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독후중생계 (421)화 (421/449)
  • 외전 구염상 2-44

    도도는 재빨리 몸을 피하며 현천기와 거리를 두었다.

    섭영진은 가까이 다가오는 도도를 흥미 없는 표정으로 쳐다보며, 세상 만물은 정해진 논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스승은 스승답지 않았고, 제자 또한 제자답지 못했다. 그리고 지금, 수준 높다고 생각했던 장군들은 궁 안에서 곱게 자란 공주 한 명을 이길 수 없었다.

    “다음은 형부시랑 겸 연경 부윤을 맡고 계신 봉 대인입니다.”

    봉익은 앞으로 나가지 않고 자리에서도 일어나지 않은 채 곧바로 패배를 인정했다.

    사람들은 다시 크게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봉익 이후, 구염상과 겨룰 만한 실력이 있는 참가자들은 전부 낙마했다. 마지막 남은 몇 명도 시합에 나가지 않았다. 앞서 고위급 장군들이 모두 시합을 피하고 패배를 인정하자 누구도 감히 무대에 올라가 굴욕을 자초하지 못했다.

    국화를 감상하기 위해 열렸던 연회장은 순식간에 적막해졌다. 청아한 국화향보다 더 고결한 여인이 무대 위에 우뚝 서 있었다. 혼자 힘으로 60여 명의 부마 후보를 물리친 그녀를 상대로 오직 한 명만이 무승부를 이뤄냈다. 심지어 무승부를 기록한 고원 역시 이긴 것은 아니었기에 다음 관문에 들 수 있는지는 두고 봐야 할 문제였다.

    고작 두 번의 무예 시합으로 구염상은 문무백관 앞에 그녀의 실력을 드러냈다. 또한 두 번의 문예 시험으로 구염상은 주국의 위대한 기상을 보여 줬다. 공주의 더할 나위 없는 외모와 재능을 모두가 알게 되었고, 부마 선발에 참가한 이들은 모두 전멸했다. 상 공주는 무승부를 승리로 인정하지 않았다.

    몸부림치던 고원은 갑자기 침묵했다. 한순간에 상국연의 의미가 퇴색된 것 같았다. 가볍고 편안하게 화살을 들고 떠나는 모습은 왠지 쓸쓸했다. 꽃이 가득 핀 가운데 구염상은 적막만을 남겨 두고 떠났다.

    이런 결과를 맞이할 줄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겨우 두 차례에 걸친 시합만으로 상 공주는 모든 사내를 탈락시켰다. 상 공주는 직접 모든 관원에게 알려 주었다. 아무도 그녀의 곁에 서서 어깨를 나란히 할 자격이 없다고.

    커다란 권세를 누리는 장군 집안의 자제와 명문 세도가의 자제, 혹은 초야에 묻혀 사는 은자까지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구염상은 놀라운 실력으로 본래 공주를 거절할 목적으로 연회에 참석했던 사람들을 도리어 거절했다.

    장내에 모인 사람들은 탄식을 금치 못했다. 바깥에 있던 관원들 역시 인생의 덧없음을 느꼈다. 누가 이런 결과를 상상이나 했겠는가. 서로 지기 위해 경쟁하게 될 줄 알았던 연회가 이기고 싶어도 이길 기회가 없는 국면으로 변하다니!

    패배를 목적으로 한 사람과 스스로가 잘났다고 생각한 사람, 다른 사람은 안중에도 두지 않던 사람들 모두 지금 이 순간 인생이 한바탕 우스운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 마침내 실컷 웃다 못해 그들 자신도 웃음거리가 된 것이다. 공주는 제 주제를 모르는 그들을 비웃고, 우스꽝스러운 그들을 비웃고, 그들의 영혼 깊은 곳에 있는 무지함과 나약함을 비웃었다.

    화복으로 갈아입은 공주는 다시 눈부신 자태의 황후 옆에 자리했다. 그녀만이 가진 아름다움은 미색으로 정평이 난 황후 옆에서 꽃처럼 활짝 피어났다. 황홀한 가운데 중신들의 머릿속에는 오로지 한 문장만이 떠올랐다.

    ‘영웅은 고독하다!’

    그러나 구염상이야말로 장내에서 가장 고독한 여인이었다. 그녀는 모든 사람을 무시했고, 심지어 마주할 가치가 없다고 여겼다.

    돌연 만족스럽고 위엄 있는 웃음소리가 장내에 울렸다. 영덕대제는 그다지 개의치 않는 얼굴로, 또한 더할 나위 없이 불쾌한 기색을 띠며 탈락한 신하들을 마치 검사하듯 훑어보았다.

    “공주가 어리고 철이 없어 겸손과 양보를 이해하지 못하고 함부로 행동하여 웃음거리가 되었다.”

    그런 다음 위엄 있게 웃는 얼굴을 거둔 구염락이 이어 말했다.

    “오늘 참여한 모든 이의 관등을 1등급씩 올리겠다. 공주가 제멋대로 행동한 것에 대한 양해의 표현이다.”

    이어 구염락은 공주를 위한 상국연이라는 말을 완전히 지운 채, 이번 모임은 군신 교류의 장이며, 주국의 무한한 강토와 백성이 부강해지기를 바라는 뜻을 담고 있다고 덧붙였다.

    “황제 폐하, 만세 만세 만만세! 황후마마, 천세 천세 천천세!”

    군신이 함께 노래와 춤을 즐기기 시작했다. 징과 북이 요란하게 울리며 떠들썩한 정경을 연출했다. 황제는 더는 부마 선발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고, 중신들 또한 처참한 결과와 멸시로 인해 이를 언급할 면목이 없었다. 시합에 참여했던 이들은 떠들썩한 분위기 속에 침묵하며 홀로 조소했다.

    황제는 그들에게 일깨워 준 것이다. 그대들은 졌으니 차후 부마 선발에 참가할 자격이 없으며, 남은 건 단순한 연회일 뿐이라고. 처음 시작은 다른 목적이었을지 모르나 지금은 그저 단순한 연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패배한 자들은 시종일관 웃지 못했다. 구석에 틀어박혀 홀로 술을 마시는 그들에게서 오만한 태도는 찾아볼 수 없었다.

    상 공주는 도중에 자리를 떠났다. 사람들은 은연중에 그녀를 뒤따라가고 싶었지만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자리를 떠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날 사람들의 마음속에 상 공주의 뒷모습은 영원히 잊히지 않았다.

    * * *

    연회가 끝나자 정원에는 적막함이 가득했다. 태양 아래 국화는 여전히 눈부셨지만 사람은 사라지고, 탁자와 의자도 이미 제자리로 돌아갔다. 진귀한 품종만이 남은 국화는 전문 원예사가 흙을 가져와 다른 장소로 옮겨 주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연회가 끝나고 썰렁해진 어화원 안, 구염상은 화복을 차려입고 설상 앞에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한참을 쳐다보던 그녀는 희미한 미소를 지은 후 설미인雪美人(꽃 이름)의 꽃잎을 톡 튕기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뒤돌아 오솔길을 밟으려던 그녀는 갑자기 궁문 밖을 스쳐 지나가는 그림자에 시선을 고정했다.

    순간 구염상은 낯익은 뒷모습에 바짝 긴장했다. 그녀는 앞으로 달려 나가 생각하는 그 사람이 맞는지 확인하고픈 충동을 느꼈다.

    하지만 구염상은 이제 이곳에 처음 출입해 화들짝 놀라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오늘날 그녀는 권세와 부귀영화를 손에 쥐고 있어 그 무엇도 그녀의 발걸음을 흐트러뜨릴 수 없었다.

    시녀의 손 위에 손을 얹은 구염상은 흔들림 없이 담담한 눈빛으로 들어온 길을 따라 밖으로 나갔다.

    공주의 행렬이 완전히 떠나고 한참이 지나서야 비로소 명정은 한숨을 내쉬며 사람을 데리고 나왔다. 그는 별로 주목은 받지 못했지만 오늘 꽃의 바다를 밝게 빛내 준 설상오국雪霜傲菊을 옮기려던 참이었다.

    “명 공공, 화분에 옮겼어요. 송토松土(부슬부슬한 흙)가 없으니 이식이 매우 성공적이에요.”

    명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흐트러진 토양을 바라보면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그의 목소리는 매우 담담했다.

    “가자.”

    “네, 공공.“

    대태감이 입는 검붉은 비단 도포를 걸친 명정은 허리에 보석띠를 두르고 있었다. 자세는 꼿꼿하고 침착해서 친왕이나 군주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사람들이 모두 흩어지길 기다렸다가 다시 삼색 모란이 담긴 화분을 들고 온 명정은 홀로 설상雪霜을 심는 곳에 나타났다. 그는 매우 능숙한 솜씨로 무성하게 자란 삼색 모란을 다시 원래의 자리에 옮겨 심었다.

    구염상은 물건을 찾으러 돌아왔다가 뜻밖의 사람을 보게 되었다. 이번에는 황급히 몸을 숨기는 뒷모습이 아닌, 꼿꼿한 설상雪霜처럼 수많은 사연을 가진 남자의 모습이었다. 눈가의 옅은 주름과 바다처럼 깊은 눈매는 화초에 대한 집착 외에도 희미한 쓸쓸함이 담겨 있었다.

    구염상은 뒤따르던 하인을 물러가게 한 뒤 바닥에 쪼그려 앉아 있는 사람을 향해 조용히 걸어갔다. 그녀는 그자가 맞는지 다시 한번 보고 싶었다. 과거 자신의 무덤 앞에 흙 한 줌을 뿌려 주고, 슬픔과 무력감에 젖은 말투로 어머니의 생활을 자질구레한 부분까지 알려 주던 그 태감이 맞는지를.

    구염상은 지금 이 순간 자신의 감정을 알 수 없었다. 마치 도저히 옮길 수 없는 돌덩이 하나가 원래부터 숨이 잘 쉬어지지 않던 가슴을 누르고 있는 느낌이었다.

    만일 정말 그가 맞다면 과연 어떤 마음으로 그를 마주해야 할까? 자신의 어머니를 사모한 태감을, 마치 남편처럼 어머니의 남은 생을 돌봐 준 남자를, 온 마음을 어머니에게 준 하인을!

    구염상은 그에게 고마워해야 할지, 아니면 어머니가 없는 틈을 타 그를 제거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구염상은 돌연 고개를 떨구었다. 그녀의 눈 속에 자조가 어렸다. 이런 생각을 하다니. 이 남자는 병든 어머니의 곁을 떠나지 않고 함께 해 주었고, 포악하게 구는 어머니를 후회 없이 돌봐 주었을 뿐더러 어머니의 말년을 지켜 준 사람이었다. 그는 유일하게 어머니를 미워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어머니를 받아들인 유일한 사람이었다.

    ‘만일 그가 하인이 아니었다면, 만일 그가 태감이 아니었다면, 만일 어머니께 먼저 그를 만날 행운이 있었다면… 어쩌면 두 사람은 행복한 가정을 꾸릴 수도 있었겠지?’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는 태감이었고, 어머니의 가슴에 박힌 가시였다. 구염상은 그가 왜 냉화궁에 있지 않고 이곳에 있는지 알지 못 했다. 그러나 뒷모습만 보아도 한눈에 그가 잘 지내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럼 어마마마는 그와 만난 적이 있을까? 어마마마는 과연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실까? 아바마마와 함께 있는 게 행복하실까?’

    구염상은 자신이 터무니없는 생각을 하고 있다고 느꼈다. 아버지가 어머니를 행복하지 않게 해 주었을 리가. 구염상의 아버지는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남자이자 어머니의 세계 그 자체였다. 그에 비하면 명정은 아무것도 아니었고, 본래 주인을 보호해야 하는 태감에 불과했다. 그가 무슨 자격으로 감히 아버지와 같은 선에서 논의될 수 있단 말인가!

    내심 아버지를 향한 긍지에 충격을 가하는 마음이 들기는 했지만 구염상의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다. 마치 이렇게 생각하지 않으면 자신을 아끼고 사랑하는 아버지께 죄를 짓는다는 듯.

    갑자기 명정이 뒤를 돌았다.

    구염상은 굳어진 얼굴로 뒤로 한발 물러섰다. 그녀는 경악한 얼굴로 명정을 바라보았다.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 그의 외모가…….’

    구염상은 눈앞에 있는 사람이 매우 괴이하게 생겼다고 느꼈지만 어디가 잘못된 건지 콕 짚어 설명할 수 없었다.

    ‘분명 눈매까지 전생과 똑같이 생기기는 했지만…….’

    구염상은 뼛속부터 올라오는 한기를 느꼈다. 그의 눈 속에 담긴 우울과 적막은 그녀를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게 만들었다. 그녀는 도무지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왜 이렇게 된 거지? 정말 명정이 맞는 걸까?’

    분명 전생에서 그는 나이가 들어도 기골이 장대한 남자였다. 난생 처음, 마치 아버지의 눈빛처럼 그녀의 무덤을 부드럽게 바라봐 준 남자!

    구염상은 뒤로 한발 물러섰다. 그녀의 눈 속에 담긴 경악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명정은 어디를 봐도 멀쩡해 보였지만 구염상은 어쩐지 그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심지어 그냥 이상한 게 아니라 몹시 이상했다. 그는 마치 누군가에 의해 강제로 영혼이 뽑힌 사람처럼, 찢어져 다시 봉합된 살갗으로 만들어진 기이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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