만, 그가 죽인 궁녀와 태감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구염락의 얼굴빛이 서늘해졌다.
‘어화원이라고?’
구염락의 눈빛이 굳었다. 곧이어 그의 뒤에서 나타난 누군가가 공주가 누구를 만났는지, 무슨 일을 했는지 보고한 뒤 조용히 물러갔다.
구염락의 표정은 냉담했다. 그의 머릿속에 조금 전 들었던 사람의 이름이 스쳐 지나갔다.
‘명정.’
구염락은 그자를 오랫동안 잊고 지냈다. 그의 이름을 다시 듣게 될 줄이야. 입가에 싸늘한 미소를 띤 그의 눈 속에는 망연자실한 감정과 살의가 담겨 있었다. 사람을 떨게 하는 이 모습을 만일 소리자가 보았다면 분명 탕약 한 사발을 준비한 뒤 황후에게 달려가 주인이 치료를 위해 탕약을 다 마실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부탁했을 것이다.
그러나 재빨리 평소와 같은 표정으로 돌아온 구염락은 문을 두드리거나 이름을 부르지 않는 평소 습관대로 손을 뻗어 문을 밀었다. 방문은 종잇장처럼 힘없이 열렸다. 황혼빛으로 어두워진 서재 안에 자애로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우리 딸, 무슨 일인지 이 아비에게 말해 보렴. 누가 널 괴롭힌 게냐?”
구염상은 속으로 깜짝 놀랐다. 눈 안에 가득 고인 눈물을 훔치기도 전에 아버지의 그윽한 눈과 마주친 그녀는 본능적으로 움츠러들었다가 즉시 아닌 척했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구염상은 아버지가 부디 움츠러든 자신을 눈치채지 않았기를 기도했다.
‘제발 못 봤기를!’
안타깝게도 하늘은 구염상의 소원을 들어주지 않았다. 구염락이 딸아이를 못 봤을 리 없었다.
어떤 사람은 수없이 같은 생을 살아도 누군가의 적수가 되지 못 하는 법이다. 만일 새로운 생을 산 이후에도 마음대로 주무를 수 없는 사람을 만났다면 그건 그들이 처음부터 몹쓸 사람을 만나 패배했다는 것을 뜻했다.
아쉽게도 장서열은 그렇게 운이 좋지 못했고, 이는 구염상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들이 만난 남자는 너무 강해서 그에게 반항하는 것조차 가소로워 보였다.
구염락의 눈빛이 돌연 변했다. 순식간에 자애로운 모습을 거둔 그는 위압감으로 사람을 압도했다. 마음이 철렁 내려앉은 구염상은 곧이어 이 상황이 우습다고 생각했다.
‘이것 봐. 이게 바로 아바마마야.’
아내가 사랑스러우면 처가 말뚝에 절을 한다는 말처럼 구염상은 자신이 어머니의 ‘부속품’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버지가 정말로 자신을 위해 시간을 쓸 마음조차 없다는 것은 믿을 수 없었다.
갑자기 구염상이 울기 시작했다. 너무 슬픈 나머지 그녀는 구슬프게 흐느꼈다. 아버지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사실만큼 딸을 슬프게 하는 일이 어디 있을까. 그래서 구염상은 제멋대로 실컷 울었다. 그녀의 흐느낌은 몹시 서글펐다.
어찌 됐든 구염락은 아버지였다. 그는 딸이 생각하는 것만큼 그리 형편없는 사람이 아니었다. 일순간 그의 냉랭하고 차가운 분위기가 무너지기 시작했다. 단지 아주 조금 엄숙한 표정을 지었을 뿐인데 딸이 이렇게 놀랄 줄이야.
탄식을 내뱉은 구염락은 ‘명정’이라는 이름에 민감하게 반응한 것도 모자라 딸까지 의심한 스스로를 나무랐다. 이렇게 어린아이처럼 슬프게 우는 딸을 보자 냉정한 구염락도 차마 모른 척할 수가 없었다. 안 그러면 잠시 후 돌아가서 장서열의 손에 죽음을 맞이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구염락은 상황을 만회하기 위해 쭈그리고 앉아 꽃처럼 어여쁘게 울고 있는 딸을 바라봤다. 그의 목소리에 다시 온기가 감돌았다.
“괜찮아. 두려워하지 마라. 네가 생각하는 그런 게 아니야. 네가 무엇을 보았는지 아비도 알고 있다. 명정이 심은 꽃이 보기 좋지 않더구나. 하필 내가 그때 기분이 좋지 않아 그에게 벌을 내렸다. 공교롭게도 신형사에서 새로운 형벌을 가했더구나. 많이 놀랐지? 우연한 사고였을 뿐 별일이 아니란다. 내가 그를 먼 곳으로 보내마. 그러니 어서 나오거라. 우리 공주가 언제부터 이렇게 겁이 많았을까.”
구염상이 멍한 얼굴로 구염락을 쳐다보았다. 흐느끼는 통에 들썩이는 어깨와 찡그린 작은 얼굴은 몹시 가련해 보였다. 마치 부모님에게 버림받고 절망에 빠진 아기 같았다.
구염락은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딸아이는 잔인한 것에 익숙하지 않았고, 그 역시 딸아이에게 잔인한 형벌을 보여 줄 생각이 없었다. 만일 부득이하게 보여줘야 한다면 단칼에 고통 없이 죽는 장면만 보여 줄 생각이었다.
구염락은 딸이 울음을 그치기는커녕 갈수록 더 구슬프게 울자 쓴웃음을 금치 못했다. 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탁자를 번쩍 들어 옆으로 치운 뒤 딸을 품에 안아 들고 위로했다.
“이제 그만 뚝 울음을 그치거라. 네 어머니가 보면 큰일이라도 난 줄 알 것이다.”
구염락의 품은 차가웠다. 너무 울어서 더는 울지 못할 줄 알았던 구염상은 아버지의 품에서 오히려 울면 울수록 더욱 눈물이 거세지는 걸 느꼈다. 긴 세월 마음속에 켜켜이 눌러왔던 설움과 조금 전의 공포가 겹쳐졌다. 모두 눈물로 쏟아 내야만 후련해질 것 같았다.
구염락은 매우 아끼는 딸아이의 등을 쓰다듬어주며 걱정에 휩싸였다. 만일, 만에 하나 황후의 물음에 상아가 이 일을 모두 말하면 어떡하지? 게다가…….
구염락의 눈빛이 흐려졌다. 더는 생각하지 말자고 자신을 설득했지만 조금 전 일등공一等功이 올린 보고는 은연중에 그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상아가 명정 앞에서 그렇게 오랫동안 침묵한 이유가 뭘까? 그리고 상아는 또 왜 조금 전 그토록 나를 두려워했을까?’
구염락은 딸에게 잘해 주었다고 자부할 수 있었고, 그녀를 무섭게 대한 건 손에 꼽을 만큼 적었다. 어린 시절 딸이 서열이에게 달라붙어 떨어지려 하지 않자 한 번 노려보았던 일, 조금 전 명정이라는 이름을 듣고 조금 강렬한 반응을 보인 일을 제외하면 딸아이에게 딱히 잘못한 일은 없었다.
‘방금 상아는 왜 그렇게 나를 무서워한 거지?’
의심이 많은 구염락은 명정이 딸아이에게 괜한 말을 하지는 않았는지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면 상아가 무엇을 알고 있는 걸까? 그것도 아니면 처음부터 서열이의 입에서 명정이라는 이름을 들은 걸까?
구염락의 마음은 위축됐다. 공포가 삽시간에 온 신경을 지배했고, 그는 은연중에 두려움을 느꼈다.
구염락은 딸이 서열이에게 오늘 일을 말할까 두려웠고, 그가 명정에게 한 짓을 서열이 알게 될까 두려웠다.
‘만일 서열이가 알게 된다면… 서열이가…….’
구염락은 오싹해졌다. 장서열의 차가운 눈빛과 증오, 그보다 더 무서운 분노는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구염락은 어떠한 도박도, 어떠한 위험도 무릅쓸 수 없었다. 그는 모든 걸 잃을 각오가 되어 있었고, 거기엔 아들딸과 그의 과거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는 누군가 자신의 서열과 주국을 흔드는 건 참을 수 없었다.
그 누구도 용납할 수 없었다.
이를 생각하자 구염락은 갑자기 마음이 오싹해지는 걸 느꼈다. 상아의 울음소리도 그를 진정시킬 수 없었다. 그는 딸이 혹시 자신을 배신하지 않을지 너무나 두려웠다. 혹시라도 딸아이가 잔인한 아버지의 진짜 모습을 어머니에게 일러바치진 않을까.
구염락의 변화를 민감하게 알아차린 구염상은 더욱 구슬프게 흐느꼈다. 결국 그녀는 ‘처갓집 말뚝‘에 불과했던 것이다.
‘이것 봐. 내 생각이 맞잖아. 난 단지 말뚝이었던 거야. 아무리 독한 사람도 제 새끼는 예뻐하는 법이라는데 아바마마는……!’
구염상은 슬픔에 잠겼다. 만일 자신이 어머니에게 더 많은 것을 말할 수 있다는 걸 아버지가 알게 된다면, 그는 분명히 이 자리에서 자신을 극형에 처하거나 어화원에 버려 비료로 만들 것이다.
‘불쌍한 내 신세.’
그러나 구염락은 귀찮아하기는커녕 오히려 인내심을 발휘해 딸을 품에서 떼어 낸 뒤, 진지한 눈길로 구염상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진지한 눈빛이 딸에게 얼마나 큰 공포를 주는지 모르고 있었고, 너무 긴장한 자신이 나머지 두 주먹을 꽉 움켜쥐고 있다는 것도 알아채지 못했다.
“상아.”
“네…….”
구염상은 이제 두렵기보다는 걱정이 앞섰고, 이 상황이 우습기까지 했다. 두 번째 생을 얻었는데도 이렇게 불쌍하게 살고 있다니. 아버지의 사랑을 받으면서도 이렇게 불쌍할 수 있다니. 너무나 슬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