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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중생계 (422)화 (422/449)
  • 외전 구염상 2-45

    구염상은 감히 그를 추궁할 수도, 기억을 깊이 파고들 수도 없었다. 아버지와 오라버니가 국법으로 반역자를 처벌할 때의 수법은 그녀의 기억과 믿음을 붕괴시키고 무너뜨릴 만큼 잔혹했다.

    아버지는 구염상이 다시 태어난 후에도 감히 마주 볼 수 없는 사람이었다. 마음속 깊은 속에 있던 악귀들이 튀어나와 아버지를 응원하고, 아버지를 위해 책임을 회피해 주는 듯했다.

    별안간 명정이 담담하게 싱긋 웃었다. 험한 인상이 누그러졌다.

    “저 때문에 놀라셨군요.”

    매우 조그마한 목소리를 낸 후, 명정은 다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이미 뒤로 한 걸음 물러나 공손하게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공주에 대한 문안 인사였다.

    구염상은 눈 깜짝할 새 사라진 얼굴을 다시는 볼 수 없었다. 모든 게 그녀의 착각이었던 것처럼 명정의 얼굴은 갑작스럽게 나타나 눈 깜짝할 새에 다시 사라졌다. 마치 다른 사람에게 들키는 게 두려운 것처럼 말이다.

    명정은 속으로 몹시 후회했다. 그는 별 생각 없이 제자가 흙을 배양하는 약제를 가져온 줄로만 알고 있었다. 하지만 뜻밖에도 다가온 사람은 상 공주였다.

    ‘놀라지 말았어야 할 텐데…….’

    “당신…….”

    구염상은 모른 체할 수 없었다. 바닥에 무릎을 꿇은 명정은 차분한 말투로 자연스럽게 말했다.

    “공주 전하께 아룁니다. 노비는 처음 궁에 들어왔을 때 화장花匠이었습니다. 그런데 실수로 약을 잘못 사용하는 바람에 얼굴이 상하고 말았습니다. 공주 전하를 놀라게 한 것은 노비의 죄입니다. 벌을 내려 주십시오.”

    구염상은 본능적으로 한 발 물러섰다. 놀랄 만한 답 하나가 무의식중에 입 밖으로 튀어나오려 했다.

    ‘아바마마께서 그런 거지? 맞지? 대체 왜 이런 짓을 한 거야! 왜!’

    구염상은 섬뜩함을 느꼈다. 겁에 질린 얼굴이 창백해졌다. 아니다! 아버지가 이런 하찮은 공공 한 명을 괴롭힐 리 없었다. 아버지는 눈에 거슬리는 사람을 곧바로 죽여 버릴지언정 번거롭게 사람을 학대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아주 쉽게 이 세상에서 사라지게 할 수 있잖아!’

    구염상은 생각할수록 무서웠다. 과거 어머니가 냉궁에 갇히고, 자신의 아이가 해를 입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보다 더 어쩔 줄 몰랐다. 두려움이 극에 달하자 오히려 호수처럼 마음이 차분해졌다.

    ‘아바마마께서는 무엇을 알고 계실까?’

    구염상은 마음이 겨울처럼 서늘해지는 것 같았다. 아버지처럼 괴팍한 성격을 가진 사람이 무언가를 눈치챘다면 무슨 일을 저질렀다 해도 놀랄 일이 아니었다.

    구염상은 슬픔에 잠겨 생각했다. 아버지는 누군가 자신의 여자를 돌봐 주고 도왔다고 해서 깊이 감격하거나 고맙다고 말할 사람이 아니었다. 설령 어머니가 죽을지언정 아버지는 다른 사람이 자신의 여인에게 손대는 것을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구염상은 아버지를 너무나 잘 알았다. 전생에서 어머니가 한평생을 적막함 속에 살다가 생을 마감했다는 사실은 아버지가 뼛속까지 잔인하고 악독한 사람이라는 걸 증명했다. 구염상이 여태까지 마음을 열고 아버지의 사랑을 한껏 누릴 수 없던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였다.

    이번 생에서 바람처럼 온화하고 따스한 아버지를 볼 때마다 구염상은 얼떨떨했다. 그는 아버지답지도, 그녀가 잘 알고 있는 음산하고 험악한 황제도 아니었다.

    그렇기에 구염상은 오히려 이 모든 게 아버지의 소행이라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 그게 바로 아버지였기 때문이다. 어머니를 건드린 사람은 죽이고, 죽이지 못하면 죽느니만 못한 삶을 살게 하는 것! 서풍엽이 그러했고 현천기가 그러했다. 그들은 모두 자식이 없었고 집안에 사소한 일이 많았다.

    아버지는 서풍엽의 충왕부 일가가 왕위 계승자를 정할 때 다투다 돌이킬 수 없는 미래를 맞이하기를 기다렸고, 현천기의 현씨 일족이 주국의 영토에서 자취를 감추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현천기는 현씨 일족을 증오했기 때문에 개의치 않았고, 심지어 자신이 남자인지 아닌지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래서 현천기는 거칠 것 없이 살아갔다. 다만 바꿀 수 없는 사실은 귀신도, 사람도 아닌 모습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구염상은 가끔 현천기에게 물어보고 싶었다. 당신은 식사할 때 밥맛이 느껴지나요? 길을 걸을 때면 과거에 멀쩡했던 다리가 생각나진 않나요? 마지막으로 사람을 만졌을 때의 감촉이 기억나긴 하나요?

    구염상은 현천기가 다른 대부분의 인간들이 누리는 기능을 거의 잃었다는 걸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에 놀란 그녀는 결국 현천기에게 복수하기 위해 손을 쓸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현천기가 괴로워하지 않는 이유는 스스로를 인간으로 여기지 않기 때문이었다. 과거 구염상은 이런 현천기를 적으로 상대하려 했으나, 그녀가 처음 짓궂은 장난으로 소금 한 자루를 먹였을 때 안색 하나 변하지 않는 그를 보며 구염상은 결국 씁쓸하게 그를 용서했다.

    아버지는 얼마나 모질고 독한 사람이던가. 결국 아버지는 전생에서 어머니의 말년을 책임지고 모든 행복을 주었던 남자에게까지 손을 쓴 것이다.

    구염상은 실망해서 냉소를 터뜨리고 싶었다. 그렇게까지 가차 없는 아버지를 비웃고 쓸쓸한 자신을 비웃고 싶었다.

    ‘내게 그를 풀어 줄 기회조차 주지 않다니!’

    하필이면 자신에게 생명을 준 사람이 이런 남자라니. 하필이면 이런 사람이 아버지라니! 그는 만백성이 신처럼 우러러보는 제왕이었다. 심지어 그의 무한한 죄업을 아는 비천한 구염상조차 그를 존경했다!

    ‘뭐가 두렵고 무서운 걸까? 한낱 괴이한 얼굴일 뿐인데!’

    구염상은 위선적인 자신을 비웃었다. 혹 무언가를 알게 될까 봐 두려운 걸까? 어머니의 무언가를 아버지가 알게 될까 봐? 아니면 모든 사실을 알게 된 아버지가 자신에게 마수를 뻗을까 봐?

    구염상은 냉소를 흘렸다. 자신과 아버지는 같은 부류의 사람이었다. 그런 자신이 무슨 자격으로 명정 때문에 아버지를 원망할 수 있겠는가.

    아버지는 단지 자신이 감히 하지 못한 일을 한 것뿐이었다. 그녀는 명정을 처음 본 순간 비밀을 지키기 위해 그를 죽여야겠다는 생각 같은 건 하지 못했다고, 감히 말할 수 없었다. 이 얼마나 우스운 일인가!

    “공주 전하…….”

    고개를 떨군 구염상은 명정을 바라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너무 힘들어 말라고 스스로를 타이르며, 그녀는 전처럼 여전히 냉혹하고 무정했다.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명정이 연로한 손을 부들부들 떨며 자신의 무덤 위에 흙을 뿌려 주던 모습은 잊을 수 없었다.

    명정은 그렇게 자상했고, 그렇게 그녀를 동정했다. 마치 그녀를 향한 어머니의 그리움과 사랑을 대신하여 전부 전해 주려는 듯. 그는 혹시라도 가족들이 염려하는 줄도 모르고 구염상이 저승에서 위축되어 있을까 봐 매년 그녀를 보러 왔다. 연장자의 위엄을 갖춘 그는 가진 옷 중에서 가장 좋은 옷을 차려입고 와서 그녀에게 알렸다.

    “아이야, 두려워 말아라. 넌 네 어머니의 자랑스러운 딸이다. 헌원사사는 죽었어. 그 녀석은 죽어 마땅하다.”

    고개를 숙이고 있던 구염상의 눈에서 한 방울의 눈물이 어화원의 진흙 위로 톡 떨어졌다. 구염상은 명정이 그녀를 두 번째로 부르기 전에 황급히 도망쳤다.

    ‘아바마마, 당신은 죽어 마땅해요! 죽어야 한다고요!’

    한달음에 처소로 달려간 구염상은 방문을 꼭 닫은 뒤 서재에 있는 탁자 아래로 몸을 숨기고 덜덜 떨며 흐느꼈다.

    ‘아바마마께서 어떻게 그럴 수가……. 어마마마를 버린 건 아바마마야. 애초에 버린 건 아바마마인데… 이제 와서 누구를 탓하는 거야, 누구를! 왜 명정에게 그런 짓을 하셨어요! 왜!’

    구염상은 두려웠다. 아버지는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걸까? 명정은 또 얼마나 모진 곤욕을 치렀을까?

    ‘진작에 생각했어야 했어. 진작에… 어마마마는 아바마마를 이길 수 없어.’

    * * *

    다른 영혼과 충돌한 구염락의 영혼은 두 눈으로 직접 목격한 전생의 기억에 가슴 찢어질 듯 아파했다. 너무 슬픈 나머지 죽고 싶다는 생각까지 할 정도였다.

    머리로 아는 것과 두 눈으로 직접 보는 것은 다른 일이었다. 장서열이 다른 남자의 품에 기대있는 것을 보았을 때, 바보 같은 그녀가 다른 남자를 향해 미소 짓는 것을 보았을 때, 그녀가 다른 남자의 입맞춤을 받아들였을 때, 그리움에 사로잡힌 그녀가 황량한 계단 위에 앉아있다가 다른 남자에 기뻐하며 미친 듯이 달려갔을 때, 구염락은 영혼이 불타는 것 같은 고통을 느꼈다.

    만일 그것이 전생이라면, 이미 모든 게 새롭게 시작됐는데 왜 구태여 전생을 보여준 걸까. 자신을 그토록 열렬히 사랑하던 장서열을 한 걸음 한 걸음 그런 지경으로 몰아넣다니. 구염락은 깨달았다. 그는 그녀에게 개돼지만도 못한 짓을 한 것이다.

    그 중에서도 구염락을 가장 두렵게 만든 건 전생의 장서열이 다른 남자로 인해 그토록 환하게 기뻐했다는 것이었다. 전생에서 그녀의 모든 것을 포용한 한 남자는 마치 아이를 키우듯 그녀를 돌봤다. 그리고 그 여인은 오늘날 그의 정신을 혼미하게 만드는 아름다운 장서열이 되었다.

    구염락은 두려웠다. 명정과 함께한 장서열의 전생이, 장서열의 마음속에 여전히 그 남자가 있을 것 같다는 의혹이 두려웠다. 그리고 왠지 그가 두려워하는 일이 장서열에게 일어나는 것만 같았다. 장서열은 명정이 어화원에서 일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어화원에 들어가지 않았다.

    ‘내가 참지 못하고 명정을 해칠까 두려워하는 걸까?’

    구염락은 미친 듯이 웃고 슬퍼했다. 하지만 그는 장서열을 꽁꽁 가두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어떤 대가를 치러서라도 그녀를 숨기고 싶었다. 궁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하고, 사람들과 접촉하지 못하게 하고, 모든 바깥일을 숨기고 싶었다. 설령 이 감정이 허상일지라도, 힘든 경험을 한 데서 온 타협이라 할지라도 그는 그녀를 절대 포기하지 않을 터였다.

    구염락의 귀에 구염상이 서재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는다는 소식이 전해졌을 때는 이미 한 시진이 지난 후였다. 궁녀와 마마嬤嬤들은 구염상이 문을 열지 않자 황후에게 이를 보고했다. 황후가 조급히 문을 열라 설득했지만 문은 열리지 않았고, 결국 그녀는 습관처럼 남편에게 처리를 맡겼다.

    구염락은 딸의 침궁에 있는 서재 밖에 나타났다. 부드럽게 장서열의 손을 잡은 그가 초조해하지 말라고 말한 뒤, 위엄 있게 궁녀들을 바라봤다.

    “어떻게 된 일이냐?”

    대마마大嬤嬤가 제일 먼저 입을 열었다. 공주가 서재에 들어간 지 한참이라 그녀 역시 조급했다.

    “폐하께 아룁니다. 노비도 잘 모르겠습니다. 공주 전하께서는 연회에서 돌아오시던 중 갑자기 잊은 물건이 있다며 혼자 다녀오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런 뒤…….”

    대마마大嬤嬤가 슬퍼하며 눈물을 훔쳤다.

    “돌아오신 후부터 줄곧 저 상태로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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